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춤추며 뛰노는 것을 보고 그 마음에 업신여겼더라
대상 15:29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계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냐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원히 계시리로다
시 68:16
기쁨에 참예하는 것은 복이다. 그렇지 못할망정 이를 업신여기는 것은 저주다. 시기함이 그 속에 있다.
본문은 여호와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다 웃사의 성급함으로 오벧에돔의 집에 모신지 3개월이 되었다. 레위지파를 소집하고 이를 운반하게 한다. 먼저 몸을 성결하게 하고 제사장직의 관점에서 신앙적인 서술로 전개되었다. 삶을 돌아보아 회개하고 주 앞에 바로 잡는 일은 발전적이다.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잠 24:16).” 이에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어떤 어려움, 그 슬픔이 우리로 자신을 찾게 한다. 본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의 의미를 바로 알게 하신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119:67, 71).
친구와 길게 통화를 하였다. 예전에 있었던 이런저런 과오와 죄악을 들추며 부끄러워하였다. 한데 새로운 경험은 이를 수치로 여기기보다 감사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문득 어느 훗날 우리가 주 앞에 서서 우리의 행함을 낱낱이 고할 때, 죄악의 경중으로 부끄러움을 당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감사와 찬송이 넘치게 될 거였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롬 5:20, 6:1).”
죄로 인식하면 할수록 주의 사랑이 크고 긍휼하심이 넘침을 고백하게 된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새롭게 됨으로 주의 은혜는 커지고 나의 허물은 작아진다. 이와 같은 고백이 가능한 것은 함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앞에서이다. 저가 아니면 여전히 숨기고 내 안에 두어 더러운 수치심과 좌절의 먹잇감이 된다. ‘내가 그렇지 뭐…’ 하는 따위의 언사는 주 앞에 아주 몹쓸 짓이다. 우린 ‘그렇고 그런’ 존재가 아니다. 때론 이와 같은 나의 허물조차 주의 은혜를 나타내어 살피고 돋우는 데 증거가 된다.
곧 우리 믿음의 사람은 누구나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가령 서로 은혜를 나눈다는 것은 그저 토설의 의미보다 크다. 자신의 과오를 돌아보고 이를 실토하는 수준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으로 우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어찌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귀히 삼으셨는지, 그 증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그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두어 시간 가깝게 후딱 지나갔다. 영원한 저 하나님의 나라에서 서로의 그러한 나눔은 기쁨이 될 것이다. 듣다 같이 웃고 울고 주를 찬송하며 그 기쁨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오늘 다윗은 왕의 체통도 잊고 덩실덩실 춤을 추다 옷이 다 벗겨졌다. 이를 창밖으로 지켜보던 미갈은 그러한 모습을 업신여긴다. 미갈은 두 가지를 놓쳤다. 하나는 그 기쁨에 참예하지 못한 것이고 또 하나는 그 기쁨을 경멸함으로 자기 마음조차 불편한 자리에 놓인 것이다. 즉 성도는 서로의 잘못이나 어떤 어려움-치부를 드러내어 그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다. 실은 이를 위해 힘써야 한다.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좋은 일에 힘 쓰기를 배우게 하라(딛 3:14).” 우리 신앙은 결코 유아독존이 아니다.
골방에 들어앉는 것은 하나님과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일 때뿐이다. 부부가 서로 분방하는 것도 그런 이유로 할 뿐 별거나 이혼은 전적으로 성경이 금한다. 성도의 교제도 이와 같아서 혼자 고독한 신자는 미갈과 같다. 그의 안에 실은 자기 수치가 가득하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여기서 병은 육신적인 것만이 아닌 마음의 병 곧 영혼의 상함도 포함이 된다. 행여 누가 알까, 어찌 볼까, 구설수에 오를까 하여 같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이를 숨기고 멀리하는 것은 스스로 외로운 신자다. 실제 그의 안에는 위로가 없다.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명색이 내가 아무개인데, 하는 교만과 이는 남을 향한 시기에서 비롯된다. 교회 안에 미갈이 의외로 많다.
