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전봉석 2022. 9. 11. 04:08

 

보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온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일함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대상 22:9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시 75:7

 

 

다윗이 성전 건축을 준비한다. 이를 위해 종교 조직을 정비하고(23-26장), 행정 조직을 개편한다(27장). 특히 아들 솔로몬 시대에 주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금 십만 달란트와 은 백만 달란트와 놋과 철을 그 무게를 달 수 없을 만큼 심히 많이 준비하였고 또 재목과 돌을 준비하였으나 너는 더할 것이며 또 장인이 네게 많이 있나니 곧 석수와 목수와 온갖 일에 익숙한 모든 사람이니라(22:14-15).”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였다. 자신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8).” 하신 데 따른 말씀을 순응하였다.

 

저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상대적으로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악을 행하였던 사람들에 대하여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하여 저들은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1:12).” 하고 하나님은 저들을 외면하셨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15).”

 

그러나 오늘 다윗은 비록 자신은 그러그러하여 성전을 지을 수 없다 하셨을 때도 후대에 주의 전을 짓기 위하여 온 마음으로 이를 예비하고 있다. 곧 주를 사랑함이란 그처럼 진심에 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막 12:33).” 곧 우리 주님은 그 어떤 것보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실천을 귀히 여기신다. 그리하여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곧 우리가 옳은 일을 한다는 것은 주를 사랑하는 데서 나타나야 하는 일이지, 하나님 사랑 없는 선과 의는 궁극적으로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가령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전 7:2).” 우리가 선을 이루기 위해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는 일은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구별하신 목적이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이는 무엇보다 우리의 음행을 금하심으로 거룩하기를 바라시는 거였다. 실제 낙태의 85%는 간음으로 인한 것이란 연구 결과도 있다. 특히 여성들이 이를 주장하는데 있어 자신을 신격화하는 것을 본다.

 

어디서 읽었는데 미국의 어느 주에서는 낙태를 금지하면서도 ‘임신한 여성’의 선택은 주권적 합헌으로 인정하였다. 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앞서 수정된 순간 그 생명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있으면서 다음 조항에서는 그러나 임신한 여성의 권리가 우선한다고 하였다. 언뜻 읽어도 앞뒤가 모순된다. 앞서는 사람으로서의 생명의 존엄성을 수정됨과 동시에 인정하면서 뒤로는 그 선택권이 임신한 여성에게 있다는 것은 너무 옹색한 해석이다. 곧 여성의 선택은 생명의 존엄성 위에 있다는 것인데, 이는 저의 태속에 있는 생명을 저의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를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는 성경의 진리가 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시 139:13-16).

 

곧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인간의 선택 그 이전의 것이다. 우리가 태중에 있든지, 그 밖에 있든지, 아직 존재하지도 않은 곳에 있든지, 우리의 존엄성은 하나님의 것이다. 곧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나를 사랑하시기 그 이전부터 하나님의 목적 아래 있었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옳은 일이란 곧 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이는 헌신과 희생으로 영광을 올리는 일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 19:21).” 아무리 우리가 선한 의도로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주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이러한 말씀을 찾아보다 보면 흔히 우리 안의 자발적인 선행이란 것이 얼마나 자신을 우상화하는 데 소용되는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은 이를 대비하여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곧 우리로 옳은 일을 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저의 악랄하고 무자비한 세상은 점점 더 극에 달할 것이다.

 

아이가 그 부모를 공격하고 고발하고 자신에게 훈계하는 자를 적으로 삼고, 어른아이로 자라 자신의 기호를 선호하며 스스로를 섬기고 우상화하는 데 여념이 없다. 그냥 행하는 일은 그 어떤 의로운 일도 선행이 아니다. 자기기만이고 자기만족일 따름이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 14:23).” 곧 믿음을 따라 행하지 않는 모든 선행도 죄일 뿐이다.

 

우리가 오늘 다윗을 보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인가를 알게 되는데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눅 6:22).” 가령 나는 어제 추석 당일의 일보다 우선하여 주일을 준비하고 예배에 전심을 다하는 우리의 선택이 뿌듯하였다. 누구는 어느 결혼식에 참여하고 무슨 약속에 주일 예배를 미루기 십상인데, 중심을 분명히 하고 그 어떤 것도 우선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나는 이를 귀하 삼았다. 물론 서로들 짬을 내듯 ‘줌’으로나마 화상으로 우선 추석 당일 예배를 드릴 수도 있었겠으나… 무엇이 옳고 그름을 떠나 주일을 우선하여 그 중심에 두는 것에 의미가 크게 다가왔다.

 

곧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는 일은 오늘 다윗과 같이 단순히 그 마음으로가 전부가 아닌, 비록 자신은 못하게 하신다 해도 그 성전 건축을 위하여 준비하고 예비함에 있어 환난 중에도 온 힘을 다하는 것에 중심이 있었다. 곧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전념하는 일이다. 자신의 생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가령 베드로는 기껏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는 고백과 동시에 ‘그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하는 말씀을 듣고는 주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하고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1, 22).”

