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삼하 23:2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 5:3
언제부턴가 세 시 전에 저절로 눈이 떨어져, 알람이 따로 운다. 이른 아침은 늘 마음과 몸이 청명하다. ‘아침에 주께 기도하고 바란다.’는 오늘 시인의 표현이 와 닿는 것도,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으로의 시간이 귀하다는 것으로 새삼 이해된다.
오늘 다윗은 자신을 일컬어 ‘높이 세워진 자’라 표현하였다.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삼하 23:1).” 더욱이 ‘기름 부음 받은 자’, ‘노래 잘 하는 자’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음이 눈에 띈다. 앞서 22장의 기도문은 초창기 다윗의 것이라면, 오늘 23장 서두의 본문은 다윗 노년의 글로 추정된다. ‘높이 세워진 자’란 문자적으로 저의 왕좌를 의미하고, 이를 뒷받침하듯 ‘기름 부음 받았다.’ 하는 것으로 왕으로서의 자부심을 감추지 않는다. 이는 맡은 바 자신의 책임에 대한 표현이다.
가령 블레셋과의 전쟁 중에 왕의 목마름을 위해 세 용사가 목숨을 바쳐 떠다 바친 물을 자신이 마시지 않고 주께 부어드림을 볼 때,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16-17).” 저의 성정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짐작케 한다.
또 하나 ‘노래 잘 하는 자’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늘 글쓰기를 좋아했고, 쓴 것을 노래로 부르기를 좋아하였다. 이는 곧 주를 향한 마음으로 찬양하고 주를 높이는 것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특히 글쓰기는 연애, 연모, 사랑을 한 사람이면 누구나 안다. 자꾸 표현하고 싶고 듣고 싶고 말하고 싶다. 그러므로 이 세 표현은 스스로를 높이는 자기소개가 아니라, 낮추고 겸비하여 자신의 사명을 귀히 여기며 즐거워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이제 우리 모두는 ‘기름 부음 받은 자’이며 ‘높이 세워진 자’들로서 날마다 ‘노래 잘 하는 자’로 살아야 하는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여기서도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눈여겨 보게 한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4-7).” 이 귀한 존재임을 알면 알수록 자신의 신분을 귀히 여기되 겸손하고, 그 값어치의 가치를 알면 알수록 주를 더욱 사랑함인데,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44).” 이는 참 비극적인 현실이다. 저들을 보면 아연실색할 따름이다. 하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 곁에서도 그 꼴이 아니꼬운 법이니까. 스스로 복을 걷어차는 것도 아니고,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고 전하지만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그러니 다들 사는 데 바빠서, 그때그때 우선순위가 무엇인가를 새삼 돌아보게 한다(눅 14:17-20).
일련의 사례는 흔하다. ‘나중에’ 하고 미루는 것이 우선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은 이유에서다. 굳이 그 일이 먼저다 여겨 나중으로 미뤄지는 것인데, 귀한 것은 손에 쥐고 있어도 잃어버릴까 불안한 법이다. 하지만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17:27-29).” 장가 가고 시집 가는 게 왜 나쁘다고 하는 소리겠나? 하는 일이 왜 대수롭지 않다고 하시는 말씀이겠나? 모든 게 주가 맡기신 일인데, 하면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30).” 즉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 해도 될 것이 뒤섞였다. 비극은 아주 사소한 듯 중대하다.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31).” 한데도 ‘에이, 설마’ 하는 것이 닥치기 전까지의 우리 모습이다. 이때 주님의 일침, 32절.
롯의 처를 기억하라!
이 짧은 결론이 무얼 웅변하는가?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먼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우선하는 것은 그만큼 귀한 우선순위가 자신을 위해 결정된다. 성경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하고 말씀하시는데, 우린 얼마나 자주 분주하게 일에 쫓기느라 말씀도 나중에, 기도도 나중에, 주를 사랑하는 일이야 늘 마음만으로, 그렇게 열심을 다해 사는지 모르겠다. 한데 그 일이 어떤 일이고, 무엇 때문이든 ‘먼저’가 있고, 이를 위할 때 나머지 ‘모든 것을 이루신다’는 말씀에서 우린 별로 주목하지 못하는 것 같다. 먼저 주를 바라면 나머지 모든 것은 주가 이루신다는데도 에이, 미덥지가 않은 것이다. 그러니 꼴랑 길어야 30년 혹은 20년, 그놈의 노후대책에는 기를 쓰면서도 영생을 위한 것에는 '설마' 하는 것이고, '나중에' 하고 미뤄도 되다고 여긴다.