상대적으로 다윗은 왕으로서의 체면이고 뭐고 개의치 않았다. 저는 하나님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였고, 이에 춤을 추다 옷이 다 벗겨지는 수모를 겪으나 저는 전혀 이를 의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곧 우리가 서로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주 앞에 느끼는 부끄러움을 가감 없이 나눌 때 그 안에 주의 살아 역사하심이 얼마나 크고 귀하였는지 알게 된다. 이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자에게 ‘광야의 소리’가 되어주어야 한다. 얼마든지 흩어지고 말면 어떤가? 누가 비웃고 더러는 이를 업신여긴다 해서 어떤가? 그런 말의 의미는 자신의 허물과 죄악을 인정함으로 주를 찬양하고 경배하기 위함이다. 누구보다 바울은 두고두고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저는 누구인가?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우러러 저를 높일 수 있는 자였다. 스스로 높고자 하면 그 권세와 힘으로 당시의 위정세력에 위협적인 인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저는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13).” 하고 실토한다. 아니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행한 죄인이란 말인가? 하고 누가 저로 실망하여 교회를 떠날 수도 있겠다. 한데 그런 말의 의미는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11, 14).” 자신의 오늘에 대한 감사와 주의 은혜의 풍성하심에 대한 찬송이 목적인 것이다.
결코 우리의 무용담으로 늘어놓는 객쩍은 소리가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할 뿐이다(롬 12:6). 다시 말하면 모두가 떠벌이고 경쟁하듯 또 그래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고전 9:17).” 우리가 어디 둘러앉아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듯 그와 같은 허물과 실수를 떠벌여야 한다는 게 아니다.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그리 말할 수 있는 자는 말할 수 없는 이를 이해하고 주의 사랑으로 품는다. 말하지 못하는 이는 말하는 이의 그 심정을 헤아리고 자신의 것을 반추하여 주 앞에 고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즉 이와 같은 고백은 그의 받은 은혜대로 할 것이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고전 9:17).” 이 말씀을 다시 보면 자의로 이를 의도하는 것은 상이 없다. 왜냐하면 그의 안에 또 다른 (설령 자신이 의도한 게 아니라 해도) 자기만족이 있기 때문이다. ‘왕년에 내가’ 하고 떠벌일 수 있는 그런 류의 고백 따위는 우리 영혼에 하등 유익할 것이 없다. 그것으로 누구의 환심을 사고 동정을 얻고 의도했든 의도치 못했든 이후에 얻는 모든 것은 저가 이미 얻은 상이다. 그럴 거 없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차마 그 속의 말을 할 수조차 없어 주 앞에 신음하는 성도들도 많다.
그것으로 또한 서로의 교제를 꺼리거나 누구의 말을 듣는 일에 소홀하면 자칫 교회 안의 ‘미갈’이 된다. 어렵게 누가 한 말을 옮겨 남에 말하기를 즐기는 자는 그 속이 구역질난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하여 저의 배가 우상이 된다. 저들은 그 뱃속에 온갖 더러운 것을 담고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하고 산다. 그런 자는 툭하면 남을 헐뜯는다. 들었던 말을 미처 소화하지 못하고 배에 담고 있었다. 저는 서로의 사이를 이간한다. 이 말하고 저 말하고, 사람을 옮겨 다니며 말을 옮기는 말쟁이들이 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또 그 더러운 곳에서 생수가 흘러넘치게도 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 7:38-39).” 곧 우리의 하찮은 말이나 일이 어느 훗날에도 ‘생수의 강’이 되어 흘러나오는 역사다. 가령 브레이너드는 비록 신학교에서 학장과 교수를 비난하다 쫓겨나 국교회 목사가 될 수 없자 인디언 마을의 선교사로 5년을 헌신하였다. 당시에는 국교회 목사를 귀히 쳐주고 선교사는 주의 사역으로 인정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저는 스물아홉의 나이에 폐렴에 걸려 죽었다. 비록 그의 짧은 생애로 ‘무명한 자’ 같이 끝날 생이었으나, 인디언 마을에서의 저의 일기장이 훗날에 출판 되면서 <브레이너드의 일기>는 많은 젊은 사역자들의 의식을 바꿔 그때부터 선교사로 헌신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났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는 것은 생과 사의 막힘이 없다. 고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 5:10).” 비록 나의 허물과 죄악이 전에는 늘 부끄러움이요, 나를 옥죄는 사탄의 정죄로 ‘용서 받을 수 없는 자’로 내몰려서 ‘내가 그렇지 뭐…’ 하는 늪에 빠지게 하였다면 이제는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찬송한다. ‘속이는 자’ 같으나 우린 주 앞에서 거룩하여져 간다.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이로써 우린 더 이상 죄와 사망의 법에 묶여 살지 않는다. 그러했던 나의 허물과 죄악도 주를 찬송하게 한다. 어느 훗날 우리가 주 앞에서 이 모든 것을 직고할 때에 놀라운 역사는 찬송이다. 그 죄가 크면 클수록 주의 은혜가 크기만 하다.
