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전봉석 2022. 10. 8. 04:49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유다 사람이 여호와께 도우심을 구하려 하여 유다 모든 성읍에서 모여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더라

대하 20:3-4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시 102:1-2

 

 

모압과 암몬이 연합군을 결성하여 남유다를 침공하였다. 위기에 처한 여호사밧 왕은 전국에 금식을 선포하고 주의 도우심을 간구하였다. 5-13절의 내용은 저의 기도다. 먼저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전에서의 기도에 따른 응답을 요청한다. 또한 베푸신 은혜를 회상하며 모압 연합군을 징벌하시기를 간구한다.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전쟁 같으나 이는 선견자 예후의 경고에 따른 것이다.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이르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부터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19:2).” 이를 여호사밧은 알았고 그에 따른 회개와 간구가 적절하였다.

 

이를 보면 죄는 반드시 그 값을 물듯 징계를 부르지만 그에 따른 회개와 주께 간구하는 우리의 기도는 주 앞에 언제든 유효하다. 시인은 일찍이 주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는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

(시 89:32-34)

 

이는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성경은 일러 우리가 주의 자녀이면 마땅히 그에 따른 징벌도 따르는 것을 마땅히 하였다. 지혜자는 “네가 네 아들에게 희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되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잠 19:18).” 이를 히브리서 기자는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5).”

 

곧 우리가 주의 자녀이고 권속이면 그릇된 길로 행할 때 주의 징계가 함께 하심이 축복이다. 이를 바울은 ‘세상과 함께 멸망당하는 것보다 주 앞에 징계를 받고, 일찍이 데려가심을 당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누가 어떤 어려움을 두고 안 믿는 자들과 다를 게 없이 호들갑이다. 물론 고통 중에 있고 저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급급하다. 나는 기회를 보다 회개할 것을 조심스레 권하고 주의 도우심을 바라기를 권하였다. 실은 이 말이 매우 조심스러워서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아니한 만 못한 말이다. 하나 그리스도인이면 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6-8).”

 

그래서 내가 살아서 제일 두려워서 말씀은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하심이고, 행여 죽음 너머에서는 “내게서 떠나가라.” 하실까 하는,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둘 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다. 하나는 아직 살았을 때 ‘이제 됐다’ 싶었는데 돌아보아 다시 회개할 기회도 없이 생명이 떠난 것이고, 하나는 일찍이 살아서 자신들은 나름 주의 이름으로 행한다고 한 것이 실은 주와 상관없는 것이 되었으니…….

 

아, 그래서 바울은 늙어서도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저가 왜 그토록 주의하고 조심하고 근신하여 깨어있었는가, 하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오늘 본문은 이에 우리의 진실성과 환난 때에 부르고 찾고 간구하여 도우심을 구할 데가 어디인지, 누구인지를 상기시킨다. 일찍이 욥을 두고 일러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2).” 저는 일순간 모든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고 병이 들고 아내는 떠나는, 그야말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21).” 어찌 이와 같은 진정한 신앙이 가능하였을까? 저는 그 너머, 그 이상의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히 10:3-34).” 곧 말도 안 되는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린 근시안적으로 그 문제에 함몰되어 문제해결에만 집중하게 되지만 그 와중에 우리 안에 두신 주의 영이 생각나게 하시고 주를 바라게 하신다.

 

필리핀 동생은 결국 그간의 사역을 정리하고 귀국하는 것으로 하였다.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는 고소건으로 나는 옹졸한 생각뿐인데, 저는 느긋하기만 하다. 어떤 이는 서너 달 이상이 걸린다 하고, 그 뒤에 또 이어질 어떤 문제가 있을지 알 수 없으나… 이 모든 되는 일이 주의 뜻임을 알고 ‘그 일’은 차치하고 자신이 현재 할 수 있는 일을 두고 준비 중이다. 누나는 그 일을 두고 기도할 뿐이라 하는데… 어제는 새삼 우리 형제들의 믿음과 그 신앙의 계승이 자랑스러웠다.

 

나는 옹졸하여 조급하고 답답하여 억울하기까지 하는데,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삼하 16:13).” 같잖은 이가 다윗을 쫓으며 우롱한다. 그러자 다윗의 심복 아비새와 따르는 자들이 나서 저주하며 따라오는 저를 죽이고 한다. 그때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11).” 하고 말한 뒤 다윗의 심정을 알 수 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12).”

