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전봉석 2022. 4. 23. 05:20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

삿 8:1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시 91:2

 

 

기드온이 미디안 정벌을 완성하고 잔당들을 토벌하는 데 있어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이 기록돼 있다. 자기 민족과의 다툼(1-3), 그 뒤로도 ‘영적전쟁’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자 삼백 명이 요단 강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추격하며(삿 8:4).” 안이하게 여기는 순간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본다. 그래서 바울도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단어는 ‘기도와 간구’로 하라는 것인데, ‘모든’과 ‘항상’에 걸린다. 물론 성령 안에서 이루어질 일이고 스스로의 판단으로는 일을 그르친다. 베드로도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근신’과 ‘깨어 있음’은 서로의 축이다. 깨어 있기 위해 근신이 필요하고 근신할 때 깨어 있게 된다.

 

성령이 일하시면 사탄도 같이 기회를 엿보기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일은 엉뚱한 데서 터졌고, 이는 사람의 한계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은 그의 전부를 사랑한다는 일인데, 이게 늘 ‘좋아하는 것’과 헷갈린다. 좋아한다는 것은 내가 좋은 것으로도 됐다. 그래서 그의 좋은 점만 좋아할 수 있다. 기호나 감정으로도 얼마든지 그리한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싫어하는 것’ 즉 나와 맞지 않는 것들까지도 포용하고 감싸는 것인데, 이를 좋아한다는 것으로 받으려고 하니까 거슬린다. 좋아하는 것은 옆집 여자, 뒷집 남자에게도 얼마든지 느낄 수 있다. 저의 친절과 예의바름이 마음에 끌릴 수 있고 외모와 취향이 좋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그 이상의 것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를 성경의 표현으로 가져오면 영적전쟁으로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은 곧 전쟁이다. 내 안에 싫은 것, 좋아할 수 없는 것까지도 ‘깨어 구하고 특별히 성도를 위해 기도한다.’ 누구의 이야기를 여기에 옮길 수는 없겠다. 일이 잘 되었다, 하고 안도하기 무섭게 일이 터진 것이라, 것도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서로의 ‘본질상’ 죄의 문제여서…. 다만 오늘 본문을 눈여겨보면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서로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얇고 싱겁고 보잘것없는 것인가를 알게 된다. 잠깐 한 마디 더 더하자면, 어제는 아이와 같이 점심을 먹었는데 녀석은 ‘여자 친구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말로 가슴을 철렁하게 하였다. 그 나이에 여자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좋아하는 여자를 바라는 게 어찌 이상할까마는. 그래서 요즘 어느 ‘시골여자 아이’의 개인방송을 보는데 그야말로 ‘꽃바람’이 든 모양이다. 여하튼….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기회다. 오늘 본문 5-9절에서 기드온과 용사들이 세바와 살문나를 따르면서 요단 동편 숙곳 사람들과 브누엘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피로를 호소하며 떡덩이를 요구하다 거절당했다. 자고로 거절은 의외로 상처를 깊이 낸다. 저들은 기드온을 나름 파악했다(10). 그래서 저들은 기드온의 요청을 거절한다. 여기서 보게 되는 것은 잠시라도 틈만 생기면 우린 기회주의자가 된다. 하나님과 세상을 오락가락 한다. 답답하였던 여호수아는 전에 외쳤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쉽지 않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왕상 18:21).” 우리는 대체 얼마나 더 두 사이를 머뭇거릴 것인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일에서인지, 자신의 필요와 감정에 따른 것인지. 실은 이 두 마음은 수시로 우리 안을 들락거려서, “저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호 10:2).”

 

그래서 우리의 하루하루는 쉴 날이 없다. 영적전쟁은 틈을 줄 때 바로 엉뚱한 데서 기다렸다는 듯 감정이 폭발한다. 예수님은 단호하셨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 10:30).” 왜 성경은 그처럼 누누이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일까? 그럼에도 사람들은 마치 넓은 아량과 자기 나름의 감성으로 충분히 세상도 위하고 하나님도 섬길 수 있다고 자부하는데,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어쩜 이리 냉정하신 것일까?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16).”

