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

전봉석 2022. 7. 2. 05:32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진실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

삼하 22:31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시 4:7-8

 

 

다윗은 시인이다. 훌륭한 문장가이다. 글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를 좋아한다. 오늘 글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미를 노래한다(2-4).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찬양한다(5-20). 주의 도, 곧 주의 말씀으로 자신에게 은총과 자비를 베푸시는 것에 감사한다(21-31). 하나님은 자신에게 승리를 주셨다(32-46). 구원자 하나님을 강조하고(47-49), 열방 중에 하나님께 찬양하고 후손들에게도 자신의 확신을 남긴다(50-51).

 

오래 된 나의 글쓰기는 묵상글이 자라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예전에는 나의 이야기에서 말씀의 뜻을 찾았고, 다음으로는 다른 사람의 살아가는 이야기에서 말씀을 찾았다면, 오늘에 이르러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고자 글을 쓴다. 은총을 체험한 사람은 표현하고 싶어한다. 사랑에 빠진 연인이 말하고 싶어하고, 무엇을 소중히 여길 때 이를 간직하며 내어보이고 싶은 것처럼,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보면 그런 것 같다. 어떤 말을 쓰고, 어떤 이와 어울리고, 어떤 것에 관심을 두고 사느냐가 저의 인생이고 인격이었다. 아픈 곳에 손이 가듯 자기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자의 특권이기도 하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 4:18).”

 

누구 이야기에서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면, 저를 사랑하는 마음이 곧 주의 마음인 것을 알게 된다. 인간적으로야 너무 싫고 어려운 상대일지라도 저를 싫증낼 수가 없는 것은 저를 내 곁에 두신 이의 마음 때문이다. 아이는 약을 올린 것으로 피로감이 더하고 건짜증이 늘었다고 고백하였다. 자꾸 엄마에게 화를 내고 그러고 나면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고 하였다. 이 말은 여러 내용을 유추하여 내가 정리한 것이고, 나는 아이와의 대화에서 눈을 뗄 수 없다. 말은 소리로 듣지만 마음은 눈으로 본다. 아이는 약을 더 올려서 먹고, 심지어 성분은 같다지만 약을 바꾼 것에 대한 불편을 ‘엄마 때문’으로 돌리면서 화가 나는 것이다. 이는 저만의 특유한 병이 아니다.

 

모두는 가정법을 쓰며 ‘~하였더라면’ 하는 식으로 남을 탓한다. 대표적으로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라비 나사로가 죽은 것이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하는 전가로 이어졌다.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린 것을 예수께 급히 알린다. 한데 이상하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요 11:4).” 하시고는 이틀을 더 그곳에 유하신다. 그러는 동안 나사로는 죽었고, 저들은 예수님이 장사지낸 지 사흘이 지나서 오신 것을 보고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 하고 서러워한다. 그때 마리아는 아예 나가보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예수님이 찾으신다는 말에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32).” 이것이 우리의 한계다.

 

습관적인 방어이고 실제 삶의 태도인 것 같다. 어제 점심을 같이 먹고 아이에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는데, 아이의 마음에서 단단하게도 엄마를 탓하는 마음이 강하다. 이러한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게 감사인데, 감사하는 마음은 공교롭게도 환난을 지나온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저마다 그 마음에 어떤 서러움이나 원망이 없을 수는 없다. 누구와의 통화에서 집안의 이런저런 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듣다보면 누구 탓이다. 이어지는 내용은 ‘~하였더라면’ 하는 것이다. 서른여덟 해 동안 베데스다 연못에서 물이 흔들리기만을 기다리던 앉은뱅이가 있었다. 물이 동하면 이는 천사가 내려와 목욕을 하는 것이라 하여 병든 자 가운데 가장 먼저 연못에 뛰어드는 자는 낫는다는 전설이 있었다. 하루는 예수님이 베데스다 연못 가로 지나시다 앉은뱅이를 보았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요 5:2-5).” 그때 예수님은 멈추시고 물으신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면 저는 네, 하고 말하였으면 될 것을,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하고 구구절절 할 말이 많다(6-7).

