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103편 / 여호와를 송축하라

전봉석 2022. 8. 26. 08:58

220828 주일

 

시편 103편

여호와를 송축하라

 

 

들어가는 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1-2).”

 

말씀이 답이다. 인생의 끊임없는 문제 앞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정답을 얻을 수 있을까? 사회는 이를 심리적인 문제로 치부한다. 그에 따른 약물과 처방도 많다. 하지만 우리에게 정답지는 하나다. 성경이 그 답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①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②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③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④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여기에 진리가 있다.

 

오늘 시편의 주제는 송축이다. 송축은 축하와 경배로 함께 벌이는 잔치다. 앞서 읽은 히브리서의 말씀을 정리하면,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다. 활력이 있다.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다. 그래서 우리의 ①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신다. 몸과 혼과 영은 삼분설에 따른 사람의 기본 구성이다. 이에 ② 우리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신다. 마음의 생각과 뜻은 심리학의 관점에서 혼의 문제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영혼의 문제다. 심리학을 기초로 우리 마음의 생각과 뜻을 해석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 곧 우리의 모든 것은 ③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어서 하나도 하나님 앞에서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④ 언젠가 우리의 결산은 이를 받으실 이의 눈앞에서, 마치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다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관점으로 우리의 문제를 접근해야 하는 이유다.

 

말씀이 답이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하는 오늘 시인의 외침은 일차적으로 자신을 향한 강변이나 우리 모두를 향한 외침이다. 왜 그런가 하면, ① ‘내 속에 있는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송축하도록 지음을 받았다. 이를 아삽은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 76:10).” 즉 우리의 문제들까지도 주를 찬송하게 하시는 데 목적이 있다. 곧 ② ‘그의 모든 은택’을 입은 자라면,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우리는 이를 값없이 받았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그러므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덕택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 그 목적은 하나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1:6).” 왜 우리가 여호와를 송축해야 하는지, 그 이유와 목적과 결과는 오늘 시편을 통해 훨씬 선명하게 드러난다.

 

본문이해

 

송축은 여호와 찬양하고 경배하는 잔치의 자리다. 이 시를 먼저 분해하면, 1연(1-2),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은택을 잊지 말라는 것. 2연(3-19), 세 부분으로 나뉘어 3-5절: 개인적인 인생을 향하여. 6-11절: 교회 공동체를 향하여. 12-19절: 모든 인류를 향하여,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심으로 주의 인자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노래하게 하신다는 것. 3연(20-22), 천군 천사는 물론 천하 만민 모두를 향하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우리가 함께 송축하는 것이 영생, 곧 영원한 삶의 기쁨이라는 것.

 

다시 말하면, 1연은 우리가 우리 내면을 향해 주를 찬양하고 송축해야 한다고 자주 독려해야 하고, 2연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지불하신 희생과 우리가 받은 은택을 알아야 하고, 3연은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고, 이는 우리가 드릴 참된 예배, 송축이 된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다. 곧 은택을 받은 사람만 믿는다. 믿는 사람만 은택을 송축한다.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송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우리가 받은 선물이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송축하는 자의 입에서 나오고, 행함으로 표현된다.

 

오늘 우리는 <송축할 수 있는 능력>과 <순종할 수 있는 행함>과 <순종으로 영원히 누릴 송축>을 위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하라는 시편의 찬송을 내 것으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1. 송축할 수 있는 능력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20).”

 

송축은 감사할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그 능력은 주의 말씀으로 주어진다.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을 얻는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이를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시 7:17).” 먼저는 감사가 있어야 찬송이 나오고 찬송이 있어야 송축이 가능하다. 송축은 잔치다. 잔치는 주의 영광에 들어가서 누릴 우리의 영생이다. 다시 말하면 감사는 ‘그의 의를 따라 하는 것’이다. 주께 받은 은택이 크면 클수록 감사는 넘쳐난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곧 자신이 얼마나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인가 하는 것을 알면 알수록 받은 은혜가 너무 귀하다. 다윗이 표현하는 ‘그의 의’ 곧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우리에겐 성경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린 죄인임을 알고, 용서 받은 것을 알고, 그 은혜가 너무 귀하여 감사가 넘쳐나고, 감사가 감사로 이어져서 송축의 자리에 들어간다. 이를 위해 신명기 11장 18-20절 말씀은,

 

①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라.

②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라.

③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

④ 그것을 자녀에게 가르치라.

⑤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라.

