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드의 키 큰 자의 소생이라도 다윗의 손과 그 신하의 손에 다 죽었더라
대상 20: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 73:28
다윗은 주변국을 정복하고 각급 행정 관료를 정비한다. 암몬을 정복하고 대블레셋을 친다. 19, 20장의 기사다. 이 일은 사무엘하 11:1, 12:26-31절 사이의 일로 본문은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게한 사실을 생략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암몬의 왕성하였던 랍바를 쳐서 승리하는 사실만 간략하게 기록한다. 사무엘서는 선지자적인 관점으로 이스라엘과 다윗의 잘잘못을 여과 없이 기록하는 반면 역대기서는 포로 귀환 세대에게 소망을 주고자 왕국의 부정적인 측면은 모두 생략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 4-8절은 용맹을 떨친 세 용사 십브개, 엘하난, 요나단의 활약을 간략히 소개한다. 사무엘하 21:18-22절과 병행을 이룬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능히 승리하는 모습이다. 이는 앞서 모세오경의 하나인 민수기에서 밝힌 바로 같이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민 14:8-9).” 즉 승리의 비결은 여호와가 함께 계심이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54:4).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56:4).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1-32).”
이와 같이 말씀은 말씀으로 이어져 서로 근거 삼고 이를 드러냄은 주가 함께 하심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의 정체성과 그 역할을 말씀하시는데,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수긍하고 순복하고 이에 순종하는 삶이 복이다.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그의 딸과 동침하여 낳은 벤암미의 후손이다.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자손의 조상이었더라(창 19:38).” 어쩌면 이스라엘은 암몬과 형제 국가라 할 수 있다. 출애굽 당시 하나님은 저들과 충돌하지 않도록 하셨던 것을 기억한다.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히지 말고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 암몬 족속의 땅은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신 2:19).”
다윗은 암몬 왕 하눈의 아비 나하스의 도움을 입기도 하였다. 그래서 주변국들을 정복할 때에 저들은 예외로 하였는데, 나하스의 죽음에 조문객으로 파견한 사절을 조롱하여 수염을 자르고 의복을 중동볼기까지 자르는 모욕을 하고, 하눈은 이를 대비하여 아람 용병을 고용하여 이스라엘을 선제공격함으로 이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왜 그런 것일까?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기는커녕 이를 무마하고 정당화하려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한 것이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옳다 여김으로 그 화를 자초하는 것이다. 이에 따른 경고가 있으나(출 9:27, 10:16) 뜻을 굽히지 않음으로 진노 아래 두었다. “바로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 하고(출 10:7).” 곧 악은 악을 더하여 그 악함이 끝도 없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20).” 이는 고질적으로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18).” 결국은 별 수 없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1).”
그뿐인가? 오늘도 그와 같아서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31:1).” 자신이 누구인지 망각하고 사느라 사는 일에 지쳐 세상에서 도움을 구하고자 하는 모든 자는 화를 자초할 뿐이다. 결국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말 4:1).” 상대적으로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2).”
그러므로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 12:45).” 그래서 나는 생각할 때가 있다. 차라리 하나님을 모르고 부인하며 살다 주께로 돌이킬 수 있는 경우가 나름 주를 믿는다고 믿으면서 세상과 결착하여 살고자 하는 이들보다 낫다. 한 번 주의 사랑의 맛보고도 이를 무시하고 사는 이들은 자신이 안다고 여기는 그 앎으로 다시는 돌이킬 수 있는 기회조차 잃는 경우도 많다. 보면 대부분 어떤 어려움에 힘겨워하는 사람의 경우 대부분이 ‘예전에는 나도 교횔 다녔다.’, ‘주의 일을 하였다.’ 하는 자들이다.
안타까운 노릇은 뭐라 해도 저의 앎이 견고하여 이를 부술 수가 없다. 자기 아집과 고집이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그럼에도 주의 은혜란 결국 저를 쳐서 복종하게 하심이니, 나는 누가 어려움을 겪을 때 그게 복인 것을 알게 하려고 조심스럽다. 죄는 엄연히 맞서 싸워할 것이지 대응하고 타협하여 무마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다. 우리가 이를 대적할 수 있는 길은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신 20:1).”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분명히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를 따르는 온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가 그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니 그와 함께 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 하매 백성이 유다 왕 히스기야의 말로 말미암아 안심하니라(대하 32:7-8).” 하면 우리의 선택은 하나로 모여진다. 주께 순복할 것인지, 자기 아집을 고수할 것인지.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모처럼 새벽 일찍 저수지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웠다. 양 옆으로 친구와 동생이 앉았다. 서로는 굳이 말이 없었다. 잔잔한 수면 위로 보름달빛이 드리워 반짝였다. 가만히 찌 끝 수면 위로 나와 있는 야광 캐미를 보고 있으면 별의 별 생각이 조용하게 드나든다. 가만히 찌를 응시하고 있으면 모든 시름이 가시는 것 같다. 날이 제법 차가워졌다. 살면서 주를 온전히 사랑하기에는 너무 번잡스러운 일들이 많다. 그럼에도 감사한 것은 이제 친구도 주를 영접하여 하나님을 인정하며 산다. 겁 없이 세상에 딸려다니던 시절도 있었다. 여전한 우리의 모습은 종종 세상과의 비교에서 ‘이러고 있는 것’이 맞나? 싶을 때이다. 오늘 시편의 서두는 그렇게 시작한다. 다 알면서도,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 73:1-3).