 

곧 오늘 우리가 당하는 일에 있어 더러는 억울하고 더러는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 여겨져 하나님께 서러울 때도 있다. 한데 이것까지도 주가 다스리심을 알고 ‘오직 주만 바람으로’ 그 문제에서 놓여나는 일. 하면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주가 다 해결하신다. 이에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고 우린 주께 찬송할 뿐이다(대하 20:21). 곧 우리의 합심기도는 능력이 크다. 서로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행여 자신의 이런저런 사정을 알까 하여, 같은 교회 같은 성도지간에도 기도를 부탁할 수 없는 사이는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누군 그 집안 사정을 행여 누가 알까 하여 교회 안에서도 겉돌듯 ‘친절한 타인’으로 지낸다. 멀찍이 떨어져 서로 교제가 없다. 한데 우리의 교회는 능력이 있어 주의 도우심을 온전히 하게 한다. 이를 회피하는 것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시 하는 것일 텐데, 한 줄기로 자라는 대나무도 군락을 이뤄야 산다. 할 때에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미 7:7).” 하는 능력이 서로의 지원기도에서 나온다.

 

하나만 더 붙들면 기도는 말씀을 근거로 한다. 오늘 본문 7-9절을 보면, 여호사밧은 주께 구원을 호소할 때 그 근거로 첫째, 아브라함 자손으로 가나안을 주신 데 따른 말씀을 붙들었다. 또 하나는 솔로몬이 지은 성전을 상기하며 성전에서 부르짖을 때에 주가 구원을 약속하셨다는 말씀을 의지하였다.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대하 7:15-16).”

 

특히 오늘 시편은 [고난 당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의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로하는 기도]라는 표제가 붙었다. 우리가 어려울 때, 환난을 당하며 고통 중에 있을 때, 무엇을 의지하고 누구에게 도움을 구할 것인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영광 받으신다.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탔음이니이다

(102:1-3).

 

어떤 절박하고 절실한 기도에, 어느 부모가 그 자식의 부르짖음을 외면하겠나? 하물며 저는 우리의 구주, 나의 하나님 아버지시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이것이 주의 약속이다. 이보다 더 확실한 보증이 더 필요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이는 우리 예수님의 확실한 약속이다. 다른 더 좋은 수가 있겠나?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17:6).

 

지금 고통 중에 있는 누구에게, 나는 저를 생각하며 오늘의 이 말씀을 더욱 더 오래 되새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하면,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91:15).

 

주의 말씀과 그 약속이 우리에게 있다. 설령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 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임을, 저는 선하시고 인자하심으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이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과 전적인 의뢰뿐. 그런 가운데 우리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이상한 평안’이 우리를 붙드신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비록 지금의 괴로움은 ‘내가 음식 먹기도’ 어렵고, ‘내 마음이 풀 같이 시들고 말라 버’린다 해도, 또한 ‘나의 탄식 소리로 말미암아 나의 살이 뼈에 붙’는 것 같이 괴롭고,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다 해도…….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12).

 

이것이 우리 안에 두신 놀라우신 하나님의 의다.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렘 31:3).” 이는 내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래서도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내가 어찌 살았고, 함부로 굴며 주를 능멸할 때도 주는 그때마다 나를 참고 또 기다리시는 것뿐 아니라 도우시고 인도하심으로 ‘여기까지’ 인도하셨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그들의 기도를 멸시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17-18).

 

내가 곧 주의 자녀가 확실하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가 고난 중의 위로와 평안이었다. 이는 결코 아무나 인정할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놀라운 안목이고 확신이다. 왜 내게 이와 같은 사랑을 주시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니라(욥 5:9-11).” 이에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40:5).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우리가 어찌 하나님을 다 알 수 있을까?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곧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22:24).

 

이와 같은 주의 은총과 긍휼하심을 안다면,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2:21).

 

오늘 시편의 놀라우신 주의 은총을 알 수 있다. 곧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27).

 

이와 같은 기도와 고백이 어찌 아무나의 것이겠나? 그러므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하면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일련의 상황과 여러 모양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에게, 오늘 여호사밧의 기도와 어느 시인의 고통 중의 기도를 함께 묵상하며.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7-18).”

 

이에,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