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하신지라
삿 10:14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시 93:1
지겨울 정도로 죄는 거듭 돈다. 본문은 중부 지역을 중심으로 사사를 세워 범죄의 악순환과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기록하고 있다(6:1-10:2). 기드온을 이어 자행되었던 죄악은 아비멜렉이 죽고 잇사갈 지파의 사사 둘라가 길르앗 출신 야일이 이어 사사로서의 직분을 다할 때 평안이 깃드는가 했다. 한데 저 둘의 사적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는 그 사역이 보잘것없어서가 아니라 둘라와 야일을 중심으로 특별한 과오 없이 45년 간 이스라엘이 무고하였다(1-5). 곧 저들은 공명심에 눈멀지 않았다. 공명심이란 자기 공을 내세워 기림이다. 하지만 바리새인을 위시하여 사람이란 어떠한가?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 12:43).” 인지상정이 그렇다.
평범한 것이 아름답다. 이는 결코 무난함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빛도 없이 영광도 바라지 않으며 묵묵히 “또 그와 함께 그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이뿐 아니라 그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아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8:18-19).” 우리도 알지만 실제 드러난 이름보다 이름도 없이 주를 바라고 섬기었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평안이 유지된다.
이는 곧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하는 유명한 말씀으로 남게 되는데, 이를 이루기까지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12).” 하는 바울 사도의 증언은 무던함의 속뜻이 아닐까? 하나님은 반드시 위로 하시고 함께 하신다. 오늘 본문에서의 ‘아비멜렉 후에’ 하는 서술은 일체의 고난을 주가 더 잘 알고 계심이었다. 이때에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사 49:13).”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조용한 의뢰요, 섬김이겠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시는 말씀에 전적으로 자신을 내어드림으로 가능하다. 평온하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일상 가운데서 주와 동행한다는 것, 오늘 본문의 두 사사 둘라와 야일의 경우를 묵상하고 상상하며 그려보게 되는 우직함. 노아가 걸어갔을 120년의 묵묵히 방주 짓는 일을 떠올리게도 한다. 무엇을 해야 할 때도 묵묵함은 모든 무던함의 대명사이다.
이를 아름답게 진술하고 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이를 웅얼거리며 묵상하며 걷는 길. 그 일상의 날들이 충성이고, 헌신이고, 주를 기쁘시게 하는 성도의 삶이 아닐까? 나는 가끔, 특히 오늘 아침처럼 알람을 끄고도 잠시 더 뭉개며 갈등하다 일어나 몸이 천근만근인데 이처럼 평일과 같이 말씀 앞에 나를 앉힐 때의 역사처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시느냐 사면으로 너희에게 평온함을 주지 아니하셨느냐 이 땅 주민을 내 손에 넘기사 이 땅으로 여호와와 그의 백성 앞에 복종하게 하셨나니 이제 너희는 마음과 뜻을 바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라 그리고 일어나서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하나님 성전의 기물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에 들이게 하라 하였더라(대상 22:18-19).”
마음과 뜻을 다해 주를 바라며 산다는 일은 그리 요란하고 우레와 번개가 치는 일처럼 엄청난 것은 아니었다. 세상은 다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서로들 미쳐 날 뛴다 해도,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도 고요히 주무시던 주님과 같이. 부디 오늘 하루, 나는 그 하루씩의 삶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이에 오늘 시편은 이를 뒷받침 하듯 하나님의 통치와 그에 따른 견고함을 고백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시 93:1).
이는 모든 삼라만상을 다스리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과 그의 통치를 날마다의 삶 가운데서 보고 듣고 느끼며 사는 성도의 귀한 찬양이겠다. “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하였더라(출 15:18).” 아, 이 놀라운 고백은 그대로 찬송이 된다.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시 103:19).
오늘도 나의 하루를, 이 모든 우주의 질서를 지키시고 다스리시는 것. 때론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이로 인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또한 상처를 받기도 하는 삶이지만, 그런 가운데서 주의 역사와 살아계심을 인정한다는 일,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계 11:7).” 이는 저가 승리하신 것을 앎이다. 앎이 믿음으로, 믿음이 일상에서 삶으로, 삶이 고백으로 이어지는 동안, 하나님의 왕권은 우리를 다스리시고 영원히 통치하신다.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시 93:2).