즉 오늘 본문 첫 구절에서 다윗이 자신을 일러 세 모양의 신분을 앞에 둔 것을 보면, 평생 저가 무엇을 우선하며 살았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이를 베드로의 표현으로 읽으면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곧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라 하심은 이를 읽고 적용하여 사는 데 따른 것도 역시 주의 감동으로, 성령의 강권하심으로 읽고, 느끼고, 본받아 살아갈 수 있다. 다음에 이어지는 다윗의 진술에서 이를 읽는다.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 23:2).” 이를 인정하고 누릴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축복이 또 있을까? 내가 이른 아침을 사랑하게 되고, 눈을 뜨면서 주의 말씀 앞으로 나를 세우는 것은 ‘여호와의 영’이 나를 이끄심이다.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기를 바란다. 늘 구하는 것은,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이는 나에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나의 일상은 날마다 기록이 되어, 하루하루가 주의 편지로 읽혀지기를 바란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이처럼 변색될 수 없는 삶의 색감은 살아가는 내내 질감을 더하면서, 어느 훗날 나의 면류관이 된다. 그러므로 나의 이야기는 누가 읽어도 ‘그리스도의 편지’였으면 좋겠다. 이를 나는 직접 글로 쓴다. 다윗이 그러하였듯 쓰는 것으로 누군가의 마음에서 울려지고 싶다. 또는 실천으로 나의 삶이 이에 증거가 되었으면 좋겠다. 쓰면서 사는 생활이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글감이다. “너는 두루마리 책을 가져다가 내가 네게 말하던 날 곧 ... 내가 네게 일러 준 모든 말을 거기에 기록하라(렘 36:2).” 하여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5).”
하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사유하며 사는 것일까? 철학도 사상도 누구 말마따나 나름의 명리학이나 사주철학도 중요하다 한다면 이는 오늘을 사는 데 따른 것일 테고, 정작 중요한 것은 영생을 알고 이를 준비하고 사유하는 글쓰기, 삶 살기가 필요하겠는데, 그다지 와 닿지가 않는 모양이다. 마치 늘 계획만 세우고 공부는 안 하는 아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계 1:1).” 먼저는 우리가 성경을 아는 일과 이를 삶으로 적용에 따른 어려움을 느끼는 게 중요하다. 사는 일에 전념하는 것을 나쁘다는 게 아니라, 톨스토이의 질문처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문제인데,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마 24:40-41).” 그럼 저는 누구이고 저는 누구일까? 왜 저는 그렇고 저는 그런가?
하나님의 통치를 알고 이를 준비한다는 것,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삼하 23:3-4).” 오늘 본문 서두에 이어지는 다윗의 진술이 깊다. 과연 오늘의 새로움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
어제 오후 늘어져 채널을 돌리다 어느 드라마에서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의 속삭임 중에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어요.’ 하는 고백을 들었다. 그게 무엇이고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은데, 문득 나는 지금 내가 내 인생에서 가장 귀한 시간, 더는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삶을 살고 있는 것에 감격한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3-14).” 곧 나의 지나아온 날들을 돌아볼 때 더러는 사랑으로, 더러는 일로, 더러는 어떤 만족감으로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던 때도 있었던 것 같다. 한데 그 모든 게 이제 와 돌아보면 추억일 뿐, 퇴색된 감정 앞에서 나는 종종 당황스러워한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모든 게 그때뿐이었다. 늙는다는 것은 ‘그때가 좋았었지!’ 하는 날들이 늘어간다는 소린데….
어제는 아내가 종합검진을 받는 날이었다. 전날부터 속을 비워내느라 고생이고 아침에도 이어져 9시에 들어가 두 시간 반을 넘겨서야 끝이 난 모양이다. 데려다 주고, 끝나면 다시 밑으로 데리러 간다고 하고 교회로 와서 기다렸는데, 시간이 꽤 지나 의사가 보호자를 부르란다고 하며 아내가 아직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순간 가슴이 철렁하면서 그 짧은 ㅅ순간에 별의 별 생각을 다하며 운전을 하고 갔다. 걱정이 온 몸을 쥐고 흔드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의사는 모든 게 다 정상이고, 약간씩 주의할 게 있으나 운동하고 살 빼면 되고 따로 처방할 약도 없다면 실실거리며 설명하는 것이다. 그럼 왜 오라 했나? 하고 물었더니 아내분이 잠이 덜 깨서 설명해도 못 알아 들으실까 하여 그랬다나? 같이 차를 타고 오면서 걱정하였던 마음이 툴툴거리는 말로 나오다 새삼 풉, 하고 웃음이 나왔다. 대체 무엇으로 감사하며 사는 것일까? 어떤 끔찍한 진단이 나오고, 심각한 병명으로 말하고 손 쓸 수 없는 고난이 있어야 했을까? 모든 게 정상이라는 말은 수천만원이 병원비를 절약한 것이고, 고통도 없이 다 나은 셈인 것을 왜 툴툴거리며 불평했을까?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3).”
