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전봉석 2022. 11. 8. 04:09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느헤미야 5:19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시편 130:1-2

 

 

느헤미야가 유다 총독으로 부임한 지 12년이 경과된 때에 경제적인 문제로 이스라엘에 내분이 생긴다. 선민 공동체의 재건과 회복이라는 관건으로 일을 지켜오다 사회, 경제적 갈등으로 힘든 시기를 겪게 된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계속 밀려드는 귀환자들로 흉년을 맞았고, 극심한 식량난으로 돈을 꾸거나 이자를 더하다 자녀를 파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에 가난한 자들의 불평과 부유한 자들의 기득권 다툼이 일었다. 이를 알게 된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불평과 민장들의 악행을 꾸짖는다. 저당 잡힌 자녀나 집이나 땅을 돌려주게 한다. 느헤미야의 지도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청렴결백하고 희생적이었다.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부터 제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내 모든 종자들도 모여서 일을 하였으며…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14-16, 19).”

 

오늘 날 우리 사회에 이와 같은 지도자와 그 본을 보이는 이가 아쉽다. 어느 사회에서나 불평등의 갈등은 존재한다. 하여 “그 때에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 이러한 불평은 사람 사는 사회에서는 어쩌면 필연적이다. 할 때에,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 15:11).” 곧 우리가 서로를 돌아보고 그 관심과 관용을 베푸는 일은 특히 주를 믿는 자로서는 필수적이겠다. 이때에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17).”

 

자족하는 마음, 곧 주를 신뢰함으로 얻을 수 있는 기회이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5).” 주께서 우리에게 더하신 은혜, 이를 사느라 모두 잃고 산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누구는 어려운 상황에서 누구는 다소 여유로운 상황에서 서로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는 것,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 15:11).”

 

이는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차치하고 그로 인하여 주를 생각하기보다 먹고 살기에 급급해지면서 우리 영혼은 더욱 황폐해진다. 특히 내 곁의 주의 사역을 맡은 자들의 경우 어쩜 그렇게들 어려운 역경 속에서 곤란을 겪고 있는지. 가끔은 아주 가끔은 그것 때문에도 주께 나는 돈을 구하기도 한다. 생각 같으면 조금만 누가 버팀목이 되어줘도 이를 딛고 주의 길을 씩씩하게 달려갈 것 같은데… 그런저런 어려운 이야기를 듣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러한 어려움으로 우리가 주를 찾고 바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우리가 서로를 돌아본다는 일은,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이를 주가 부탁하신 일이라 생각하는 것,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갈 2:10).” 곧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이와 같은 생각을 하다 어제 낮에 묵상하였던 말씀이 생각난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믿음’이라는 명사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를 ‘믿는다’는 동사로 활용하여 무려 98번이나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는 매우 의도적으로 믿음은 어떤 상태나 현상이 아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일로 이를 영접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하여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그러므로 요한은 믿는다는 동사형으로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순종과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 하긴 믿음은 명사일 수 없는 게 명사는 그렇다는 개념으로 어떤 상태를 뜻하는 것이지 능동태로 우리의 직접적인 행위를 내포하지는 않는다.

 

가령 ‘산’이면 그것이 무슨 산이든 그저 ‘산’일뿐이다. 한데 산을 오르다 할 때의 산은 더 이상 개념의 의미가 아니라 행동과 실천의 의미다. 곧 우리의 영생도 그렇다는 개념이 아니라,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아들을 믿는다는 행위로서 이는 순종한다는 행동이 뒤따른다. 우리가 사역을 맡아 목사가 되거나 교회를 이뤄간다는 일도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실질적인 행함으로이지 관념이나 어떤 생각으로가 아니다. 생각만 있는 경우는 행동하지 않는 것과 같다. 생각하기는 때로 행동하기를 미룬다.

 

나는 요한이 성경을 기록하면서 의도적으로 믿음을 믿는다는 동사형으로 사용하였다고 본다. 믿음이 단지 믿음일 때는 저 산이 그저 산일뿐인 것과 같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생각으로서가 아니라 실천으로써 우리 삶의 행위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0-13).” 그러니까 우리의 행함은 다소 무모하다. 현실적으로 앞이 안 보인다. 그러느니 조금 우회하거나 미루는 게 낫다. 그렇게들 누구는 여전히 답보상태와 다를 게 없이 느리고, 누구는 여전히 또 생각하기를 고집하며 행동을 미룬다.

