[묵상글]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전봉석 2022. 4. 11. 05:20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모세를 통하여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들을 너희를 위해 정하여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

수 20:1-3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 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

시 79:4

 

 

가까운 자에게 조소를 받을 때가 있다. 잘잘못을 떠나 서로를 조롱하는 일과 그로 인해 상처를 받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조소는 빈정거리고 업신여기는 일이다. 조롱은 이를 비웃고 깔보는 것이다. 부지부식 간에 우린 자신도 모르게 상대를 그리 말하다가 자신이 그리 여김을 당하면 자존심이 상한다. 하여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하신 말씀과 같이 은연중에 우린 살인하는 자가 된다.

 

이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저마다의 ‘도피성’을 주셨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모세를 통하여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들을 너희를 위해 정하여(수 20:2).” 할 때 ‘정하여’는 히브리어 ‘나탄’으로 장소나 사물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골방’을 소개하시며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하실 때 골방과 도피성을 같은 맥락으로 읽게 된다. 상처 받은 영혼이 숨을 수 있는 곳으로 교회나 가정은 그 사명을 맡은 지명이라 할 수 있겠다.

 

레위지파는 따로 약속의 땅을 자신들의 몫으로 분배받지 못했으나 각 지파로부터 48개의 성을 얻었다. 그 가운데 6개의 성을 도피성을 정하였는데 동쪽에 세 개 서쪽에 세 개를 두었다. 이 장소들은 위임된 곳, 맡긴 곳, 양도한 곳이 된다. 이는 그 책임이 사물이나 장소를 소유함에 있지 않고 맡은 바 그 일, 책무에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이는 엄연히 성전으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예수가 되신다. 곧 우리의 도피성은 그리스도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하나님의 소유로 아무도 이를 함부로 할 수 없다. 도피성은 우리가 각자 품고 사는 장소인데 주를 모신 곳,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이에 우리가 서로 같이 하고 나누는 교제가 그 역할을 하게 된다.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시 91:2-3).

 

이 모두는 그리스도를 지목하고,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곧 우리의 만남이나 서로를 생각함은 도피성과 같아서 서로를 통해 주의 품을 맛보아 알게 한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우리는 부지부식 간에 도피성이 필요하다. 이에 우리에게 지명해 주신 곳이 가정과 교회 사역의 기초이다. 이는 주를 모신 곳으로 우리 몸이 곧 성전이다. 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도피성의 사명을 가진다. 바울은 이를 정리하기를,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1-4).” 하나님의 통치와 은총이 살아 있는 곳으로 ‘나와 너’의 맡은 바 사명이 된다.

 

말씀을 묵상하고 이를 따라가다 보면 나의 날들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가를 새삼 느낀다. 맡기신 바 그 사명이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지도 생각하게 된다. 곧 우리에게 더하시는 마음의 눈으로 그분을 본다는 것,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이에 주를 바라며 주께로 내 마음을 모으는 데 있어, 때로는 주체할 수 없는 어떤 외로움이나 우울감으로 시달릴 때도 있다.

 

가령 주일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요즘은 아내와 의견을 달리하는 일이 있어 어렵게 굴곤 하는데 순간 나는 침묵 속으로 가라앉을 때가 있다. 뭐라 속엣 얘길 털어버리고 싶어도 누구에게는 목사여서 행여 덕이 되지 못할까 하고, 내 스스로에게는 앞뒤가 서로 다른 것 같아 염치없는 마음이 목을 조이듯 할 때가 있다. 애써 말씀으로 전하였던 나와 실제 내가 주체하지 못하는 나의 괴리는 스스로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처럼 사람을 난감하게 할 때가 많다. 누구에게 전화라도 하고 싶은데, 아니면 가만히 어디로 휘익 나갔다 오고 싶은데… 언제부턴가 ‘꼼짝 마라.’ 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나의 골방 나의 도피성은 자연스럽게 새벽시간이 되었다.