⑥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

 

하는 여섯 가지 방법을 제시하였다. 먼저 ① 우리가 이 말씀을 항상 우리의 마음과 뜻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되새겨 묵상하고 암송하고 이를 기준으로 살라는 것이고, ②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로 삼으라하심은 무슨 일을 하든지 주의 말씀을 따라 행하라는 것이고, ③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하심은 다른 이들이 우리 얼굴(행함)을 보고 알게 하라는 것이고, ④ 그것을 자녀에게 가르치라는 말씀은 믿음의 가정으로 그 뜻을 하라 되라 하심이고, ⑤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라는 것은 어디서 누굴 만나고 무얼 하든지 우리 삶의 주제는 말씀이 되게 하라는 것이고, ⑥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는 것은 마치 명찰을 달거나 문패를 붙이듯이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게 하라는 의미이다.

 

정리하면, 우리가 주를 송축한다는 것은 능력이 필요한데 이 능력은 감사에서 나오고, 감사는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죄인인지 알 때 그 받은 은혜에 감격해서 나온다. 우리 죄로 그리스도가 어찌 되셨나? 결국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곧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이를 잊지 않기 위해 말씀을 묵상하고 암송하고 선택의 기준으로 삼는다.

 

2. 순종할 수 있는 행함

“그에게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21).”

 

송축은 행동이다. 행동은 실천인데, 회개는 처절한 뉘우침으로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오늘 시편은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10-11).” 하고 구체적인 근거를 밝힌다. 곧 우리로 회개하게 하심은, ① 우리가 지은 죄를 따라 처벌되지 않고, ②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③ 우리로 죄를 멀리하게 하신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12-14).” 곧 우리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에 주가 오래 참으심은 회개를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그것이 언제까지인지 우리는 알 수 없음으로,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마치 아직 멀었다는 생각으로 살면 큰 오산이다.

 

3. 순종으로 영원히 누릴 송축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22).”

 

성경은 유물이 아니다. 성경 속의 인물은 허상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훌륭하고, 모세나 다윗의 지도력이 뛰어나고, 바울을 비롯한 열두 제자가 말씀으로 순종하며 주를 따랐다 해서, 이를 ‘내 이야기’로 치환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신 30:8).” 성경은 기다리신다. 그런 중에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히 3:6).” 곧 주의 영이 내 안에 거하신다.

 

송축은 은택에 따른 감사다. 감사는 실천이고, 회개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우리에게 어떤 능력이 될까? 첫째,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린다. 둘째,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순종이 생긴다. 오늘 시편 19-21절의 내용이다. 그럴 때 순종은 보다 구체적으로,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미 7:7).” 오직 주만 의지한다는 것. 마치 동전의 양면 같이 회개와 순종은 하나다. 믿음과 행함이 하나다. 송축은 능력이고, 능력은 순종함으로 더해진다. 마치 운동선수의 훈련과 실력이 반비례하듯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주를 송축하는 것은 순종으로 배운다. 순종으로 우린 승리한다. 우리 안에 믿음이 있다는 증거는,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즉 회개는 인정함이고, 인정함은 받아들임이고, 받아들임은 순종이 되어 우리로 감사하게 한다. 감사는 찬송이 되고, 찬송은 송축의 자리에서 영원히 누릴 우리의 잔치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50:6).”

 

나오늘 말

 

말씀을 정리하면서 그럼 우리가 받은 은택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으로 우리가 받은 은혜와 덕택 여섯 가지를 정리하였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받은 은택 여섯 가지>

 

첫째,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린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에서 제외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되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둘째,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의’를 우리 것으로 덧입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7-8).”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고후 5:2).”

 

셋째,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더는 죄의 삯인 영원한 죽음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46).”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눅 13:29-30).”

 

넷째,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우리는 더 이상 사탄의 정죄, ‘사함 받지 못하는 죄의 값’에 매여 살지 않는다. 원죄와 자범죄에서 모두 해방되었다. 그러므로 사탄의 정죄는 더 이상 우리에게 효력이 없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4-15).” “…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슥 3:1-5).”

 

다섯째,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으로 영육간에 병들었던 ‘상한 심령’을 치유 받고 영육간에 강건함으로 거룩하게 되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4).”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여섯째, 그리스도의 죄 값으로 우리는 영원토록 하나님의 곁에 살며, 언제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권세를 가졌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정리하면, 송축은 우리가 누릴 영원한 잔치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주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은 특권이다. 이에 날마다 감사하고, 순종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 송축을 누린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이에 오늘 시편은 우리의 신분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고, 우리가 머물 곳이 어디인지 알게 하고, 우리가 누릴 영원한 영광의 송축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이에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03: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