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21:25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 104:30
하나님의 통치가 없으면 그 삶은 엉망진창이 된다. 사사기를 읽으며 내내 드는 생각이었다. 더욱이 감정으로 치달을 때 이를 제어할 수 있는, 통치가 없다면 이는 비극이다. 지혜자는 일러 “함부로 이 물건은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덫이 되느니라(점 20:25).” 그때는 옳았으나 지금은 그릇된 것이 어디 한둘이던가?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표징이랄 수 있는 부부의 일을 꼽으라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아닐까? 저들은 자신들 생각으로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곧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주 앞에 바친다는 것, 한데 그 마음은 일순간이어서,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4).”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당하지 않으신다.
오늘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한 지파, 베냐민 지파가 소멸하게 될 상황이 되었다. 베냐민의 몰락은 이스라엘 전체의 문제였다. 결국 저들 가운데 살아남은 용사가 6백 명 가량이었고, 이스라엘은 총회에서 얼결에 결의하여 저들에게 딸을 주지 않기로 하나님 앞에 약속하였다. 그래놓고는 자신들의 대응이 너무 과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미스바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야베스 길르앗을 치고 그곳에서 4백 명의 처녀들을 데려다가 베냐민 용사들에게 주었다. 악이 악을 자꾸 더라는 꼴이다.
오늘 본문 1절이 그 감정적인 결정으로 인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됨을 알게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삿 21:1).” 결국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자신들의 판단으로 얻은 것은 고통이 따를 뿐이다. “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큰 소리로 울며(2).” 성경은 우리의 결정에 대해 우리 스스로 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린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19).”‘
우리가 주의 뜻을 따른다는 게 얼마나 확실하고 후회가 없는 일인지, “이튿날에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거기에 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라(살 21:4).” 곧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이는 우리 주가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이다. 저는 우리의 통치자이시다. 우리를 두르시고 다스리신다. 오늘 시편에 보면,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시 104:2).
이를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이는 곧 저가 우리의 왕이시며 통치자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고 그의 돌보심을 받는 자인 것을 알게 한다.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땅에 기초를 놓으사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시 104:3-5).
성경은 구절구절의 말씀이 서로를 연결되어 이어져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 하신 말씀으로 우리에게 적용하신다. 곧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성경의 구조와 사도의 설교와 우리의 속의 의식의 구조와 일상의 생활이 하나도 서로가 어그러지는 법 없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떠해서든지 베냐민을 모두 진멸하려 했던 이스라엘의 판단은 너무 감정적이었고 그 일의 결정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게 아님을 우리로 알게 한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약 4:15).” 곧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 하나님의 뜻대로 죽는다. 마치 서로의 통계에 따라 몇 살까지는 보장된 삶을 사는 것처럼, 그것도 영원히 이르지 않을 일처럼 굴지만 오늘이라도 오라 하시면 가야 하는 게 인생이다. 이를 위해서도 말씀은 우리로 후회 없는 삶을 살게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 받는 삶이란,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7).” 곧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105).
이는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4).” 우리의 사는 목적이 세상이 가지고 사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을 알게 하시려고 때론 이와 같은 분열과 파국을 낳게도 하신다. 홀로 외로움에 바벨론 강변에 앉아 울게도 하신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 137:1).
실은 그럴 수 있는 게 주의 자녀로서의 저력이다. 세상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그러므로 오늘의 이런저런 일들 가운데서 주를 생각하고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아 슬퍼할 수 있는 것이 능력이다. 할 때에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 곧 우리 각자에게는 맡기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갈 6:5).” 어떤 일로 우울해하다 이를 또한 주가 감당하게 하신 것이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는 것’으로도 이미 순종이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여기에서 감사가 나온다. 세상 구조는 성경의 구조와 달라서 남과 비교하고, 저들처럼 그에 못지않게 사는 것을 행복이라고 부추기지만 실은 어디에도 만족함은 없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곧 나의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곧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받는다는 일은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의심 많던 도마의 고백과도 같다.
사사기의 마지막 장을 기록하면서 우리에게 남기고자 했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오늘도 여전하여서 우리가 일순간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날 때, 가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다! 그에 따른 사달이 곧 따른다. 그때는 후회뿐이다. 성경은 누누이 강조하기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 즉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한 마디로 우리의 사명을 압축하면 화평과 거룩이다. 우리 주님은 이를 위해 오셨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이를 알고 시인은 기도한다.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시 25:5, 143:10).