 

그렇듯 선뜻 주 앞에 아뢰지 못하는 것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말을 하여야 할 것 같아서이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사 25:1).” 다들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들추면 염려와 근심이 끝도 없다. 이를 억지로 이겨내려 자신을 무장하고 살지만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누군 늘 감사를 하다 어떤 일이 터지면 ‘어떻게 나한테 이러실 수 있어?’ 하는 식으로 하나님 앞에 서러운 마음이 먼저 인다. 그럴 땐 어떤 기준이 아쉽다. 기준은 어떤 경우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12:2).”

 

정작 우리 삶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모두가 허사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이에,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시 146:3-4).

 

이를 잘 알면서도, 가장 무서운 신은 자신이 아닐까? 자신(自身)을 자신(自神)으로 삼아 스스로 신이 되려 할 때, 우리는 흔히 무신론자라 하는데, 실제 저에게는 이미 섬기는 신이 따로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를 향한 확신이 없을 때, 누구라도 본능적으로 자신을 신적으로 여겨 스스로 판단하고, 해결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하다. 한참 아이들을 가르칠 때 ‘주도적인 자기학습’이라 하여 아이 스스로 자신의 일은 자신이 알아서 하는 태도를 가르치고 기르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실은 한참 나중에서야 안 일이지만 저들은 자신이 주도적인 자세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어떤 인정욕구에 따른 결정이나 행동인 경우가 많았다.

 

팀으로 수업할 때 그 아이들 다섯은 모두가 공부도 잘하고, 엄마들도 서로 모임을 만들어 언니 동생 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로 발전하였다. 다들 연고대에 서강대, 성균관대로 진학을 했으니 나 또한 아이들 덕분에 덤으로 주가가 오른 셈이다. 한데 좀 더 깊은 속엣 얘기를 나누고 글을 쓰면서, 한 아이는 군인 아버지로 늘 엄격한 가정 분위기와 상대적으로 눈치 빠른 두 살 터울의 누나가 앞서 서울대로 진학하는 바람에 실은 부친이 무서워서 공부를 하였다. 또 한 아이는 맏이였는데,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아버지는 어린 아이에게 전교 1등을 하면 무엇을 사주겠노라, 약속을 했고 아이는 이를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하여 1등을 하였지만 저의 부친은 오히려 역정을 내며 아들의 요구가 부당하다고 나무랐다. 이유인즉 ‘다 너 잘 되라고 한 소리’로 치부했지만 실은 그만한 것을 사줄 가정형편이 되지가 않았던 것이다. 엉뚱한 것 같지만 아이는 그 말을 하다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 고2 때, 초등학교 일을 두고 말이다. 저가 공부를 한 것은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는 이유에서였다.

 

그때도 다들 우리 속에는 영혼이 상한 심령으로 곪아 있었던 것이다. 보다 일찍 내가 저들의 마음을 알아주고 위로하였으면 좋았을 텐데… 늘 마음에 걸리는 아이 몇이 있는데 하나는 거식증에 걸린 아이였고, 하나는 고1 때 남자친구와 잠자리를 하면서 너무 일찍 성적인 쾌락에 빠진 경우이다. 한데 이런 사례가 특별한가 했더니, 모두가 비일비재하고 다들 똑같다. 겉으로야 어떤 명분과 나름의 열심으로 이를 숨기고 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가끔 그때 나 역시 우울감에 시달리며 쫓기듯 이를 악 물고 살던 때라 저들을 생각하고 마음 쓸 여력이 없었다. 그저 글을 보다 같이 울고 앉았거나, 아이의 말에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숨을 몰아쉬기도 하면서. 그럼에도 희한했던 것은 가령 서로 누굴 사귈 때 인사를 왔는데, 남자 녀석은 어디서 마음이 변해 그만두었는데 여자 아이는 혼자서 그렇게 찾아오곤 한 일이다. 그 아이 같은 경우도 일일이 글로 다 옮길 수는 없지만 참 어려운 때에 저 아이에게 마음을 주었었고, 나에게 서로 인사를 왔다가 나중에는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학교는 서울, 글방은 군포, 집은 일산인데 일주일에 두세 번씩 찾아오곤 하였다.