 

나는 누구들과 나란히 통화하면서 다소 가벼운 표현으로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실행으로 옮겨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어느새 저들도 마흔 줄이 되었다. 한참 주의 일에 매진해야 하는데, 먹고 사는 일이 늘 문제라…. 그러다 누구에게는 굳이 꼭 목사로 살아야 하는 건 아니라고까지 말해버렸다. 그러느라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로 하다못해 일반 평신도보다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까 하는 소리였는데… 속상하였다. 그럼 우린 무엇으로 믿을 수 있을까? 믿음을 명사로 두고 사는 게 아니라 동사로 딛고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예수님은 명쾌하게 답을 주셨다. 예수를 먹고 마시라는 것,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그러자면 먼저 목마름을 느껴야 한다. 그 영혼의 갈증이 없이 말씀 앞에 앉을 수 없고 주 앞에 아뢸 게 없다. 먹고 마시는 일은 행위이지 그대로 멈춰져 있는 상태가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내분과 갈등은 그래도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모여드는 무리와 이를 중심으로 성을 재건하고 복원하는 일에 있어서, 하긴 먹고 사는 문제보다 실질적이고 필연적인 갈등구조가 어디 있겠나? 이때 우리는,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시 82:3).

 

막연히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그 영혼이 화석 같다. 늘 같은 자리에 놓아둔 화석같이 자라지도 움직이지도 않는다. 이를 아무리 갉고 닦고 수고하고 애써 돌본다 해도 화석은 자라거나 움직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있다 하면서 여전한 까닭은 그 영혼에 목마름이 없어서이고 그러니 죽기 살기로 주를 찾기에 갈급하지 않는다. 요한은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 6:58).” 하시는 말씀을 전적으로 현재진행형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를 영접한다는 믿음은 믿노라 하면서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그런 상태가 아니다.

 

이를 존 파이퍼 목사는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나뭇가지로 연관지어 설교하였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곧 가지는 수시로 물을 마셔야 산다. 물을 흡수하지 못하거나 흡수할 물이 없을 때 가지는 시들고 말라서 끝내 제풀에 떨어진다. 이를 나는 우리가 끼니때마다 챙겨먹는 일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심지어 배가 안 고프다 해도 끼니를 제때 챙겨먹는 습관은 우리의 건강과 생명을 유지하는 필수다. 장모와 같이 생활하면서 잘 드시는 것으로도 복이란 생각을 자주한다. 노인이 되면 소화기능도 떨어지고 입맛도 없어서 자꾸 굶으려고 하는데, 이는 모든 병의 근원이 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를 마시고 먹고 사는 일은 믿는다는 동사로 거듭났다는 새 생명의 증거다. 오늘 오려는가, 하고 누구에게 확인전화를 했다가 못 오는 열 가지 이유를 들으며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우리의 외면은 곧 하나님을 외면하는 일과 같다. 무서운 말씀 중 하나,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 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겔 16:49-50).” 늘 느끼는 것이지만 적당함이 때론 그 영혼의 불치병이다. 나더러 누가 어떠세요? 하고 요즘 근황을 물으면 나도 문득 어떠한지 모르겠다. 다만 나는 ‘습관을 좇아’ 새벽에 눈을 뜨면 교회로 올라온다. 너무 이른 시각이라 한숨 더 잘까? 하는 마음도 간절하다. 또는 누가 뭐라 하면, 그야말로 뭐라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으로 한동안 시달리기도 한다. 그럴 때 나에게 주신 은혜는 약함이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나도 나의 약함을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자랑하는 것은 여기에 주의 능력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나도 내가 얼마나 게으르고, 회피하고, 타협하며, 혹시나 하고 엉뚱한 상상을 잘 하는지 알고 있다. 누구보다 그러하였고 그것을 무기 삼아 부지런하다고 여기며 살았던 적도 있다. 그러나 주를 바라는 일은 외적인 어려움보다 내적인 갈등이 더 큰 난제인 것을 알았다. 외적인 어려움은 오히려 기도하게 만들기도, 하나가 되게도 한다. 그런데 내적 갈등은 자꾸 미적거리고 뭉개고, 행동하기보다 생각하기를 강요하며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약 5:1-3).”

 

적당히 안주하고자 하는 욕구는 늙지도 않는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쳐 복종시키는 일로 자주 내 안에 무던함을 요구하게 되었다. 가령 오늘도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한두 시간은 더 자도 되겠다. 별로 서둘 게 없는 사람이라, 더더욱 그리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다. 한 번 다시 누우면 그대로 또 몇 시간이 흐를 것을 안다. 그래서 눈을 떴으면, 움직일 수 있을 때, ‘오늘 만큼씩’ 주를 마시고 먹는 일에 우선하려 한다… 믿는다는 일은 배부른 상태로 있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끊임없이 시침과 초침이 움직여 시간이 일정하게 흐르는 것처럼 일관되고 무던하게! 누가 물었다. 정말일까요? 하나님이 이 일을 원하실까요? 하는데, 나는 대답했다. 우리 안에 그런 갈등이 있다는 게 이미 답은 아닐까? 우리 영혼은 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이때 오늘 본문도, 우리 현실도 외치는 소리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그야말로 죽이든 살리시든 주가 알아서 하시라, 하고 우린 다만 ‘오늘씩’ 그 하루의 생수와 떡을 먹고 마시면 될 일이다.  그럼 어떤 깊은, 어려움이 닥쳐온다 해도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130:1-2).