누구라도 이는 자연스러운 고백이다.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완전한 자로 사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우린 좌충우돌 분간이 어려운 때를 마주한다. 그럼에도 기본 전제는 ‘하나님은 그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신다.’ 한데 우린 이를 알면서도 사는 동한 숱하게 미끄러질 뻔하지만,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37:31).
이는 하나님이 막으신다. 성도는 이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주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 신앙과 삶의 회의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17, 28).
이를 다윗은,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래의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이 무성함과 같으나
내가 지나갈 때에 그는 없어졌나니
내가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였도다
(37:35-36).
곧 세상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고 잠시 깃들어 머물다 사라지는 안개 같다.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호 4:7).” 이것이 우리와 다른 점이다. “그가 불타는 연기를 보고 외쳐 이르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냐 하며(계 18:19).” 세상에서의 출세와 성공, 권세와 영화는 이런 것이다. 오늘의 정치도 그 위정자들의 행태도 그 끝이 서로는 보인다. 자신만 못 본다. 그럼에도 저들을 멀찍이서 볼 때는,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4-9).
이를 가만히 되새기면 저들의 다음 행보가 보인다. 세상의 결국이 어떠한지 알겠다. 그러므로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32).” 말씀을 있는 그대로 다시 읽으면 믿는 자들이 고통당하고 안 믿는 자들보다 더 비참한 현실을 맞이하곤 하는 일은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 정죄함은 그 영벌이 가히 짐작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6-8).”
일련의 사태를 겪는 것을 보면서 친구는 의아해하였다. 왜 가만 있는지? 방어차원에서나 선제공격으로 그에 맞서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우리도 안다. 우리도 억울하고 때론 그 이상으로 갚아주고 싶다. 한데 우리가 그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이다. 그 영혼을 도리어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주심으로다. 반드시 우리 하나님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이를 되새김으로 주를 신뢰하는 것이 주를 인정함이었다.
하여 “악인은 재난의 날을 위하여 남겨둔 바 되었고 진노의 날을 향하여 끌려가느니라(욥 21:30).” 곧 오늘에 저들이 승승장구하는 것 같으나 그 결국을 우리는 안다. 이에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6).” 이를 나는 친구에게 말하기보다 가만히 수면 위에서 미동도 없는 찌를 보고 있었다. 저는 이미 안다고 여기는 것으로 굳이 되새기려 하지 않는다. 그저 그럴 수 있는 일로 치부하는 이상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그 삶으로는 체험할 수 없다. 골프도 치고 여러 모임도 다녀야 하고 그래서 교회나 말씀이나 신앙은 적당하게 거리를 두고 따르는 것인데, 저는 밥 먹다 말고 ‘안 그럼 뭐해?’ 하고 뜬금없이 물었다. 심심하고 어울려야 하고 남들 다 그러고 사는데 뭘 어쩌라는 것인지를 묻는 말인 것 같았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
(33:13).
주를 먼저하고 우선하지 않는 이상 이와 같은 말씀이 대수롭지 않다. 곧 수술을 앞두고 있고, 그 속에 있다는 혹이 어떤 것인지 모르면서도 저는 태평하다. 아직은(?) 죽음이나 고통이 너무 먼 일 같기만 하다. 그럴 때 우린 낭만적이고 방관자적이다. 하지만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4).” 두려워할 줄 모르는 것보다 두려운 일은 없다.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73:11).
그러니 누가 뭐라 이른들. 우린 측량할 수 없고 찾을 수도 없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나 역시 저와 같이 멀리 더 멀리 주를 외면하면서 살기를 바랐을 땐 몰랐다. 죽음까지도 낭만적이어서 까짓,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 마음도 무슨 보험처럼 들고 다녔다. 그러니 참,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3).” 깨달음 없는 자리에서의 말보다 침묵이 더 크게 울릴 때도 있다. 나는 까만 수면 위로 환히 빛나는 달빛을 보며 생각하였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딤후 2:16-17).” 주를 외면할 땐,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3).
이러고 사는 게 바보 같을 때도 있다. 어리석어 보일 때가 더 많다. 그러나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 1:26).” 늘 문제는 나다. 내 안의 씨름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 싸우는 게 상책이다. 거스르고 다투는 감정이 나의 악함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벧전 3:10-11).”
주의 성소에 들어갈 때 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17-19).
저들의 결국을 안다는 것은 나를 두려워할 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이처럼 말씀 앞으로 이끄시는 것이 복인 것은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진실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삼하 22:31).” 그러므로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잠 13:13).” 고로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145:18).
영원한 복은 따로 있었다. 이에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1-23).
나는 비록 다시 생각할 값어치도 아닌 것을 이처럼 가치 있게 삼으시니,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소망하는 일과 모든 행사에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전 3:17-18).”
그러므로,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4-25).
이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주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하면,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84:10-11).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73: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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