말씀 앞에 늘 새롭다. 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통치가 필요하다. “주는 이제 내게 지혜와 지식을 주사 이 백성 앞에서 출입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많은 주의 백성을 누가 능히 재판하리이까 하니(대하 1:10).” 하여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잠 2:3-5).”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아니면 단 일순간도 바로 설 수 없다는 것이겠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1-12).”
어제는 공연히 마음만 우울하였고, 아무런 의욕도 없이 늘어져 있던 하루였다. 필사적으로 말씀 앞에 앉는다고 앉는데도 감정은 호젓하여 외로운 것도 같고 슬픈 것도 같아서, 갑자기 눈물이 나기도 했다. 가방을 그대로 풀지도 않고 놓아둔 채 하루 종일 병든 닭처럼 잠만 잤던 것 같다.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한들, 어디를 간들, 무얼 한들…… 나의 고질적인 우울증은 종일 나를 짓눌렀고 나는 마치 모든 사고와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문 채 리모컨을 돌리다 잠들고, 다시 채널을 돌리다 잠들었다. 그리고 다시 이른 새벽, 나는 의무감 나를 일으켜 앉히고 말씀을 읽는다. 그 의미를 되새기다 저들의 어리석음이 고스란히 나의 것과 다르지 않다는 데서 또 슬퍼진다.
고작 저들이 꾸민 일이란, “베냐민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가서 포도원에 숨어 보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춤을 추러 나오거든 너희는 포도원에서 나와서 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하나를 붙들어 가지고 자기의 아내로 삼아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삿 21:20-21).” 궁여지책이란 말, 그것이 우리 신앙을 끝 간 데 없는 죄악의 자리에까지 몰고 가는 것이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 순간이다. 아차, 할 때는 이미 늦었다. 성경은 간곡하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마 4:27).” 나는 결코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어서 답답한 일이다.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딤전 3:7).” 그야말로 남자도 갱년기가 있고 그 정점을 지나고 있는 것인지, 모두가 싫고 만사가 귀찮으니, '염려하라'는 말씀이 가슴을 오래도록 휘감고 돈다.
저들은 아직 짝을 구하지 못한 2백여 명의 용사에게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고자 성소로 올라온 처녀들을 잡아다가 무작위로 자기 아내로 삼으라고 한다… 정말로 악이 악을 더하는 셈이니, “만일 그의 아버지나 형제가 와서 우리에게 시비하면 우리가 그에게 말하기를 청하건대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우리에게 줄지니라 이는 우리가 전쟁할 때에 각 사람을 위하여 그의 아내를 얻어 주지 못하였고 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 하겠노라 하매(삿 21:22).” 그 대응도 악하기만 하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두려운 일이 우리의 악함이었다.
말씀 앞에 턱을 괴고 앉았다가 다시 바른 자세로 앉아 생각을 정리해본다. 어쩜 그렇게까지 그 일, 레위인이 (겨우) 첩을 얻었고, 저를 데리고 여행을 하다 베냐민 한 족속의 집에 유숙하고, 어쩌다 봉변을 당한 일이 일파만파로 악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진 소소한 일이 별 것 아니라 여길 때, 그것이 생산하는 악의 줄기가 마치 고구마 줄기처럼 주렁주렁 악을 맺고 있다. 수시로 드는 생각, 그럴 수 있지! 싶은, 어쩌면 아주 작고 사소한 일에서 그 방심이 부를 '나비효과'를 우리는 가늠할 수가 없다. 나름의 방책이 또한 악하다. 마치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롬 3:8).” 결과적으로는 왕의 통치를 회피했을 때 오는 저 엄청난 파국을 우린 상상도 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절대적이다. 이는 우리로 성경으로 돌아가게 한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0-21).” 아,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시 104:1).
