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가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
느헤미야 7:2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시편 132:13-14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완료되었다. 유다 귀족들과 도비야 간이 내통을 통해 예루살렘 성을 방비하고 통치할 책임자를 임명하고 그 전략을 세운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해가 높이 뜨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고 아직 파수할 때에 곧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르며 또 예루살렘 주민이 각각 자기가 지키는 곳에서 파수하되 자기 집 맞은편을 지키게 하라 하였노니(3).” 느헤미야의 동생 하나니는 예루살렘 성벽의 훼파 소식을 수산궁으로 알려 느헤미야로 이를 수습하게 한 자이다. 하나냐는 성채를 지키는 자로 세워 저가 충성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인 것을 밝힌다.
오늘의 예루살렘은 교회로 각 직분을 세워 이에 봉사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1-12).” 곧 우리로서는 세상 타락과 하나님 없이 사는 데 따른 악을 경계하고 이로부터 교회를 지키고 그 사명을 다하게 한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전 5:11).”
이에 우리가 현실과 교회의 차이를 두고 갈등하고 주저할 수 있으나,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10:31).” 이와 같은 말씀 안에 그 답이 있다. 곧 우리의 모든 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이다. 이에 우리의 기쁨은 본질적인 것으로 바울의 결연한 의지를 들으면 더욱 확신할 수 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유익하다.’ 이 놀라운 신앙은 샘이 날 정도로 나의 고백이 되기를 바란다. 특히 사는 데 따른 것은 그 일의 마땅함을 알겠다는데 죽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죽어야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나타나실까?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3:8-9).”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를 바람이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난 의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4:11-12).” 그래서 모든 게 어떠하든지 자족할 줄 안다! 그 일체의 비밀은 어떤 연마와 경지에 다다른 우리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곧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 이를 알게 하시고 더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하다? 사는 것과 죽는 것 사이에서,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1:23-24).”
곧 개인적으로는 얼른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더 좋고 유익하지만 ‘너희를 위하여’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둘 사이에 낀 것으로 내가 남은 삶을 다하며 사는 일이란 하나님을 온전히 드러내고 나타내어 한 영혼이라도 주 앞에 바로 세우려는 것이고, 이로써 그리스도를 더욱 높임을 받으시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말이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이런 의미로 오늘 예루살렘의 재건과 이를 방비하고 지키는 데 따른 영적인 교훈은 하나였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31).” 바울이 그러하였듯 느헤미야도 교회 직분자의 가장 필요한 덕목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이를 맡은 자가 구할 것이 충성인 것을 알게 한다. “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가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느 7:2).”
곧 우리가 주를 경외한다는 일은 그리스도로 모든 것에 만족하는 일이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그것으로 높임을 받으시는 것은 세상이 나를 속이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 해도 이를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실 것임이라!’ 즉 그 어떤 것보다 더 나은 그리스도로 얻고자 함이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이 놀라운 진리가 우리로 죽는 일까지도 기꺼이 기쁨으로 바꾼다. 사실 죽음이란 모든 사랑하는 것, 좋아하는 것과의 단절이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잃는 것이지만 그 이상으로 좋고 사랑하는 그리스도를 얻는 일이기도 하다. 즉 그리스도로 유익하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우리의 삶은 놀랍게도 바뀐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점점 달라지는가 하고 살펴보면,
첫째, 죽음에 대하는 우리의 슬픔이 그 결을 달린다. “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0-24).” 천천히 그리고 꼭꼭 씹어서 이 말씀을 여러 번 묵상하면 그 맛을 알 것 같다. 그럼 그럴수록,
둘째, 우리가 돌이켜 회개하고 주를 나의 구주로 영접한 사실에 대해 그 귀하고 존귀함을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기길,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다른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얻고 싶고 갖고 싶고 내 것을 삼고 싶은 것, 그리스도를 발견하면 모든 것을 잃어도 그저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는 것은,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 2:2-3).” 곧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1:23).” 그러므로 오늘 내가 예수를 믿고 나의 구주로 삼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이 사실이 얼마나 귀한 은총이고,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 것인지를 안다. 그러므로