 

이 모습은 어쩌면 당연하고 기특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곧 이어 주님은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23).” 결국 저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보다 자신의 원하는 바 그 옳다 여겨지는 일에 우선하여서다. 우리가 옳은 일, 주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살후 3:12).” 그러므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그 어떤 것, 심지어 자신의 주장마저도 주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8-10).”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표현한 가운데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대상 22:14).” 하는 고백은 오늘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데 따른 기본이겠다. 곧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하다못해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도 그 외에 모든 환경과 여건들도 사랑할 수 있는 ‘덧정’이 필요한데 하물며 주를 사랑하는 데 있어, 세상이 사랑하고 귀히 여기는 것을 우선하여 주를 사랑함에는 그만한 어려움과 환난, 역경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저는 비록 자신이 왕권을 동원하고, 자신의 종교심을 우선하였더라면 그 권세로 건물 하나 지을 수 없었을까? 그러나 주를 모시는 교회는 단지 건물에 있지 않음을…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전 12:27-28).” 하여 우리 몸이 곧 주의 성전인 것을.

 

이를 위하여 예수님의 기도가 간절하셨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나로 이처럼 아침마다 눈을 뜨면 주의 말씀 앞으로 먼저 앉히시는 일에 나는 충성하는 것은 그의 사랑이 이 마음에 계심이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그러므로 나는 나의 이런 행위를 두고 자부하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것’을 그리할 수 있게 하심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도 바울과 같이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부디 그와 같기를.

 

그러하다면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하여 오늘 시편에서 그 핵심을 묵상한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

(75:1).

 

주의 이름이 가까움으로 살아간다면 이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감사가 또 있을까? 세상에 점점 가까워지는 교회와 성도들을 볼 때면 혹은 누구의 권면으로 어떤 변화를 요구 받을 때도, 나는 오직 말씀만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하는 말씀으로만 교회를 지키고 나의 신앙을 붙들고 살 수 있기를. 이에 감사하고 감사함은,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마 13:49-50).” 나로 가장 두렵게 하는 말씀도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더는 되돌릴 수 없는 그날에 ‘내가 주의 이름으로 무슨 권능을 행했네, 뭘 했네’ 하는 따위의 항변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이후에 슬피 울고 통회하고 자복한들……. 나는 내 안의 이와 같은 두려움을 사랑한다. 누군가는 이것으로 나의 소극성을 지적하고, 무능함을 강조한다 해도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살후 1:7).” 이것으로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약속을 받았으나 소망을 이루지 못하였어도 기꺼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이에,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84:11).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공의로,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묵묵히 이 길을 걸어가는 것,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하였으니(행 13:25).” 하는 세례요한의 고백을 나는 존경하고 사랑한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주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 (셀라)

(75:2-3).

 

오늘 시편 아삽은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이 시를 이어가고 있다. 반드시 모든 것은 ‘정한 기약’이 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1-2, 8).” 그 때를 우린 미처 다 알지 못하나 기다림으로 준비할 따름이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그리하여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고로 우린 이 종말의 때를 살면서 무엇을 우선하여 붙들고 살 것인지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곧 하나님의 뜻만이 온전하게 설 것이다. 그럼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하여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전 3:7).” 이에,

 

내가 오만한 자들에게

오만하게 행하지 말라 하며

악인들에게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4-5).

 

악한 날에 악한 자들과 같이 대응하고 판단하고 보복하는 일을 하나님은 선히 여기시지 않는다. 그와 같은 노여움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은 우리가 주의 자녀인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인데,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그렇다면 선이 무엇인가? 우리가 주를 사랑하고 그의 인자하심을 겸손하게 따라 주와 함께 사는 것이 아니겠나? 곧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6-7).

 

주가 하신다.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옳음과 그름을 나누신다. 하여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나는 이를 알면 알수록 ‘말씀으로만, 말씀으로만, 하는 마음’을 구호처럼 속으로 되뇐다. 나의 사연을 적고 누가 좋으니 어떠니 하는 호응보다 다만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와 같이 나는 다만 이 글에서 접속어와 관용구로만 쓰일 뿐, 오직 주의 말씀만이 그 뜻만이 나타나기를. 내가 두려운 것은,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들에서 떠나는 자들을

주께서 꾸짖으셨나이다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켰사오니

비방과 멸시를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119:21-22).

 

하등에 쓸모없는 자를 이처럼 말씀 앞에 앉히심으로 더는 바랄 게 없다.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꺼기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

(75:8).

 

오늘 우리 현실이 그러하다 하여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잠 21:4).” 호의호식하며 모든 권세를 다 누리며 산다 해도 이제는 부럽지가 않은 것은, 우리에게는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그러므로 어떤 환경에서도 주의 성전을 준비하였던 다윗의 생애와 같이,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또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

(9-10).

 

곧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하여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