오늘의 ‘다윗’과 ‘미갈’은 극명하다. 미갈은 사람들 틈에 숨거나 멀찍이서 지켜볼 뿐이다. 그 속에는 저들을 경멸하는 마음이 강하다. 큰 교회를 선호하며 함께 하지 못한다. 다윗은 그렇지 않다. 자신의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옷이 벗겨지는 수모 따위는 아랑곳도 하지 않는다. 여호와의 궤를 우리 안에 모셔왔다. 그 한 가지 사실 만으로 기쁨이 충만하다. 그러할 때 오히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이에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68:19).
오늘 우리의 이 홀가분함은 그동안 지고 이고 안고 걸어왔던 것들을 주 앞에 내려놓은 까닭이다. 놀라운 것은 그 짐을 주가 지신다. 그래서도 우린 매순간 주의 도우심으로 산다. 은혜 아니면 살 수가 없다는 말, 나는 이보다 절실한 고백은 알지 못한다. 주가 행하신다. 필리핀 동생 문제도 여태 끙끙 앓던 것과 달리 너무 싱거울 정도로 마무리가 될 듯하다. 2차 고소로 그 가족들까지 첨부한 아이엄마가 진술을 하러 경찰에 왔을 때 아이들과 그 가족들을 출국금지 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본색을 드러냈던 모양이다. 심지어 경찰서 내에서 난동을 부리며 팀장을 찾고 저의 직분과 이름까지 적고 사진을 찍어서 고소를 하네 마네, 그야말로 지랄을 떨어주신 모양이다. 덕분에 늘 냉정하고 이성적이던 팀장이 다음 날 동생이 진술을 하고 나올 때 슬그머니 와서는 그와 같은 일을 말하며 난처했다고, 목사님 심정을 알 것 같다고. 그러면서 가족들 조사는 없이 하고 끝내는 것으로 마무리한 모양이다.
우린 의외로 강하다. 동생에게 평정심을 주시고 오히려 평안함을 더한 것 또한 주의 은혜다. 일이 어떻게 더 진행될지(그 여자가 그냥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우린 알 수 없으나 의외로 우린 강하다고 하는 것은 그런 상황 앞에서 오히려 덤덤해진다. 하나님은 아시고, 설령 억울함으로 더 끔찍한 결과가 온다 해도 그 또한 하나님이 뜻이 계셔서 하는 일이면,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6).” 우린 다만 주께 맡김으로 평안하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2-13).” 오히려 우리 안에는 저들을 위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있어서,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3).
이 놀랍고 신기하고 아이러니한 현상은 우리가 의도하는 게 아니다. 다만 주를 인정할 뿐,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수 2:11).” 상천하지 어디에도 안 계신 곳이 없는 분이심을 알고,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곧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
(4).
세상이 아무리 어떠니 저떠니 해도, 삶이 아무리 짓누른다 해도,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5-6).
이와 같은 명백한 사실 앞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 더는 죄가 나를 억압할 수 없다. 죄의식이나 죄책으로 수치가 아닌 감사와 찬송이 드려지는 이 놀라운 은혜의 역설 앞에서,
하나님이여 주께서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기업이 곤핍할 때에
주께서 그것을 견고하게 하셨고
주의 회중을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9-10).
고로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사 48:17).” 이를 알고 인정하는 것이 복이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말미암아 흡족하리라 내가 다시는 너희가 나라들 가운데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며(욜 2:19).” 이를 붙들고,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계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냐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원히 계시리로다
(16).
주가 함께 하심을,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하여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그리하여,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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