 

그때 내가 좀 더 믿음으로 바로 섰었더라면… 나는 늘 그것이 미안하고 마음에 걸린다. 그러다 은둔형 외톨이가 된 아이도 있고, 공황이 오는 건 다반사인데, 거식증에 관음증에… 그때는 아이들 때문에도 짧은 심리학 지식으로 이를 이해하고 유추하려 참 애를 쓴 것 같다. 자꾸 말이 이어지는데, 한 아이는 연애가 끊이지 않는다. 늘 헤어지는 계기는 ‘너무 자신이 저자세로 들러붙어 그렇다’는 스스로의 진단을 내렸다. 말 그대로 ‘금사빠’라, 이건 금세 사랑에 빠져버리는 자신을 어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다 헤어지면 다신 안 한다고 하다 어느 날 또 새로운 아이를 데려왔다. 길면 일 년 짧으면, 몇 개월 간격으로. 실은 어릴 때 부친의 죽음을 경험했고 그때 저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했는데, 저의 부친은 목숨이 넘어가면서 아이라서 그랬겠지만 여섯 살 딸애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이는 아이에게 ‘자기 탓’이 되어 좀 더 잘했어야 한다는 죄책감을 남긴 것이다.

 

이렇듯 한도 끝도 없는 우리 안의 응어리에 대하여,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15).” 우린 어쩌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일에서부터, 보다 편하고 의지할 수 있는 상대로 여기지 못하는 게 응어리진 마음이 역으로 하나님께도 전가되어서이다. 주님은 이를 아시고,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 21:22).”

 

오늘 다윗의 기도에서도 우리가 겪는 환난이 필연적인 성도의 과정인 것을 언급한다.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5-6).” 예수님은 이를 염두에 두시고 이르시길,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하여 수제자 베드로는 이를 받아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9).”

 

나는 나의 날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찌 함께 하시며 내 안에 운행하셨는가를 지금은 반추하고 이를 누구의 이야기에 유추하여 저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읽으려고 한다. 어제는 아이와의 대화에서 또는 누구와의 통화에서, 저들의 이런저런 사연을 두고… 예전의 나와 같이 방관자로 있지 않으려 여러 번 주의 이름을 부른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28).” 오늘 다윗의 기도다. 시편으로 이를 더 살펴보면,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4:1).

 

이제는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 나의 아버지로 저를 대할 수 있다는 것,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사 50:9).” 이보다 더 귀한 순간이 있을까?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여전히 나는 어렵고 두렵고 떨리지만, 누구의 사연을 두고 더는 방관자로 모른 체 가만 있지는 않는다. 저가 부를 수 없는 주의 이름을 부른다. 안 믿는 저를 위해 내가 주께 도우심을 구한다.

 

하면,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8).” 이에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이를 나는 앎으로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23).” 나는 이 아침을 사랑한다.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2-3).

 

나의 가장 든든한 중심, 버팀목으로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누구의 이야기나 어떤 딱한 사정을 두고, 또는 저 역시 어쩔 수 없는 고달픈 시간을 같이 하면서,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4-5).

 

더는 내가 어찌하려는 것을 멈춘다. 말을 듣는 일도, 그 말에 말하는 일도, 때론 멈추고 나는 가만히 있으려고 애쓴다. 이는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전 7:9).”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모아 주의 뜻을 살핀다. 지혜자의 조언은 이어진다.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느니라(잠 14:17).” 주께 맡긴다는 것, 부조리한 것을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 내려놓는 일,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6-8).

 

이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