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대하 36:23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18:28-29
요시야의 통치가 끝나자 17대 여호아하스(B. C. 609년), 18대 여호야김, 19대 여호야긴이 어어서 왕위에 오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하였다. 결국 바벨론이 침략하여 저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70년을 다스렸다. 17대 왕인 여호아하스는 애굽 왕 스고가 3개월만에 폐위시키고 엘리야김 즉 여호야김(B. C. 609-598년)으로 개명시킨 후 18대 왕으로 세웠다. 한데 저도 악행하였고 바벨론의 두 번째 침공(B. C. 602년)에서 저는 포로로 잡혀갔다. 저를 이어 19대 왕으로 여호야긴이 즉위하였으나 3개월 만에 다시 바벨론의 침공을 받고 잡혀간 후 여호야긴의 삼촌인 시드기야(B. C. 597-586년)가 마지막 20대 왕이 되었다. 이는 열왕기하 23:31-24:17절과 병행한다.
시드기야는 요시야의 셋째 아들이다.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 20대 왕위에 오른 것이다. 저 또한 악을 행하여 남유다의 멸망이 불가피한 사실을 예레미야를 통해 나타냈다. 온 이스라엘의 총체적인 타락과 하나님의 경고를 멸시함으로 시드기야 때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하였음을 알린다. 결국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당하고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70년간 저들의 종살이를 한다. 이는 열왕기하 24:18-25:26절과 병행한다.
이와 같은 파국에도 바사 왕 고레스를 감동하심으로 B. C. 538년에 바사가 바벨론을 정복하고 바사 제국을 건설하면서 포로로 잡혀와 생활하던 이스라엘을 귀환시킨다. 이는 다윗과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하신 말씀을 근거로 그들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영속성을 이어가게 하신다. 이는 에스라서 서두와 일치한다. 이를 토대로 역대기서와 에스라서의 두 저자가 같을 것으로 본다. 이러한 사실을 살피면서 저절로 오늘 시편의 기도와 그 내용을 되뇌게 한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18:28-29).
격변의 시기를 보면서, 이 모든 게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살피게 한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사 25:1).” 주께서 이미 정하신 일, 그 일을 인정함으로 오늘의 악함을 이겨낼 수 있다. 이는 모든 게 하나님의 뜻, 그의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가능하다. 곧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29:31).” 곧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
오늘 본 시는 양괄식으로 두 구절이 주제로 서로 마주하며 서두와 말미를 장식한다. 즉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1-12).” 이 모든 일의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다. 때론 비난과 실망과 좌절과 원망이 우리 영혼을 휘감지만 “네가 그의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내 모든 말대로 행하면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지라(출 23:22).” 결국 우리가 주의 말씀을 청종하게 하시려함이다. 그때에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신 7:12).” 이에,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이제 아론의 집은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이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2-4).
여기서 각 행의 첫 어절이 ‘이제’로 반복하여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우리로 어떤 어려움, 시련의 때에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심을 알린다. 우리의 영적인 침체는 새로운 도약의 시작이다. 곧 오늘의 시련이 우리로 주를 기억하고 찾고 의지하게 한다.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30:12).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145:1).
어떤 고통이 따르지 않고 주를 무던히 바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 이와 같은 삶은 꿈만 같다. 조금만 안이하고 평안하면 우리 육신의 다른 법이 성령의 소욕을 거스른다. 이에 바울의 절규가 괜한 엄살이 아니듯이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118:5).
결국 지혜는 고통을 통해 주를 찾는 것이다. 순간 떠오르는 인물을 꼽으라면 요나이다.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 2:2).” 저는 결국 물고기 뱃속 즉 고난의 수렁에서 주의 음성을 들었다. 돼지의 먹이를 주워 먹으며 아버지의 집을 떠올리는 탕자의 비유와도 같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주일예배 후에 아이와 올라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회계사나 세무사와 같이 돈을 만지는 일을 염두에 두고 공부 중인 아이에게 이런저런 당부의 말이 많았던 것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이는 스스로의 결심으로 가능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서로의 관행과 일의 관례가 있기 마련이고, 어느 집단에서 이와 같은 일을 담당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유혹이 거셀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하나님이 어떤 뜻과 계획으로 아들이나 저 아이로 이와 같은 직업을 염두에 두고 공부하게 하시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두려움 없는 삶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다. 나는 아이에게 누차 강조하였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주를 경외하는 마음을 잃으면 누구도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 이때,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6).
결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라,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7).” 나는 아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면 염려부터 앞서면서 저들을 영안을 열어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우리가 주의 도우심이 아니면 무엇으로 사회를 상대할 수 있을까? 모두가 괜찮다고 하는 악의 굴레를 어찌 스스로 박차고 일어설 수 있을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7).
곧,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8-9).
이를 어떻게 하면 아이들 마음에 강하게 뿌리내리게 할 수 있을까? 나는 늘 기도 중이다. 앞서 한 아이가 너무 잘 풀린다 했더니, 행시 준비를 하다 한국은행에 취직을 하였다. 서로가 교회의 기둥으로 기대하며 장차 이 교회의 장로라고 으쓱하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직장에 따라 저는 교회를 떠났다. 나는 한동안 속상하였고 앞서 저를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의 그러저러한 조건(?)이 답답하였다. 우리가 누굴 부를 것인가? 무엇을 의지하고 의뢰하며 살까?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9:9).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91:9-10).
이에 우리의 능력은 주의 이름, 예수의 이름으로 ‘이제’ 새 힘을 얻는 것이다.
뭇 나라가 나를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
그들이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
(10-11).
결코 우린 세상을 감당할 수 없다. 스스로의 결단으로는 능력이 없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마치 골리앗을 상대하듯 세상과 마주해야 하는데,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달려갈 뿐이다. 이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4).” 하실 때에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
(14).
그러므로,
내게 의의 문들을 열지어다
내가 그리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19-20).
즉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이는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주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면 세상 그 무엇도 당당히 맞설 수 있다. 나는 아이들의 꿈과 그 직업을 응원한다. 저들이 오바댜나 다니엘과 같이 세상 그 어떤 악한 구조 가운데서도 온전히 주를 바라며 맡은 바 자신들의 역할을 바르게 수행하며 주를 경외하는 자로 살 수 있기를. 그리하여,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24).
오늘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때로 불가능한 일들 가운데서 주를 온전히 바람으로 가능하였다. 이는 “또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겔 20:12).” 하여 신신당부하기는 가장 분명한 기준을 세워야 하고 그 기준은 목숨과 같이 지켜야 한다고 일렀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25-26).
이 확실하고 분명한 사실은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행 13:47).” 고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그가 우리에게 빛을 비추셨으니
밧줄로 절기 제물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7-2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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