 

우린 그렇게 스스로 강하지 못하다. 가장 어려운 게 자신이다. 누구더러 ‘네가 제일 문제야!’ 하고 저의 여러 문제 나열 가운데 징징거리는 것을 두고 그리 말해버렸다. 나도 늘 알지만 내가 제일 어렵다. 어찌 안 된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우울증에 걸리지 않으면 저는 이상할 정도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바울의 이 절규가 나는 가장 우울한 목소리로 들린다. 나는 나를 이길 수 없다. 그래서도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엡 5:14).” 우리 곁에 온통 죽은 자들 뿐이라는 사실을 믿는 자들로서도 알지 못한다. 영혼이 주를 바라지 않으면 저는 죽은 자라. 안 믿는 자와 같이 살면서 저가 좋아하는, 저를 좋아하는 일을 따르면서 주를 사랑한다는 게 얼마나 우리 영혼을 소진하는 일인가를. 그러므로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이는 내 영혼이 살기 위함이다. 솔직히 누구를 위하고 사랑한다는 일이, 사랑하면 할수록 불가능하다는 데서 우리를 절망하게 한다. 그러니 적당히 좋아하는 일로 대치한다. 좋을 때, 좋은 것만으로 만족하며 사는 일이다. 온전히 사랑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결국 기드온은 남은 잔당을 척결하고 돌아오면서 세바와 살문나를 잡아 숙곳에서 들가시와 찔레로 징벌한다. 부느엘 망대를 헐고 그 성읍 사람들을 죽인다(13-17). ‘좋아한다’는 배면에는 거절에 대한 앙심과 함께 생각하는 것보다 그 이상의 잔인성을 내포하고 있다. 죽고 못 살 것처럼 굴던 사이가 비난을 일삼고 당장이라도 꼴 보기 싫어 증오와 혐오를 드러낸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좋아하는 감정으로는 사랑을 감당할 수 없다. 저의 배면에 있는 혐오와 증오를 이겨낼 능력이 없다. 그러면서도 사랑한다는 착각보다 오싹한 얼굴은 없다.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시 62:12).

 

우리는 주의 인자와 긍휼하심이 아니면 자신도 바로 사랑하지 못한다. 꾸민다고 꾸미는 것은 ‘좋을 때’이다. 나는 아픈 아이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하는 말에 긴 한숨만 속으로 감추며 그래야지, 그럴 거야, 하고 대답하는데 ‘목사님은 내 맘 알죠?’ 하고 묻는데 나는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어쩌면 이 간단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조차 아이와 아이를 돌보는 이에게는 앞으로 닥칠 엄청난 위험을 예고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게 어디 ‘아픈 아이’여서 저만 그런가? 내가 보기엔 우리 모두가 아픈 사람들이다.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만 위하고, 자기만 섬기기를 바란다. 거기에 사랑이라는 감당할 수 없는 표현을 더하려고 하니, 희생은 싫고 요구만 바랄 뿐이다. 셈을 하듯 내가 이만큼 했는데, 저는 왜 안 하는가? 하는 게 그 마음의 문제라. 스스로들 억울하고 분하다.

 

우리 삶에 망대가 무너지면 감시할 기능을 상실한다. 이를 알고 기드온은 브누엘의 망대부터 헐었다. 우리의 망대는 하나님이시다. 망대를 잃으면 위협을 대비할 수 없어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이를 받아 시인은 노래하기를,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시 4:8).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18:2)

 

그럴 수 있는 요건의 기본이 망대다. 나는 다그쳐 누구에게 묻기를 묵상 시작한 것은 계속 하나? 새벽예배는 가나? 가정예배는 유지되나? 아니나 다를까 모든 게 다 허물어져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안간힘으로 그 사람, 그 가정을 사랑하고 지키려고 하니, 자신도 지키지 못하고 자신이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데 무슨 수로 이를 감당할 수 있을까? 우리에겐 그리스도의 능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능력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약함에 들어 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어찌 그러한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왜 하필 주님은 우리의 약한 데 거하시고, 것도 질그릇에 이 보배를 담으신 것일까?

