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전봉석 2022. 5. 8. 05:08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룻 2:13

 

여호와께서 여러 번 그들을 건지시나 그들은 교묘하게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낮아짐을 당하였도다

시 106:43

 

 

사사기, 룻기, 사무엘서 상하를 사무엘이 기록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나 근거 자료는 없다. 성령의 감동으로 누가 언제 어떻게 기록하였든지, 우리로 사건의 개요는 물론 그 인물의 내면을 살펴 알 수 있게 하시는 것까지 치밀한 것 같다. 여러 시련을 겪고 오늘에 이르러 주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고 계심을 오늘 본문은 알게 한다. 본문 중에 룻이 보아스에게 받은 은혜에 대해 고백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룻 2:13).”

 

저가 겪었을 상황을 생각하면, 시어머니를 좇아 나오미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그 살림은 궁벽하였다. 추수 때 떨어뜨리는 곡식을 주워 끼니를 때워야 하는 신세다. 이러려고 따라왔나, 싶은 침체 상황인데도 저는 그 환경에 얽매이지 않았다. 다만 성실하였고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여 주가 이끄시는 대로 자신을 놓아드렸다. 곧 우리 신앙의 정석을 보여준다. 보아스가 룻에게 이른다.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8).” 마치 주가 속삭이시는 사랑의 대화 같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내가 어찌 해야 할지, 우리는 다만 그가 이루시는 역사를 따라 사는 것인데, 이는 마치 오늘 시편의 첫 음절처럼 ‘할렐루야’로 시작하여, ‘할렐루야’로 끝나는 것이다.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06:1).

 

이는 우리 삶에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뜻을 기리는 것과 같다. 모든 이야기는 회고에 따른 기록이다. 우리는 앞날을 말할 수 없고 알 수도 없다. 우리는 영원한 은혜를 받았으나 지난날에 받은 은혜를 회상하며 어제의 은혜를 감사하고, 오늘의 은혜를 구한다. 돌이켜 내일을 마주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할 때,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 입술에서는 감사와 찬송이 계속된다. 그럴 수 있는 게, 돌아보면 은혜 아닌 게 없었다! 그 상황이 바벨론 포로 된 때에도 같아서,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

(47-48).

 

이와 같은 찬양이 가능하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 5:4).” 말의 힘이란 이처럼 대단한 것이다. 또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6-17).” 이는 내가 주 앞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어떠하든지 기뻐하는 일인데, 실은 이게 억지로라도 되는 모양이다. 여러 사람들도 웃음을 강조하기도 하는데, 우리의 즐거움은 다르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33:1).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하고 되뇌어 감사하는 일, ‘선하다’는 말은 ‘좋다’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인자하다’는 ‘은혜롭다, 사랑이 많다’는 뜻을 함께 가진다. “너희가 만일 여호와께 돌아오면 너희 형제들과 너희 자녀가 사로잡은 자들에게서 자비를 입어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리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신지라 너희가 그에게로 돌아오면 그의 얼굴을 너희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시리라 하였더라(대하 30:9).” 곧 주는 언제나 우리의 돌이킴을 기뻐하신다. 오늘 마음에 와 닿았던 구절도,

 

여호와께서 여러 번 그들을 건지시나

그들은 교묘하게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낮아짐을 당하였도다

(106:43).

 

곧 나의 어쩔 수 없음 앞에 주의 인자하심과 선하심만을 의지하는 것이다. 이에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곧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뜨거운 간절함은 서로를 붙든다.

 

누가 능히 여호와의 권능을 다 말하며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다 선포하랴

(2).

 

곧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계 5:13).” 이 놀라운 은총이 이방 여인 룻을 다윗과 예수님의 계보에서 중요한 인물로 세우시는 것이다. 참된 복은 우리가 현재 누리는 것으로 단언할 수 없다. 그리하여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1:1-2).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15:2-3).

 

이 뚜렷한 삶의 모습이 우리로 주의 자녀답게 살게 한다. 곧 자신이 허물에 정직하고 이를 주께 고할 수 있도록 한다.

 

우리가 우리의 조상들처럼 범죄하여

사악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106:6).

 

오늘 시인은 주께 아뢴다. 주께 아룀으로 사람으로 지치지 않는다. 사람에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이 지은 죄에 얽매이지 않는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 군더더기가 없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자기변명도 없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주께만 상대하는 것. “내가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들 중에 두며 허다한 나라들 중에 아름다운 기업인 이 귀한 땅을 네게 주리라 하였고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노라(렘 3:19).”

