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

전봉석 2022. 10. 10. 04:43

 

아하시야도 아합의 집 길로 행하였으니 이는 그의 어머니가 꾀어 악을 행하게 하였음이라

대하 22:3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

시 104:31

 

 

선을 행하고 의를 따르는 길이 참으로 어려운가보다. 여호람이 8년을 통치하고 죽고 그의 막내 동생 아하시야가 남유다의 6대 왕(B. C. 841년)이 되어 1년을 다스렸다. 모친 아달랴의 영향으로 악행을 저지르다 요람 왕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였다. 결국 “이에 아하시야의 집이 약하여 왕위를 힘으로 지키지 못하게 되니라(9).” 하는 저에 대한 언급이 다했다.

 

우선 저에 대한 언급은 허무할 정도로 단호하고 간결하다. 죄의 결국은 그러했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5:6).” 물론 모후의 악함이 영향을 주었다고 하나 저의 줏대나 주를 경외함에 대하여는 그것으로 다였다. 이에 바울은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 그게 뭐 어때? 하고 허용하는 작은 누룩, 혹은 틈새로 전체가 무너진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에 대해 그 앎이 삶을 주도함으로 살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요 7:17-18).” 곧 예수님도 철저하게 하나님을 앎으로 그 삶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 확신을 두셨다. 곧 우리가 스스로 말함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것인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려 하는 것인지를 보면 된다. 이에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요이 1:10-11).”

 

우리가 악함을 두고 이를 묵인하고 허용하는 것도 행하는 것과 진배없다. 이는 말씀에서 벗어나면 모두가 같다. “그런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의 명령을 파괴하였은즉 그의 죄악이 자기에게로 돌아가서 온전히 끊어지리라(민 15:31).” 한데 또 이는 마음 같지 않다. 어머니를 모시고 있으면서 그 자식 내외와 손자가 같이 온다고 하여 나는 혹시나 예배에 같이 참여할 기회가 있으려나하고 기대하였으나 손위 처남만 줌으로 예배에 참여하고, 끝나고 난 뒤에 저들이 왔다. 이를 그 속에 내재된 영혼의 문제라.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잠 13:13).” 그러니 우리 안에 두신 경외함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세상과 짝하여 산다는 일은 멸망을 자초할 뿐이다. 이는 오늘 말씀에서 1년짜리 통치자의 최후를 보고 그에 대한 간소한 평가로도 알 수 있다. 곧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 13:20).” 그러므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고후 6:14).” 이는 주를 사랑하면 할수록 그 확신이 더 선명해진다. 사회생활을 운운하고 인간관계가 어떠니 하는 말에 밀려 ‘너무 예민한’ 소리로 들릴 수 있으나 병원균은 옮겨도 건강은 옮기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여 성경은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이에 우리로 그 기준은 말씀이다. 저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잃은 자들이다. 영적으로 눈이 가리운 것이다.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2).” 그러니 참 마음 같지 않은 게 사람이다. 처나 자식이라 해서 다르지 않다. 나 하나 건사하는 일에서도 물론이다. 결국은 주의 영이 아니시면 우리의 영혼은 언제 어디에서 잃어버릴 지 알 수 없다. 모두가 저마다의 이상과 신념을 가지고 산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시 25:12-13).

 

우리의 오늘이 후대에도 주의 은혜를 임하게 한다.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곧 너희와 너희의 자손을

더욱 번창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15:13-14).

 

이에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으리라(잠 11:21).” 우리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우리 마음을 움직이시는 이가 그이시다. 마음의 눈이 닫히면 더는 희망이 없다. 어제 말씀을 전하면서도 이를 유난히 강조하게 하셨다.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주신다는 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강조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이는, ① 주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②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게 하고, ③ 주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로 알게 하신다. 그러하기를 기도한다. 그럼 왜 그처럼 우리의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 한다고 하는 것일까?