하나님은 한 번도 그 자리를 내어주신 일이 없으시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7).” 오직 주만이 나의 주인이시고, 나의 전부이심을 알고 산다는 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요 19:11).”
하면 오늘의 이 모든 일도 주께서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 차마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신음하고 원망과 죄악의 자리로 떨어지기 일쑤라 해도, 그 일을 통하여 주를 찬송하고 경배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을, 결국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이를 인정할 때 오늘이 어떠하든지 주의 날을 찬송할 수 있는 것이겠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딤전 1:17).”
이는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들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주와 맞설 사람이 없나이다(대하 20:6).”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으로,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하면 다 때가 있어서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3:1).” 이를 우리는 묵묵히 준행하는 게 우리의 신앙의 일상이 아닐까?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
(애 5:19).
나는 아주 가끔 빛바랜 옛날 사진을 보면 가만히 눈물이 고인다. 그때를 회상하며 그리워해서도 아니고, 사무치는 어떤 그리움으로 마음이 울렁거려서도 아니다. 이를 설명하려면, 나는 가끔 아이들이 살아야 하는 그 시간을 두고 혼자 울적해질 때가 있다. 저들이 또 겪고 견뎌야 하는 시간 속에서 온전히 주를 바라고 섬기기까지 얼마나 많은 곁길과 유혹과 그에 따른 시행착오와 그 과오로 인한 쓴 잔을 마셔야 할까, 하는. 그리하여 나는 현실을 믿지 않는다. 오늘의 이런저런 나의 문제로 심각해지려 할 때 빛바랜 사진을 올려다보듯 주의 십자가를 바라본다. 주가 이루신 일은 날마다 진행형으로 오늘도 그때와 같다. 이는 우리에게 주가 함께 하심을 알게 한다. 나의 기억은 빛바랜 사진에 의존하는 것이지만 주의 날들은 날마다 또 생생하고 새롭다. 결코 악의 세력은 오늘의 우리를 이길 수 없다.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시 93:3).
현실은 넘실거리는 바다처럼 위협적이라 해도,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주를 의뢰함이란 우리가 미처 생각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날들을 앞서 걷게 한다. 하여 내가 좋아하는 구절, 자주 암송하며 되뇌는 욥의 고백으로,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욥 13:15).
어떤 상황 속에서도.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8).” 말씀이 그러함을 붙들고 꿋꿋하고 의연하게, 또는 묵묵히 무던함으로 주의 길을 갈 수 있기를.
실은 누가 이 글을 보고 있을 것을 염두에 두고 나는 저에게 들려주는 것 같이 오늘 아침의 묵상글을 정리한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한 구절의 시편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상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도우시는 이심을,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
(시 93:4).
이를 알고 있던 자들의 성경을 걸어간다. 하나님을 산다. 주는 나의 삶이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그러니 주를 의뢰하고 주만 바라며 걸어갈 것인지, 미쳐 날 뛰는 세상에 덩달아서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은 날들에 시달리며 시름시름 앓다 나이 들어 후회뿐인 생으로, 한 줌 흙으로 돌아갈 것인지….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시 118:6).
그게 가족이라 해도, 그래서 불가근불가원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춤거리는 것이라 해도… 죽은 자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하고 청하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마 8:21-22).” 왠지 도리가 아닌 듯하여 늘 뒤돌아보게 하는 게 가족이라면,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하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1-2).” 때론 모질고 냉정한 것 같으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 19:21).”
우리가 현재 우선하는 것, 앞세워 귀하게 여기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거룩이 우선이고 제일이고 먼저이었다.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
(시 93:5).
이를 알기에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바라였고, 믿었고, 행하였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1).” 우리로 주 때문에 하게 되는 근심이 있는데, 이는 의심도 회의도 회상도 아닌, 더욱 열심히 주를 바라게 하는 동력이었다. 그리하여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오늘도 일련의 여러 상황이 우리 삶에 산적해 있고, 그것들이 숨통을 쥐고 흔드는 것처럼 나를 위협적으로 두려움 가운데 내모는 것 같지만, 그때마다 주의 말씀이 나와 함께 계심으로, 하나님은 스스로 권위를 입으시는 이시다…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시 119:9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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