 

이는 언제나 우리 속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동과 감격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결코 나의 생활이 또는 그 결과가 누구보다 나은 것도 없고 오히려 나를 주눅 들게 하기도 하지만, 은연중에 나를 가만히 앉히시는 것은 ‘주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은혜’에 대한 감격이다. 어제도 딸애가 나서서 케이크를 사다 어버이 날을 먼저 축하하는 촛불을 붙였다. 나는 잠깐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우리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가 어찌 행하셨는가를, 온전하지 못한 부모의 역할에도 주가 이처럼 반듯하게 장성하게 하신 두 아이를 두고 감사를 올렸다.

 

우리가 사는 힘은 주가 어찌 함께 하셨는가를 상고하는 일에서 새 힘을 얻는다.

 

우리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7).

 

그러할 때 잃는 것은 구원의 기쁨이다. 은혜는 상실될 수 없으나 이를 잃으면 자원하는 심령도 상한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51:11-12).

 

즉 아무런 감흥도 없을 때 저의 영적 침체는 그 삶을 고단하게 할 따름이다.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 11:17).” 나아가 자신들의 판단과 기준을 고수하며 주의 길에 바로 서지 못한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안타까워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오늘도 우리 삶에 거듭되는 것은 아닌지.

 

그럼에도 놀라운 사실 하나, 하나님은 나를 보고 주의 사랑을 다하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언약을 생각하시고 그 이름을 위하여서도 그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106:8).

 

곧 하나님의 영광은 그렇듯 버림받아 마땅한 죄인인 나를 끝까지 사랑하심으로 그 사랑으로 스스로 영광이 되신다. 하여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표면적으로 이와 같은 내용이 결국은 나와 상관없는 일 같으나, 그래서도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한 일인지…. 내가 주를 배반하고 멀리하기를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오늘도 주의 부르심으로 산다고는 하나 그 마음은 조석간의 일이라, 마치 조수간만의 차이처럼 밀려들었다 쓸려나갔다 하는 것이 나도 내 스스로를 억제할 수 없는 일이어서. 그럼에도 주가 나를 사랑하신다! 그 사랑은 항구적이며 늘 동일하시니 그의 약속, 이 말씀이 있어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지.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9:10).

 

염치없고 송구한 마음일 때도 결국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 앞에 나를 세우게 하시는 것, 우리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후회가 없으시다.

 

그들을 그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며

그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셨고

그들의 대적들은 물로 덮으시매

그들 중에서 하나도 살아 남지 못하였도다

(106:10-11).

 

이처럼 시편 한 구절 한 구절이 다 내 이야기로 나에 대한 진술로 다가오는 것이 귀하다. 이는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다 잊고 사는 것 같으나, 어릴 때 무슨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며 그처럼 펑펑 울고 내가 죄인인 것과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를 생각하며 슬퍼하였는지. 허물과 죄로 나는 늘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뻔뻔하게 주의 이름을 부를 때면 주는 한 번도 나를 외면하신 적이 없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 4:18).”

 

돌이켜 이제 주 앞에서 씨름하게 하신 것만으로도 나는 자주 참 다행이란 생각을 하곤 한다. 전에 같으면 즐겨 찾던 친구나 사람의 말, 말, 말에 휘둘리며 어떻게든 저들과 함께 하고 싶어 안달이었던 때도 있었는데… 더는 그 모든 게 헛된 것을 잘 안다. 고로 주만 바라본다는 것,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더는 누구의 출세도 또는 어떤 이의 성공에 그에 따른 상대적인 좌절도 크게 나를 흔들지 못한다.

 

곧 이 믿음, 내 안의 어떤 마음과 안식은 나도 가끔 내가 나 같지 않은 것으로 잘 알 수 있다. 왜?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그럴 수 있다는 것, 그리 되어 있다는 사실 앞에 때론 가족도, 가까운 친구도, 그 어떤 위로나 격려도 없이 만족함을 누릴 수가 있다. 이는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6-17).”

 

오늘 본문의 룻의 모습을 보며, 주신 상황에 순응하며 이를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삶으로 삶에서 나타낸다는 것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 일인지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살후 3:2).” 이 놀라운 비밀을 아는 사람과 하나님만 아시는, 그리하여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이게 어찌 누구나의 것일 수 있겠나? 나는 누구의 고난을 두고 저가 그것으로 주의 사랑과 은혜를 더욱 온전히 깨달을 수 있기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왜?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6-7).” 이는 엄청난 값어치의 가치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3-4).” 당장은 힘들고 고달프겠으나 그것으로 주가 이루어 가시는 놀라운 경륜과 섭리를 따라 주를 온전히 바랄 수 있기를. 실은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자신은 참 잘 안다.