 

첫째,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우리 영혼을 죽이는 죄가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둘째,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사탄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지 못한다. 셋째,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우리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의 권능을 알지 못한다. 이를 알지 못하는 동안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이 세 가지를 알지 못할 때 구원의 기쁨 없이 껍데기로 믿는 신자로 산다.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암담하고 어두울 때 저는 ‘마음의 눈’이 어두워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가를 확신하지 못한다. 이를 확인하는 방법은 단 하나, ‘진정한 예배와 헌신’이 있어야 하는 것. 곧 서로 나누는 성도간의 교제가 살아야 하고, 하나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시간이 살아나야 한다. 이를 우선적으로 점검하지 않으면 믿는다고 하나 믿는 자로 누려야 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

 

오늘 본문으로도 결국 여호람의 아내이자 아합의 딸인 아달랴는 그의 아들 아하시야의 모후이나 아하시야의 병환으로 피살당하자, 왕권의 공백을 이용해 자신의 손자인 아들 아하시야의 왕자들을 죽이고 다윗의 왕권을 찬탈한다.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가 자기의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유다 집의 왕국의 씨를 모두 진멸하였으나(대하 22:10).” 이 얼마나 극악무도한 일인가? 사람이 어찌 이럴 수 있을까 싶지만 사람의 악은 그 이상도 그러할 수 있다. 그때 주의 뜻에 의해 아하시야의 막내아들 요아스가 고모인 여호사브앗의 도움으로 6년간 숨겨져 성전에서 지냈다. 그동안 아달랴가 유다를 통치하였다(11-12). 뭐라 언급하기조차 악함의 끝 모를 수렁은 두렵기만 하다. 이는 앞서 엘리야가 요하람에게 알린 경고였다. “여호와가 네 백성과 네 자녀들과 네 아내들과 네 모든 재물을 큰 재앙으로 치시리라(21:14).”

 

주의 경고의 말씀을 헛되이 들을 때 우리의 결국은 고스란히 자신과 그 후대가 짊어져야 한다. 나는 종종 내 아버지의 필사적이었던 목회와 어머니의 희생은 이와 같은 말씀을 기초로 하는 것이었다는 데서 새삼 놀란다. 이에 오늘의 시편이 매우 강한 감사로 들린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땅에 기초를 놓으사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104:1-5).

 

젊을 때, 말씀을 멀리하고 지낼 때는 몰랐다. 한데 이제 우리가 주를 송축하고 이를 고백하는 일이 중요한 사실을 안다. 곧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하는 베드로의 고백이 귀하였다. 즉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이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된 깨달음이었고 이를 주는 의롭게 보셨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1).”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이제는 앎이다. 주는 위대하시다. 저의 광대하심을 우리 귀로 듣고 이제는 눈으로 본다. “런즉 주 여호와여 이러므로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삼하 7:22)” 하여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그러할 때,

 

무릇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이시니이다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86:10, 147:5).

 

곧 우리는 그 빛을 안다. 내 마음이 어두울 때는 그 빛을 싫어하고 멀리하였는데,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겔 1:28).” 이는 우리로 놀라운 힘을 발휘하게 한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37:24, 125:1).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아, 이 놀라운 은총을 입은 자로 산다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 복되고 귀하다. 하여

 

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함이여

곧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로다

새들이 그 속에 깃들임이여

학은 잣나무로 집을 삼는도다

(16-17).

 

우리가 굳건할 수 있는 것은 재력도 건강도 권세와 명예로도 아니다. 모든 것은 굳건할 것 같은데 “네가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렘 22:15).” 그러므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8).” 이 모든 것은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바이니,

 

주의 계명들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119:60).

 

이것이 참 앎이고 삶이다. 곧

 

천지가 주의 규례들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까닭이니이다

(91).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이여

주께서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기업이 곤핍할 때에

주께서 그것을 견고하게 하셨고

주의 회중을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68:9-10).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104:24).

 

이를 보고 듣고 느끼면서 우리가 어찌 주를 송축하지 아니할 수 있을까?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상대적으로 이를 알면 알수록 예전에 내가 이를 멀리하고 살았던 날들이 참으로 원통하고 분할 따름이다. 이에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5-7).” 이와 같은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로 살게 하신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30).

 

오늘도 새롭게 하시는 이와 같은 조성하심이 우리로 주를 더욱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3).” 이는 곧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 이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그러므로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31, 33).

 

이것이 나의 남은 생의 과업이며 주를 바라는 진정한 믿음의 길이겠다. 그렇게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이와 같은 질문 앞에 나는 무엇으로 생을 다할까?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말씀이 물으시고 말씀이 답하신다. 하면,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

죄인들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들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시리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

(34-3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