셋째, 믿음으로 더 이상 회의와 갈등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더 이상 예전에 즐기던 것, 소중하게 여기며 추구하고 갈망하였던 것으로 나를 채우려고 하지 않는 일. 대신하여 예수로, 말씀으로 나를 더욱 채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믿음은 곧 깨어난 만족이다. 더는 허기지지 않고 더 이상 목마르지 않다. 그러므로 더는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도 우선하지 않는다. 곧 나의 의지, 주장과 생각 따위로 나를 지배하게 할 수 없다. 이것이 악이라 사실을 알기 때문에,
넷째, 이제는 악을 악으로 간주하여 이를 경멸한다. 그럼 악이란 무엇이었나?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곧 하나는 하나님을 두고 다른 하나님을 찾은 것과 또 하나는 이를 위하여 내가 내 하나님이 되어 나 자신으로 나를 주장하게 하였던 것이다. 내 방식대로 내 마음대로 하려던 것으로부터 악의 시작과 끝이 그처럼 한 지점이었다. 자기만족, 자기 의… 그리하여 우리 주님은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곧
다섯째, 자기 부정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그런 거 보면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할 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여전히 구원을 이뤄가는 것으로 믿음이란 살았고 자라서 성장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하고 그처럼 단호하였구나! 즉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단지 믿음이 자기만족이나 결단이 전부가 아니다. 아이가 나면 자라가야 하는 일처럼,
여섯째, 세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달라진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다들 돈돈거리며 사는 세상에서 정작 우리의 계좌는 천국에 있음으로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20).” 그럴 때 우리의 헌금도 그 개념이 달라져서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곧 점점 더 온전한 십일조가 사라지고, 드리는 일에 인색함으로 하게 된다. 사는 게 점점 팍팍하다 보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 것이 아니다.’ 설령 교회가 어떻고, 어떤 이가 거짓되다 해도 우리의 드림은 주를 향한 것으로,
일곱째, 예배가 달라진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 15:8).” 점점 우리의 예배는 웅장하고 화려해지나 마치 공연을 보듯 혹은 어떤 훌륭한 강연에 자기만족을 추구하듯 설교를 듣고,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는 일 따위는 모두가 온전한 예배일 수 없다. 예배란 우리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만족하시게 하는 것으로,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그럼 우리의 진정한 예배란,
여덟째, 나의 약점이나 장애, 결핍이나 노여움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7-9).” 누구라도 약점 없고 결핍이 없겠나? 이를 스스로 채우려 웅덩이를 파던 삶에서 벗어나 내가 나의 하나님으로 여기던 돈이나 자식이나 사랑이나 그 어떤 소중한 것도, 혹은 내 안에 나만 아는 어떤 노여움들도 모두 주를 찬송하는 것. 이는 나의 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시는 것으로,
아홉째, 사랑에 대한 관점이 달라진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즉 내가 사랑하는 사랑이 실은 이기적인 것으로 집착이요, 아집이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열 번째, 남은 날을 어찌 살아야 사는지가 결정된다.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후 1:23-24).” 그러므로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빌 1:25-26).” 곧 내가 사는 이유가 달라졌다.
우리의 예루살렘, 그 시온이 오늘은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러 주와 함께 하려 함이니, 오늘 시편은 우리의 진정한 근심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가 되는 것임을 확신하게 한다.
내가 내 장막 집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고
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하지 아니하기를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
(132:3-5).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어떻게 하면 주의 일에 합당할까, 하고 교회를 생각하고 어디 개척을 또는 한 영혼을 섬기는 일에 마음을 쓰는, 나는 누구의 고민을 사랑한다. 저의 이런저런 근심이 저로 더욱 주를 바라게 하는 데서 나 역시 저를 위해 기도하게 된다. 곧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이는 결코 막연하고 엉뚱하고 시끄러운 사역이 아니었다. 조용히 빛도 없이 알아주는 사람도 없이 온전하게,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0-11).” 즉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9).” 그리하여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7).
오늘 시인의 갈망이 나의 것이고 우리의 것이기를. 하여 더욱 주를 바람인데,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이에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13-14).
곧 나의 삶, 나의 장래에 대하여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누구나 죽음을 맞이해야 하듯 누구나 예수 재림을 맞이할 것이다. 그때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그러므로 오늘도 싸운다. 싸워서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21).” 곧 내가 나를 쳐서 복종하게 하는 이유였다. 그렇게 하여,
내가 그의 원수에게는 수치를 옷 입히고
그에게는 왕관이 빛나게 하리라 하셨도다
(18).
그렇게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사 35:10).” 아, 이 놀라운 은혜를 오늘은 맛만 볼 수밖에 없다 해도,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119:103).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이 된 것은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 4:20-21).” 이에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주가 끝까지 책임지실 것을 믿으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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