 

다른 것으로 의지하지 못하게, 자신을 위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왜? 오늘 본문에 웃음을 자아내는 부분이 있는데, 기드온이 그의 장자 여델에게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라고 한다. 하지만 여델은 아직 어려 두려움으로 칼도 못 뽑는다. “그의 맏아들 여델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들을 죽이라 하였으나 그 소년이 그의 칼을 빼지 못하였으니 이는 아직 어려서 두려워함이었더라(20).” 그러니 우리의 착각은 얼마나 자신을 속이는지. 믿음으로 행하면 두려울 게 없다. 안 돼도 그만인데, 될 줄을 안다. 우리가 하는 게 아닌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종종 나는 누구에게 너무 애쓰지 말라는 소릴 하는데, 이는 주가 하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저가 그러는 건 그러라고 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길. 그리 말하고 또 당부하는데도 저는 늘 억울한 것이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저도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냐는 논리인데, 오히려 상대의 눈엔 저도 자신과 다를 바가 없을 뿐이다. 그러니 뭐라 하는 게 가소로울밖에. 그저 묵묵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 저는 그냥 내버려두고!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시 105:4).

 

우리가 바라고 의지할 이는 오직 한 분,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눅 9:1-2).” 단단히 이르신다.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3).” 내가 준비할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린 그게 또 그런가? 앞서 이 걱정 저 걱정 셈을 하고 주판을 먼저 튕겨보고 따를지 말지를 결정하고 싶어 한다. 그걸 알고 사도 누가는 정중히 다시 진술한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49).” 이는 전능자의 아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다.

 

어제 그렇게 난해한 하루였고, 나는 저들과 통화로 만남으로 ‘이 일을 어찌 할꼬!’ 하는 염려로만 들들 볶인 하루였다. 괜히 나 때문에 일을 그르쳤나? 하는 자책으로부터 아이의 너무 맹목적인 의존과 치댐으로 피로감을 느끼다, 집으로 왔을 때 공부방의 아이 가운데 자폐성 아이의 칭얼거리며 계속 되는 말대꾸에 결국 폭발을 하고 짜증을 내며, 그만하고 애엄마더러 데려가라 그러라고 다그쳐댔으니…. 그래놓고는 나의 한계라 나도 어쩔 수 없다는 소리로 주 앞에 다시 민망하여 고개를 숙일 뿐이고. 그러니 때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서 무모한가보다. 허튼 꿈은 좋아한다는 것을 자꾸 사랑한다는 것과 바꿔치기 한다. 좋은 것만 좋고 싫은 것은 받아들이기 싫다. 저의 허물과 약함은 인정할 수 없고, 그저 내가 좋은 것으로만 그만하면 됐다 싶은. 그랬으면 좋겠는…….

 

기드온의 노년이 우리의 결국이 될까 두렵다. “기드온이 아내가 많으므로 그의 몸에서 낳은 아들이 칠십 명이었고 세겜에 있는 그의 첩도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 이름을 아비멜렉이라 하였더라(30-31).” 저는 사사로 부르심을 받고 왕 같이 굴림하며 살다 기어이 교만에 젖었다. 성공이 가진 함정이긴 하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내 공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차지하게 하셨다 하지 말라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신 9:4).” 그러니 결국은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신 32:15).” 살만하다는 것, 적당하다는 것, 이것이 주는 무게는 고난이 주는 것보다 끔찍하다. 바울은 단호하게 외친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일이 좀 잘 됐다 싶을 때 걸려 넘어지기 딱 좋다. 어김없다. 사람은 스스로 선하지 못하다. 그리 자신을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를 오늘 시편은 알리는 듯하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시 91:9-11).

 

우리가 주를 인정한다는 것, 곧 나의 나됨을 주께 아뢰고 구하고 바라고 의지하는 것이 지혜였다. 오늘 시편이 이를 소리쳐 찬송한다. 부디 오직 주만을, 나는 없고 나의 자리에 주님, 도와주세요!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하는 나의 습관적인 기도도 다 그 때문이었다.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

(12-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