오늘 시편의 이 한 구절의 말씀이 모든 것을 다스리는 결정적인 한 방이다. <여호와를 송축하라.> 오늘 시편은 천지창조의 역사를 시적으로 구술하고 있고 그에 따른 찬미다. 1절과 2절 상반부는 창세기의 창조 역사 첫째 날을 알린다. 2절 하반부에서 4절까지는 창조 역사 둘째 날, 그리고 5절로 18절까지는 바다와 육지와 식물을 창조하시고, 19-24절은 해와 달을 조성하시며 우리의 각종 절기와 주야의 순환을 다스리신다. 25-26절은 바다의 생물을 지으신 다섯째 날이다. 27-30절까지는 땅의 동물과 사람을 지으신 창조 여섯째 날이고, 31-35절은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안식하심을 그려주고 있다.
이에 성경의 첫 구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이 한 구절이 성경 전체의 요점이다. 오늘 시편 1절의 선포도 그것이다. ‘여호와를 송축하라.’ 이는 모든 만물의 의무다.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신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1).” 이를 위해 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곧 하나님의 영광을 송축하고 찬미하도록,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시 104:1).
하고 다음에 이어지는 부연 구절들은 모두가 이를 뒷받침한다. 곧 나의 날들 가운데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어서, 이럴 때는 주를 찬송하고 저럴 때는 주께 기도하는 일이었으니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곧 “그런즉 주 여호와여 이러므로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삼하 7:22).” 그러므로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시 147:5).
그러므로 나의 우울감의 출처가 중요한 게 아니다. 육신의 또는 오늘의 어떤 일이 어디가 문제인 게 아니다. 이는 모두 한 곳을 가리키는데 우리로 주만 바라보게 한다.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겔 1:28).” 결국은 우리가 알고 믿고 의지하고 의뢰하는 이가 어떤 분이신가를 알리는 것이다. 곧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요동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신다는 것,
땅에 기초를 놓으사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시 104:5).
왜?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 3:4).” 오늘을 사는 이 세계가 곧 주의 나라의 모형이다. 물론 거기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존재한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 주의 재림신앙, 곧 주가 오실 날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성도의 책무다. 다시 말해 오늘을 하루 더 연장하여 이 땅에서 오래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항상 주의 나라를 사모하되 그래서도 오늘 이 한 날을 소중히 여기면서 사는 일.
이는 하나님이 이 땅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이곳에 지으셨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몸을 입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사람으로 살다, 죄 없이 사람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는 것인데 곧 다시 오신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는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 15:43-44).” 이를 강조하는 데 있어,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1).” 곧 나의 이 낮은 몸은 조만간 영광의 몸의 형체로 변하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
아, 그러니 우리의 시민권이 여기에 있는 게 아니라는,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20).” 이와 같은 말씀을 설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와 같다. 고로 우리는,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시 37:24, 125:1).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이와 같은 말씀이 나로 강하게 붙드시는 게 아니겠나? 주가 부여하신 사명을 다하는 그 날까지,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8).” 내가 나의 약함을 사랑한다 하면 거짓이겠으나 그럼에도 이를 감사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주의 선하심을 알기 때문이다. 곧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9).”
내 안에 이는 이런저런 부정한 생각들도 나인 것을, 그런 나인 채로 주 앞에 이처럼 앉히는 일. 이는 주의 섬세하심과 세밀하심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 13:32).” 비록 나의 믿음이 겨자씨 같이 작다 해도,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34:10).
나는 종종 나의 나 됨과 나 같지 않은 또 다른 나를 동시에 보는 듯하다. 저 둘은 항상 싸우기도 하고 그럼에도 서로 공생함으로, 넘어져서 주의 이름을 부르고, 눈물 흘리다 주를 찬송한다. 이 알 수 없는 경계의 지점을.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시 104:9).
곧 나의 옛 사람은 여전하다해도 더는 그리로 돌아가거나 끌려가지 못한다. 곧 나의 ‘겉사람은 날로 낡아진다 해도 나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는 데서 안도하고 감사하기도 한다. 이는,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
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옷 입히리니
그 성도들은 즐거이 외치리로다
(시 16:11, 132:16).
이처럼 주의 말씀을 찾아보며 주시는 생각과 새 마음을 따라가는 일은,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3).” 이를 아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주의 자녀가 아니면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리 없고, 주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주의 통치를 받지 않음이니, 사사기를 다 읽고 접으면서 드는 생각은,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2).” 오늘도 이와 같이 나의 나 됨은 저들과 다를 게 없다 해도 이제 완연히 바뀐 것은,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천지가 주의 규례들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까닭이니이다
(시 119:89-9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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