 

초저녁에 잠들었다가 새벽 이른 시간에 일어나 이처럼 말씀을 끌어당겼을 때,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 곧 나의 어떤 절망, 고립된 것 같은 어려운 마음이 주의 영광을 바라게 한다는 이 아이러니한 순간. 생각 같아서는 이 고단한 육신을 끌고 마음에 눌려 사느니 이제 그만 놓아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기는 하는데… 그래서도 말씀으로 나오게 하시는 것인지.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25).”

 

침잠하듯 입을 다물어버리는 것이 결코 옳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아내는 공연히 눈치를 살피고 그럼 그럴수록 ‘대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아내 또한 나에 대한 고심이 깊어지는 것도 안다. 그러나 가라앉아 숨고 싶은데, 생각 같으면 어디 멀리까지 차를 몰고 좀 돌아다니다 오고 싶은 마음도 드는데… 예전에는 그렇게 몇 번을 전국을 돌았는지 모른다. 서해 쪽 국도를 따라 돌아 해남으로 해서 남해 가장 가장자리로 돌아 7번 국도를 따라 동해로 올라 나름 한 바퀴를 도는 데 3, 4일이면 충분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면 여수 애양원을 첫날 거점으로, 이성복의 <남해금산>에 들르거나 그대로 쭉 올라 사북까지 와서 태백 예수원을 둘째 날 거점으로 하여, 그야말로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일 외에는 운전만 하고 차에서만 생활하는 무리한 일정도 있었다.

 

우습지만 어제 오후에는 혼자 애양원에 들르기도 하고, 충남당진에 있는 안국지에 들러 낚싯대를 던지고 앉았는 상상도 하다, 태백 예수원으로 들어가는 길목 구멍가게 앞에서 골 깊은 앞산을 바라보며 물끄러미 시선을 놓고 있는 상상도 하였다. 어느새 눈물이 흐르는지, 왜 우는지, 알 수 없는 어떤 외로움 같은 아니 슬픔 같은 우울감이 목을 조이는 것 같다가도… 그러느니 일찍 잠들어 이처럼 이른 새벽에 앉아 말씀 앞에서 행여 내가 잃어버린 도피성을 갈망하는 마음인 듯도 하고. 이러는 게 정상은 아니지, 싶다가도 그래서 주가 더 절실한 것에 주의 이름을 되뇌다가.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벧전 5:10-11).” 하시는 말씀 앞에서 공연히 눈물이 핑, 돌기도 하고. 때로는 오늘의 나로 사는 일이 고단하여 마음이 어렵기도 한데, 더는 식구들에게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 괜히 심통을 부리거나 침묵 속으로 가라앉어거나 하면서, 이게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 앞에 앉는 일, 어쩌면 도피성으로 몸을 숨기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이의 심정으로 나는 새벽을 찾아가곤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일까? 싶다가도, 이 마음을 쥐고 흔드는 게 사탄인지 성령이신지 알 길이 없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도 같고. 이러한 때에 부디 성령을 의심하지 않기를. 오히려 주를 확신하며 주가 주시는 마음으로 여겨 흔들림조차 견뎌낼 수 있기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그러게. 이제는 이처럼 주 앞에 앉아 나의 일련의 마음을 헤아리며 주께 고할 수 있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애처롭고 예전이 더 좋았던 것 같을 때는 한없이 밀려드는 우울감으로 시달리다, 미친 척하고 좀 멀리 떠날까? 하는 생각도 하는데. 예전에는 오죽하니 역마살이 꼈다고도 할 정도였다. 이제는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6-17).” 하면 오늘의 이와 같은 어려운 마음조차 주께 부끄러움이 되지 않기를. 내 안의 갈등을 가지고도 나는 뻔뻔하게 주 앞에 나온다. 도피성으로 들어가 염치없지만 등짐을 내려놓는다. 풉, 하고 치받쳐오르는 어떤 서러움을. 

