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
대상 17:8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시 70:4
다윗과의 언약으로 사무엘하 7장 17절과 병행하고 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8).” 하시는 말씀은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삼하 7:9).” 하고 말씀하신다.
곧 우리 안에 이는 ‘어떤 부담감’은 거룩하여서 자신이 받은 은혜를 돌아보아 주께 무엇으로 보답할지 되새기게 한다. 하여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종을 위하여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이 모든 큰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대상 17:19).” 하는 감사로 온 마음이 가득하여진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시 116:12).
감히 어찌 갚을 길 없어 ‘이 몸 바칩니다.’ 하는 찬송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자신을 돌아보아 그 작음을 알고 죄의 굴레를 인정하면 할수록 주의 은혜는 비례해서 커진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이 아무리 선하다 해도 하나님의 뜻과 같은 것은 아니다. 다윗은 자신이 사는 궁에 비해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신 곳이 마음에 걸려 주의 성전을 짓기를 바라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저의 마음만 받으시고 그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원하지 않으셨다. 왕의 신분으로 일을 강행할 수도 있었으나 저는 주를 인정한다. “여호와여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하나님이 없나이다(대상 17:20).”
종종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생각과 다름을 알 때 기로에 선다. 그럼에도 자기 생각을 구하는 자가 있고 주의 뜻을 인정하고 이에 순응하는 것으로, 예수님도 그리하셨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앞서 이사야는 전하기를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때론 우리가 원치 않는 일을 두고 주께 간구하고 주의 뜻을 알면서도 이를 역행하는 경우도 있다. 단적인 예로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요 18:10).” 즉 우린 우리 손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무력으로라도 증명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11).”
곧 우리 주님은 날 위하여 비천함도 감수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분명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그런 가운데 우리가 주께 간구할 때 ‘주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나는 종종 수잔을 생각한다. 그녀는 신앙이 좋아서 자신이 받은 은혜로 의사가 되어 많은 이들을 의술로 돕는 자가 되고 싶었다. 한데 열여섯에 골결핵을 앓게 되면서 20여 년이 넘도록 온갖 치료를 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자신의 생각을 간구하였다. 하지만 주님의 침묵은 길었고, 그녀는 어느 날 문득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 하는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 여태 자신은 ‘병이 나으면’, ‘의사가 되면’ 하는 관점으로만 주께 간구하고 기도하였는데, 병실 창가로 듣는 햇살을 받고 눈을 뜨면서 ‘나중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 하는 마음이 순간 그의 안에 스민 것이다. 이후 그녀의 기도는 달라졌고, 그의 생활도 바뀌었다. 간호사에게 말 한 마디, 옆에 있는 환자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행함으로 그녀가 달라졌다.
오랜 병원 생활로 그녀의 달라진 모습에 그녀는 그때마다 의아해하는 사람들에게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세요! 하는 말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마음은 순식간에 같은 병실을 쓰는 사람들을 바꾸면서 전체 병원으로 옮겨지고, 그와 같은 소식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운동이 되어 다른 여러 병원에도 알려져 저의 이름을 따서 모임이 결성되고 새로운 바람이 되었다. 조직이 구성되고 후원금이 모여지고 그것으로 실질적으로 환자들을 도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훗날 수잔은 회고하기를, ‘내가 의사가 되어 환자를 도울 수 있었을 숫자보다 환자로 살면서 더 많은 환자를 도울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
받은 바 그 은혜가 크다면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산 제물로 드려지기를 바라게 된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오늘 다윗이 다윗 성에 살면서 주의 전을 생각하게 것도 그와 같다. 우린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가 함께 하심을 안다. 이를 믿고 동행하심을 붙든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때론 사람 때문에 힘들고 자신의 일로 괴로울 때가 있지만…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18:29).
이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23:4).
이제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사랑하시고 귀히 여기시는가, 하는 것을.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이는 누구와의 약속이 아니라 우리에게 더하신 것이다. 나의 것이다. 나와 맺은 언약으로 삼을 때,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56:11).