 

우리에겐 책임지실 이가 분명히 계시지 않던가? 인생 깊은 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어떤 내적 고통, 그 아픔을 부여잡고 하나님의 사유하심을 바라는 일은 우리들만의 특권이다. 한탄과 원망의 자리가 기도의 자리가 된다. 공교롭게도 힘들어하는 나의 동기들은 죄다 불안증과 신경쇠약증을 앓고 있다. 그래서도 저들 때문에 나 역시 그러하게 하셨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럴 때, 목사님은 어떻게 하세요? 하고 물으면, 나는 고상한 사람이 아니라 될 대로 되라, 하고 약을 더 먹으면서도 해야 할 일을 해! 하고 단호하게 말한다. 우리의 공통된 특징은 회피다. 미루고, 외면하려 든다. 미적거리고 자꾸 미루게 되는 것은 고질적인 회피본능이다. 병원에서는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며 하나마나 한 소릴 하는데, 스트레스 없이 누가 누굴 위해 기도하고, 또한 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저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그의 일에 감정이 이입되어서 덩달아 힘들고 아픈 게 아닐까? 아니면 애통하는 마음으로의 기도가 나오나?

 

우리가 중보기도를 잘 못하는 이유는 별로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로 그 이유는 ‘내 코가 석 자’라서 그렇다. 그러다보니 늘 자신을 위해서만 빈다. 남을 위한 기도는 도식적일 뿐이다. 지나가는 말처럼 아뢸 뿐이다. 그래놓고는 잊는다. 그러든가 말든가, 안 들어주셔도 상관없다는 듯 잊고 난다. 여럿과 통화할 때 저마다 자기 일에 여념이 없어서 누가 먼저 나의 안부를 묻는 일은 없다. 혹은 전에 말했는데, 그래? 하고 처음 듣는 듯하다. 그 일은 물가에서 찰랑거릴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누굴 위해서도 기도가 안 돈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 하실 때 나는 저 깊은 데, 남의 그 내밀한 소리에까지 귀를 기울이는 일을 연상한다. 그러자니 내 속이 괜찮겠나? 회피하면서 서로의 관계는 친절한 타인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중보는 약소하고 자기 바람은 한도 없이 무겁고 질기다. 중보는 중언부언하다 말고 자기 기도는 늘 요구하는 게 늘어만 간다. 마치 하나님 앞에 무슨 청구서를 끝도 없이 내미는 것처럼.

 

그래서 오늘 시편에서 눈에 띄는 표현은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1).

 

우리의 깊은 곳에 저이도 있다. 누구의 사연도 있다. 중보기도의 희한한 현상은 자기를 위해 비는 내용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나는 별로 바랄 게 없어진다. 보면 다 빌기도 전에 들어주시는 것을 체험한다. 오히려 기도할 줄 모르는 아이, 안 믿는 가정의 누구를 위해 기도하게 하시려고.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고 답보상태로 있는 누구로 인해 자꾸 신경 쓰이고, 마음이 가서 내가 들들 볶이는 일인데도 연애하는 사람처럼 자꾸 마음이 쓰이는 일에 대하여… 스트레스 없이 기도가 되던가? 누구 일로 마음이 어렵지 않고 저를 위해 기도가 되던가? 연애하는 사람은 스스로도 어쩔 수 없어 이를 주체하지 못하는 경험을 한다. 저의 일이 나의 일보다 궁금하다. 신경 쓰이는 마음으로 주께 기도하게 된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 넘기사 그들이 곤고를 당하게 하시매 그들이 환난을 당하여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에게 구원자들을 주어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거늘(느 9:27).” 하고 자꾸 마음이 가는 일,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3-4).

 

내가 주를 바란다는 일은,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91:15).

 

어려움과 약함이 나의 특기였다. 아픈 게 일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눅 11:8).” 나는 그렇게 단순하여서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될 대로 되라 하는 심정은 주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 여기려면 내 판단과 기준을 짜내야 한다. 바짝 마른 수건처럼 이제 주의 은혜를 흡수만 한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럴 수 있나, 하고 물으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 더욱이 이 일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4-5).” 즉흥적이고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오늘의 나의 존재는 말이다. 이 엄청난 시간 동안 공들여 ‘오늘씩’을 부여하심인데, 대체 무슨 걱정이람!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사 50:10).” 됐다, 그럼. 될 대로 되라 하는 것은 주가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이고, 나의 믿음은 오늘도 믿는다는 동사형으로 그저 있는 힘껏 주를 바라는 것밖에.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말 3:16).”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5-6).

 

오늘 하루도 그만큼이면 됐다. 내일은 내일이 염려하게 두자.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그러니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아, 나는 이 말씀이 항상 든든하다. 내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면 장차 어찌 되든지, 그것까지도 주가 책임지실 터… 지금은 목마름으로 생수 되시는 그리스도를 마시고, 말씀이 되신 주를 읽고 묵상하는 것으로 되었다. 나는 그럼 나의 약함으로, 보내시는 이로 마주할 따름이다. 

 

나의 간구가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

(119:17).

 

그러므로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그리하여,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130:7-8).

 

아, 이로써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86:15-16).

 

그러므로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