 

전에 오던 한 소녀가 있었다. 너는 왜 자꾸 너는 손목을 긋니? 하고 하루는 다짜고짜 물었다.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다음이 궁금해서! 나는 그때 한참을 말을 잃었다. 시선을 어디에 둘지, 뭐라 다음 말을 할지, 물끄러미 입만 앙다물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쯤 지나 나는 다시 내차 물었다. 안 아파? 안 무서워? 나의 유치한 질문에 아이는 퉁명스럽게도, 지금이 더 무서워요! 더 아프고! 하였다. 내 질문이? 아니면 사는 현실이? 하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때도 눈물이 핑, 돌았던 것 같다. 아이의 무표정한 표정과 음색 없는 말투와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부끄러워서 나는 허공에 휘휘 저으며 눈물이 흐르지 않게 하였다. 좀 어이없어하는 표정, 지금이 더 무서워요, 하던 건조한 말투, 늘 아프고! 하며 말을 퉁명스럽게 놓던 아이의 심정을 그때는 다 헤아리지 못했다. 어쩌다 나는 저 아이의 도피성이 돼주지 못했을까? 석 달이 되고 아이는 그만두었다. 

 

우리는 저마다 말할 수 없는 함정에 빠져 산다. 허우적거리는데 헤어나올 수가 없다. 누구에게는 허리춤도 안 되는 물길에서 살려주세요, 하고 외치기도 부끄럽고 스스로 일어서자니 연거푸 물을 먹고 있는 것 같은. 허우적거림 속에서 주의 음성을 듣는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 13:12).” 그 영혼의 고단함을 주님은 알아주실까?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하는 바울은 때로 너무 먼 사람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한데 이를 오늘 나의 마음판에 쓰고 있는 것이라니!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나는 말씀을 여러 번 되뇌다 허망한 생각에 사로잡힐 때도 많다. 애쓴다는 말, 마음과 힘을 다하는 것일 텐데 그것이 어히려 늘 의심하게 하고 주를 더욱 바라지 못하게 하는 것일 수도. ‘애쓰다’와 콤플렉스가 만나면 그게 골치 아프다. 고착된 애씀은 성실하기는 하나 그 자체로 우상이 된다. 그런 경우 상대를 조소하고 조롱하는 일이 몸에 밴다. 나 역시 다르지 않다. 툭하면 아내에게 뿔난소리를 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나름은 열심인데, 애쓰고 수고한 것이 자신의 성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쯤 했는데, 싶은. 상대적으로 가까운 사람부터 저는 그만치 못하는 것 같아 조롱거리로 삼는다. 아내의 눈에는 또 내가 그리 비춰서 상대적으로 무능하게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서로에게 입을 삐쭉거리기 시작하면, 예수님은 이를 단호히 ‘살인’과 같은 것으로 해석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두렵다. 나의 어떤 마음이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게 또한 늘 억울한 빌미가 된다. 모두가 그러하여서 이를 가지고 조소하고 조롱하며 상대를, 심지어 자신을 업신여기기도 한다. 그 소녀는 그래서 자신의 손목을 긋고 자해를 서슴지 않았던 것인데, 나는 솔직이 나도 다를 게 없으면서 그 애가 무서웠다.

 

오늘 시편은 이를 주 앞에 아뢴다.

 

하나님이여 이방 나라들이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시 79:1).

 

결국 자신의 도피성이 무너지면, 우린 갈 데가 없다. 어디로 몸을 숨을 곳이 없다.

 

그들이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의 짐승에게 주며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방에

물 같이 흘렸으나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2-3).

 

우리가 당할 수 없는 상대는 자신이고 자신과 가까운 사람 순으로 위협적이다. 이를 두고 지금 주께 고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 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 거리가 되었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질투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4-5).

 

그런데 시편은 그 책임까지도 주께 돌림으로써 주가 나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알린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9).

 

주가 행하셔야 하는 명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그러할 때,

 

갇힌 자의 탄식을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11, 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