이것이 오늘 아침에도 나를 돌아보게 한다. 더는 내가 나로 살지 않고 새로운 나로 오늘의 새로운 영광으로 살 수 있다는 게 복이지 않겠나? ‘새 언약-영원한 언약’이 이것이고,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히 8:8).” ‘새 하늘과 새 땅’이 그것이며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 은혜란 늘 오늘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과 같은 것이지, 전에 받은, 어떤 추억 같은, 체험과 간증으로 사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은 오늘의 해가 떠오르듯이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벧전 3:13-14).” 그리하여 ‘새 이름으로’ 사는 것,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사 62:2-3).”
주일 아침, 누구 누구를 떠올리고 같이 예배할 수 있는 날을 허락하시기를 기도하며… 저들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주의 긍휼하심을 구한다. 누구는 아무도 몰래 멀리 숨어 살면서 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고, 누구는 아예 그러고 싶은 마음조차 없고, 누구는 더 이상 손 쓸 수 없는 자식의 앞날과 그 병명을 두고도 이를 영적인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누구는 아예 다른 타종교로 자신을 봉쇄하듯 더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말로 듣고, 누구는 만사가 귀찮을 따름인데… 그럼에도 내가 저들을 생각함은 나의 사소한 이 생각으로 부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까닭은, 혹시나 주가 돌이키실까 하여, 아직은 남은 기회가 있다는 것이 오늘도 살아 있는 가치일 텐데.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 하여 이제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오늘은 다윗이 진술하는 글의 서두만으로도 감격이 벅차다. 욥의 나이 든 친구 나발의 표현처럼,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둠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 네가 희망이 있으므로 안전할 것이며 두루 살펴보고 평안히 쉬리라(욥 11:17-18).” 이를 다윗의 시로 변환한다면,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27:1-2).
이는 곧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주의 은혜는 받은 자가 더 바란다. 사랑은 해본 자가 더 하려 하고, 그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고 바랄 수도 있는 게 귀한 거였다.
오늘 시편으로 이를 정리하여 다시 읽는다면,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5:1-2).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심사(心事)를 모르시는 게 없다. 이는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곧 오늘도 나에게 이처럼 또 하루를 주시고 말씀 앞에서 아침을 맞게 하심은 성령의 생각으로 성령이 나를 주께 간구하심으로였다. 내 의지나 나의 어떤 수고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에 성경은 약속하시길,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이렇게 간단하고 쉬운 걸 왜들 그처럼 어렵고 힘들게 여겨 이런저런 이유로 ‘나중에’ 하려 하는 것일까? 과연 저들에게 나중이 있기는 할까?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행 8:22).”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3).
아, 나는 이 한 구절에서 내가 사랑하는 이 시간이 얼마나 귀한가를 새삼 확신한다. 아브라함도 그랬다.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창 19:27).” 다른 어떤, 분주한 것들이 시작되기 전에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삼상 1:19).” 하여 우리 주님도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참 신기한 것은 새들도 같은가 보다. 어둠이 걷히는가 하는 것을 새 소리를 듣고 안다. 어스름 날이 푸르러올 때 어김없이 새 소리가 아파트 단지 사이로 활개치고 날아다닌다. 아,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4-7).
아침은 늘 이렇듯 새로운 각오와 다짐으로 악을 점검하고 실수를 돌이키고 다시금 주를 예배할 것을 앙모하게 한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하여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그저 좋은 일이 있을 거야, 하는 따위의 막연한 기대감이 아니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8-10).
내가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주가 미워하시는 악한 것들을 경계하며 저들을 멀리하고 주의하고 삼가 주를 배역할까, 나의 약함을 주 앞에 아뢰는 것과 같다. 하면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6-18).” 삶이 곧 가지이며 그 하루가 맺혀가는 열매일 터,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11-12).
이것이 우리를 향한 영원한 보장이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사 50:9).” 그 누구에게도 나는 더 이상 정죄함을 받지 않는 것은,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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