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전봉석 2022. 11. 1. 03:58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에스라 8:22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시편 123:1

 

 

오늘은 에스라가 이끄는 2차 포로 귀환자들의 대표와 그 수효를 나타내면서 시작한다. 특히 15-20절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이 없어 성전 봉사자들을 모은다. 짐작컨대 포로시절 제사장의 직무로는 생활이 어려워서 다른 일을 전환하였기 때문이다. 주변에 작은 교회를 이루고 있는 목회자로 다른 일을 병행하는 경우를 생각하게 한다. 실질적인 교회수입으로는 생활이 어려워서 택배나 카페 등 다른 일을 함께 하였다가 결국 목회를 접는 경우도 말이다.

 

우리가 주의 일을 감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값진 부르심인지… 하지만 현실은 그래도 계속할래? 하는 식으로 우리 생활을 위협한다. 나야 이제 더는 다른 길로 갈 수도 없는 막다른 자리에 있어서 더러는 복이란 생각을 하곤 하지만 여력이 있어 뭐라도 하며 병행하려 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보니… 과연 우리의 견딤은 무모함일까? 용감함일까? 바울은 친히 그런 자신을 가리켜 ‘주 안에서 갇힌 자’로 자신을 평가하였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

 

성경이 우리에게 이르시는 말씀은 엄연하여서,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4).” 과연 우리가 이 한 부르심의 소망 안에서 끝까지 부르심의 상을 향해 달려갈 수 있을까? 어쩌다 보니 내가 아는 이들 가운데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은 목회를 그만둔 이들이 더러 있다. 나는 저들을 비난하거나 뭐라 판단할 생각은 없다. 물론 목회를 해야만 부르심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란 사명이 없다면 소명은 부르심에서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자칫 주를 모른다 부인하고 영영 유다의 길을 따를 뻔하였던 베드로 사도는 훗날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딤후 1:10).”

 

나야말로 역순으로 안간힘을 쓰며 살다 더는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막다른 길에서 붙들려온 사람이라, 다른 길도 다른 방도도 묘책도 강구하지 않고 이제 남은 생을 버틸 뿐인데… 이는 내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행하실 것으로 여겨,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즉 더는 내가 어찌 해보려는 어떤 마음도 나는 스스로 시도하지 않는다. 그게 주의 뜻이면 주께서 강제하실 것이고, 아니면 그러다 말 소요로 알고 있다. 내 안에 어찌 이런저런 궁리가 없겠나? 나보다 열 살은 더 먹은 누가 생의 마지막을 불태워 뭔가 새로운 일을 구상한다고 할 때 나도 어떤 조급함이 애간장을 태울 때도 있다. 더러는 누가 타박을 하듯 그대로 있는 내게 그래서 발전이 없다고 뭐라 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그러하여 “…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하는 이와 같은 부요함을 어찌 설명함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 말로는 누구에게도 이해받기 어려운 현실이라 하지만 누군 그래서 말씀만 몇 년을 읽고 또 연구하였다. 누군 주 앞에 정해진 시간을 헌신하였다. 빛도 없고 소득도 없는 일이라, 마치 망령 난 노아 같이 이 좋은 날에 방주나 짓고 있는 꼴이었으니……. 그래, 모든 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나는 때로 자리만 지키자, 하고 이 자리를 하나님이 정하신 것에 더는 요동하지 않으려 한다.

 

실은 목사 안수를 앞두고 며칠 수련회를 하던 때였다. 한 팔을 못 쓰는 집행위원 가운데 한 목사님이 유독 내게 관심을 보였다. 어찌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무슨 일을 하고 살았나 하는 것을 서로가 나눌 기회가 있었다. 저는 남 같지 않은 육신의 고단함을 두고도 내게 당부하고 기도해주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두 번씩이나 떨어지고 다시 온 내게 저가 손에 들려주었던 말씀이었던가.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심정은 같아서,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살리시든지 죽이시든지 나는 더 이상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공교롭게도 생일날 이른 새벽에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 것도,

 

여호와께서 온전한 자의 날을 아시나니

그들의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시 37:18).

 

내가 온전할 때는 주께 전부를 거는 것이다. 건강도 자식도 가정도 세상 그 어떤 관계도 소원도 모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더는 말할 게 없다.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 18:31-32).” 그러므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나를 이처럼 말씀 앞에 앉힐 수 있는 것이 참으로 귀한 것 같다. 어릴 때, 그러니까 아마 여수 애양원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몇 개월을 그곳에 머무는 동안 나는 종종 소경 장로의 손에 이끌려 마을 뒤편 동산으로 갔다. 저는 눈앞에 무엇이 보이는가 물었고, 나는 해변을 따라 시작하여 저 멀리 고기잡이배들과 출렁거리는 물살과 해가 지는 모습을 그려주었다. 고작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의 눈으로 사용할 수 있는 언어는 한정되었겠으나 내 눈에 보이는 것 이상으로 앞을 못 보는 저는 그 너머 하나님의 세계를 마치 눈앞에 펴쳐놓듯이 내 손에 들려주곤 하였다. 그와 같이 그러나 전혀 다른, 아직 한 번도 그려보지 못한 세계에 대해 나는 영원이라는 시간을 더해가며 그려보려 미간을 찌푸리고 그의 설명을 듣곤 했었다.