 

그들이 그 기쁨의 땅을 멸시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그들의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24-25).

 

실은 이 결정이 우리의 삶을 결정지을 수는 없지만 고달픔과 슬픔의 정도를 더할 수는 있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는 것, 죄란 늘 그러하여서 자신만 그걸 인정하지 못한다.

 

그 때에 비느하스가 일어서서 중재하니

이에 재앙이 그쳤도다

이 일이 그의 의로 인정되었으니

대대로 영원까지로다

(30-31).

 

저들은 싯딤에서 시므온 지파의 족장이 고스비라는 미디안 여인과 범죄하며 염병이 창궐한 적이 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 문에서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눈앞에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그의 형제에게로 온지라(민 25:6).” 모두 울고만 있을 때 비느하스가 저들을 창으로 뚫어 그 죄를 응징함으로 염병이 물러났다. 곧 우리가 선을 행한다는 일은 악을 떠나는 것이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37:27).

 

이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일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거역하는 일이다.

 

이는 그들이 그의 뜻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

(106:33).

 

동기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상황, 기질이니 성격 그 따위 조건들도 의미가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면 그 대가를 자신이 감당하며 사는 것이다. 어떠하든지 나로 주 앞에 내어놓는다는 것, 잘났으면 잘난 대로 못났으면 못난 대로,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 6:17-18).” 이와 같은 말씀으로 붙들리는 것. 못하니까 못하는 대로, 이방 여인이면 이방 여인인 채로 주 앞에 서는 것, 그걸 어찌 만회하려 드는 것이 오히려 우상숭배이고 하나님 앞에 추악한 일이다.

 

그들이 그들의 자녀를

악귀들에게 희생제물로 바쳤도다

무죄한 피 곧 그들의 자녀의 피를 흘려

가나안의 우상들에게 제사하므로

그 땅이 피로 더러워졌도다

(37-38).

 

이 끔찍한 죄는 그러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스스로의 한계로 자신이 어찌 해보려는 데서 비롯되는 숭배다.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드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자신은 믿는다고 믿었고, 한다고 했고, 그러니 어떻게 더 하란 소린가? 하는 항변에서 주의 뜻과는 거리가 먼 주의 길을 간다!? 결국 저들은 권면을 듣기를 싫어한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3-14).” 그러니 요즘은 추세에 맞춰 ‘나 홀로 신앙’이 늘어 가는데, 저들은 사사시대에 ‘하나님의 통치가 없음으로, 자기들 좋을 대로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과 다를 게 없다. 하나님의 통치가 없는 하나님의 일은 악마의 저주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맹렬히 노하시며

자기의 유업을 미워하사

그들을 이방 나라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을 미워하는 자들이 그들을 다스렸도다

(40-41).

 

믿는 자로 살면서도 안 믿는 자보다 더 고달프고 역겨운 삶으로 얼룩져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

 

여호와께서 여러 번 그들을 건지시나

그들은 교묘하게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낮아짐을 당하였도다

(43)

 

나는 가끔은 두렵다. 특히 누구에게 뭐라 말해야 할 때, 열에 아홉은 싫은 말 듣기를 싫어한다. 자기 말에 동조하고 같이 울렁거리며 아무 말도 안 해주는 것으로 큰 위로라고 여긴다. 나는 나이가 들면서 언제부터는 아무도 내게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는 데서 두려울 때가 있다. 그러면서도 누가 뭐라 하면 순순히 저의 말을 야속함이 없이 받지를 못한다. 늙으면 고집만 는다고, 그래서도 누가 같이 말씀을 나누고 서로가 ‘그건 아니지!’ 하고 말해줄 수 있는 사이가 그리울 때도 있다. 듣지 않으면 늘 제자리걸음일 뿐이다.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신 6:15).” 그래서도 이처럼 필사적으로 나는 말씀 앞에 나를 앉히려고 한다면 이는 강박인가? 설령 그렇다 해도,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들의 고통을 돌보시며

그들을 위하여 그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크신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그들을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

(44-46).

 

오늘 시인은 궁극적인 우리의 길을 제시한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47).

 

주께 아니면 누구에게 아뢰고, 내 안에 부대끼는 말씀으로 씨름하며 순순히 그럴 수 없는 자신을 인정할 수 있을까? ‘주여 나를 도우사 세월 허송 않고서 어둔 세상 지날 때 햇빛 되게 하소서.’ 나는 오늘도 눈을 뜨기 무섭게 주 앞에 엎드린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

(4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