세상 그 무엇도 우리는 능히 이길 수 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비록 현실이 어떠하고, 나의 처지가 어떠하다 해도 오직 주만 바람으로,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62:2).
하여,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63:3).
아, 이 아름다운 고백이 오롯이 내 것이기를 나는 기도한다. 나의 생명보다 귀한 주의 이름으로 산다는 일,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죽이신다 해도 귀하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그 안에서 감사가 넘치는 것이 복이었다. 그러할 때,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곧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들의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왕상 8:39).”
주만 홀로 나의 마음을 다 아신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139:1-4).
우리가 어찌 주의 마음을 알 수 있겠나? 다만 주께 받은 은혜로 주가 나를 사랑하심을 내가 아는 것이니,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잠 16:1).” 이를 되새기면서 나는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 안도한다. 안달복달 내가 어찌 하려 하던 것을 하나둘 내려놓으며,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3).” 나의 모든 행사를 주께 맡긴다는 것, 이는 이제 확신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9).” 그러므로 내가 얼마나 선한지, 주의 뜻을 잘 따르는지, 의를 행하며 열심히 사는지에 대한 강박이나 당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다. 당위적이란 ‘마땅히 그리 해야 할 것 같은’ 목사니까, 부모니까, 자식으로서 우리의 작위적인 어떤 결정 앞에서 먼저 주의 이름을 부른다.
한데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사 65:24-25).” 이와 같은 아름다운 말씀에서 나는 승복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이러저러한 삶이 나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왜 그러냐 하면,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사 25:1).” 누구와 대화하면서 나는 자신 있게 말하게 되는 것은 ‘때를 따라 돕는 이’의 손길이다. 나는 모르는데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는 모두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
아내는 친정엄마의 어쩔 수 없음으로 슬퍼하였다. 지금 그 와중에 빨래를 하고, 혼자 그 큰 집을 청소하고, 이것저것 음식을 장만하며 추석 쇨 준비를 하는 것이다. 어머니 마음이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아내는 속상한 것이다. 부러진 팔로 당장 큰 수술을 앞두고 다들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나는 아내에게 추석 쇠고 연휴 끝 날에 수술 전에라도 며칠 일찍 어머니를 모셔오자고 하였다. 아무도 없는 그 큰 집에서 노인이 혼자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울 거였다. 그때 문득 수잔 생각을 한 것일까? 나는 이런저런 염려 앞에서 주춤거리는 아내에게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고 설득하였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하는 바울의 증거는 더욱 확실해진다.
사느라 다들 사는 데 허덕이지만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그러므로 어느 것 하나 주의 은혜가 아닌 게 없고 주께 받지 않은 것이 없다. 오늘 시편은 이를 아는 자의 간구다.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이
뒤로 물러가 수모를 당하게 하소서
(70:1-2).
오늘 시편은 앞서 시편 40편의 시(13-17절)와 병행을 이룬다.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생명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는
다 수치와 낭패를 당하게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는 다 물러가
욕을 당하게 하소서
(40:13-14).
우린 이처럼 수시로 어려움에 가로막힌다.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할 수 없다는 말은 다시 돌아보면 할 수 없게 하는 것을 허용하는 데서 비롯된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4).” 우린 지레 불가능하다 여기는 일에 대해서도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렘 32:27).” 말씀 붙들고 주의 뜻을 따르면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
때론 힘들어서 이를 붙들기 어려울 때도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오직 우리의 일은 주를 앙모함뿐이다. 앙모란 우러러 그리워함이다. 내가 주를 그리워한다는 일,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40:16).
이를 오늘 시편도,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70:4).
하고 주께 바라고 구하는 일. 이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그러할 때 주가 더하시는 놀라운 확신은,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14).” 성경의 모든 권면을 압축해놓은 말씀 같다. 비록 나는 힘이 없고 부족할 따름이지만,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40:17).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70: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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