 

그런 비슷한 경험은 고2 때 혼자 처음으로 술에 취해 전에 있던 전도사가 사는 42번 버스 종점 율도에서의 기억이다. 이런저런 복잡한 심경으로 간질병으로 우리 교회를 그만둔 지 한참 된 전도사와는 꽤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은데… 저도 그때 매순간을 막다른 길을 내달리듯 전도사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간질병이 자칫 약을 거르면 찾아들어서 그때마다 교회를 쫓겨나듯이 옮겨 다니곤 하였는데… 저도 그때 그의 부르심에 만족하며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었던가? 그래서 결국 목사가 되었는지, 여전히 막다른 길을 내달리듯 주의 길을 가고는 있는지…. 그때도 우리가 같이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낙조는 눈이 부시게 붉게 수평선 너머로 이글거리며 넘어가고 있었다.

 

오늘 에스라가 다시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귀합하고 잃어버린 저들의 사역을 맡기는 대목에서 나는 순간 여러 생각이 이처럼 한데 엉겨 멈추게 하였다. “내가 무리를 아하와로 흐르는 강 가에 모으고 거기서 삼 일 동안 장막에 머물며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핀즉 그 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지라(에스라 8:15).” 이에 “…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를 데리고 오라 하였더니,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손자 레위의 아들 말리의 자손 중에서 한 명철한 사람을 데려오고 또 세레뱌와 그의 아들들과 … 모두 지명 받은 이들이었더라(17-20).”

 

그러니 우리 가는 길이 어디까지일까?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11-13).” 나는 종종 부르심을 받고도 주저하는 나의 젊은 동기들에게 독려하곤 한다. 비록 아이들이 아직 어리고 이 일 저 일 돌봐야 할 게 많은 나이이긴 하겠으나,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살후 1:11-12).”

 

당장 눈에 보이는 일과 그 너머의 일을 두고 주가 바로 세우시기를. 어느 소경 장로의 난데없는 나병으로 모든 걸 잃고 성경 66권에 남은 생을 걸고 살았던 숱한 서러움의 날들이 어느 날 주의 나라에서 기쁨과 찬송의 은혜였음을… 어느 젊은 전도사의 간질병으로 인한 전전긍긍하던 삶의 고단함에서 저는 지금 평안히 주의 길을 완주하고 있으신지… 한 팔이 없는 간사 목사로 목회 후보생들을 일일이 격려하고 위로하던 저는 지금 어디서 무슨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고 계신지…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8:14).” 주께서 그리하신 것처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1:10).”

 

이처럼 이런저런 생각에 여기까지 이끌리다 오늘 시편을 본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123:1).

 

한 생을 사는 동안 나보다 복이 많은 사람도 없는 것 같다. 어릴 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길에서 만난 어느 노파가 뜬금없이 내 손에 얼마를 쥐어주며 했던 말도 그것이었다. 그런 거 보면 내 곁을 스쳐갔던 사람들이 더러 꿈인가, 싶을 정도로 범상치 않다. 그렇게 곁길로 돌아 세상에 여러 사람을 만날 때도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그러고 보니 항상 내 곁에 있었다. 저들이 믿는 자였던 안 믿는 자들이었든지, 그때는 내가 눈이 어두워 볼 수 있는 걸 보지 못하고 살던 때이기도 한데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마 6:22-23).” 하시고 예수님은 바로 이어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24).”

 

그럼에도 내가 사리분별 못하고 천방지축 그야말로 제멋대로 살 때도 하나님은 나를 혼자 두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이는 사는 날 동안 부대끼는 일로 어찌 땅에 살면서 땅에 것을 생각하지 말라 하시는가, 답답한 심정도 들기는 하나. 그래서 누구는 더러 이 귀한 사명을 그만두고 다른 길로 가기도 하는데…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25:21).

 

아니면 내가 무엇으로 이 길을 다할 수 있을까?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29-31).” 내 곁에 두셨던 이들의 면면이 ‘주를 앙망함으로’ 그러저러한 처지에서도 묵묵히 그 길을 완주하였을… 그러므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2:5).

 

하실 때에,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2).

 

월급날을 기다리는 월급쟁이의 마음처럼, 진급을 기다리며 오늘도 견디는 회사원처럼 우리의 생은 그러한 허수에 온통 마음을 기울이며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음을.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사 25:9).” 하여,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37:7).

 

이는,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123:3-4).

 

인생이 사는 것이고, 사는 게 지옥인 세상에서 우리로 천국을 맛보아 알게 하시기까지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하시는 이 말씀을 나는 사랑한다. 이는 마치,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03:13).

 

이에 나의 생이 복이었다. 내가 복이 많다. 하나님이 남달리 특별하게 널 사랑하신다. 이를 아는 자로서는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나의 전부를 팔아서라도 얻을 이 복을 놓지 않을 것이다. 이는 엄연한 축복으로,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곧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