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전봉석 2023. 8. 1. 05:04

 

내가 바로로 하여금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게 하였으나 이제는 그가 그 모든 무리와 더불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곧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이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스겔 32:32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시편 88:13

 

 

 

우린 저마다 비밀의 무덤 하나씩을 가슴에 품고 산다. 이를 ‘바로’라 하거나 ‘애굽의 무리’라 해도 되겠다. 하나님은 바로를 들어 ‘이스라엘’을 위해 사용하셨다. 이스라엘을 우리의 ‘속사람’으로 두고 바로를 ‘겉사람’으로 두고 생각하게 된다. 애굽의 무리들은 숱한 사연과 그에 따른 말할 수 없는 비밀이다. 함께 서로의 속사람을 마주하고 앉아 이에 따른 겉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주께 감사할 수 있는 사이는 복되다. 오늘 본문에 앞서 나는 이를 통하여 ‘나의 바로’ 됨과 ‘애굽의 무리’를 생각하였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추어 서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던 시간이 기이하다. 이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오늘도 애굽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며 최종 결론을 맺는다. 결론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심판의 대상’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바로’와 ‘애굽의 무리’는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다. 소모적이었다고 할 수도 있고 필연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먼저 그 심판의 대상은 왕이다.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2).” 그리고 분리하여 애굽의 무리 곧 그의 백성들에 한정된다. “인자야 애굽의 무리를 위하여 슬피 울고 그와 유명한 나라의 여자들을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지하에 던지며 이르라 너의 아름다움이 어떤 사람들보다도 뛰어나도다 너는 내려가서 할례를 받지 아니한 자와 함께 누울지어다(18-19).”

 

앞서 애굽에 대한 심판의 원인을 ‘공동체적인 성격’ 곧 그럴 수밖에 없었던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을 두고 예언하였다면 오늘은 그 심판의 책임을 구체화한다. ‘애굽’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모든 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 믿는 것을 훼방하고 이를 저지하려 드는 모든 존재의 상징이다. 사람이든지 상황이든지, 우리로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고 대신 의지하게 하려는 모든 대상을 총칭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니고 사는 저마다의 ‘비밀의 무덤’은 자신만의 ‘애굽’을 향한 구애의 현장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살면서 사느라 드는 시간과 열정과 마음과 모든 사랑이었다고 할까? 마치 ‘생존 지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구덩이’ 또는 ‘지하’와 같은 시절들 말이다.

 

오늘 본문에서 그 구덩이를 암시하는 구절이 여러 번 나온다(18, 23, 25, 29, 30). “인자야 애굽의 무리를 위하여 슬피 울고 …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지하에 던지며(18).” “그 무덤이 구덩이 깊은 곳에 만들어졌고 그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23).”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뉘었도다(25).” “… 구덩이에 내려간 자와 함께 누우리로다(29).” “…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30).” 같은 의미로 ‘지하’라 하면 “…그 모든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지하에 내려간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24).”

 

우리가 살아오면서 ‘애굽’으로 인하여 ‘생존 지옥’ 같던 ‘지하’ 곧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같이 저마다의 ‘무덤’ 곧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죄의 사슬에 매여 수치를 당하였던… 어쩌면 우린 살아서 ‘지하’, ‘구덩이’ 곧 지옥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더는 그 끔찍하였던 어둠의 현장 곧 무덤 속 같았던 날들을 돌이키려 하지 않는다. 이를 바울의 절규하는 심정으로 읽으면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엡 5:3).” 왜냐하면 우린 이제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1-2).”

 

우리가 사랑 가운데 행한다 함은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8).” ‘어둠’ 그 ‘지하’, ‘구덩이’에서 이제는 ‘빛의 자녀’가 되었다. 이에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9).” 그러므로 우린 이제 자신을 두고 치를 떤다. 그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4).” 모든 게 돌아보면 ‘감사’밖에 없다. 이미 죽어 마땅하였을 영혼을 위하여 나의 ‘바로’ 나를 항상 괴롭게 하였던 ‘애굽의 무리들’을 벗어버린다. 이를 누구보다 바울을 사울 때의 일로 치를 떨며 설교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엡 5:5-7).”

 

이제 하나님의 통치가 나의 질서 가운데 침투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 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우리 죄를 들춘다. 감추고 또 감추어도 우리 안의 비밀의 무덤을 파헤친다. 이는 이제 세례요한의 때로 그쳤다. 이제는 복음이 내 안에 침입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내 스스로 지혜 있는 줄 알고 나름 ‘슬기 있는 자’로 살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나의 나 됨’ 곧 ‘지하’ 또는 ‘구덩이’에 갇힌 자로서 빛이 들지 않아 어둠이었는데, 복음이 곧 말씀이 내 안에 침입하여 살아 활동하면서 나는 ‘자발적인 어린 아이’가 되었다. 두려움을 느낀다. 공포로 다가온다. 예전에 즐기던 것이 무서운 수치심과 좌절이 되었다. 그때는 저마다 그러고 사는 게 ‘지상 낙원’ 곧 천국인 줄 알았는데…,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이 놀라운 은혜 앞에 무릎을 꿇는다. 나의 죄 됨을 인정한다. 감히 입을 열어 아뢰지도 못하고 가슴만 쥐어뜯는다. 그러할 때,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또한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18:13).” 다른 그 무슨 말로 허용이 될까? 복음이 우리 안에 침입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확장되어 갔다. 더는 숨길 수 있는 무덤도 지하도 구덩이도 없다. 나를 괴롭혔던 ‘바로’와 ‘애굽의 무리들’로부터 벗어났다. 저들 덕분에 우린 이제 광명을 얻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 하리라(새찬송가 305장 전문).

 

존 뉴턴은 노예를 운반하는 노예선 선장으로 일하다 ‘복음이 침입’하여 고꾸라지면서 목사가 되고 이 시를 지었다. 이 찬송은 모든 성도를 울린다. 나 역시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나는 주 앞에 서서 나의 지난날을 낱낱이 고할 때 그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치를 떨면서 죽는 게 더 낫다고 여길 것이다. 하나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그런 나조차 대언하시며 예수께서 나의 모든 죄를 보혈의 피로 씻으시고 감추신다.

 

저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의 무덤을 가슴에 안고 사는 동안, 그 지하에서 또는 구덩이에서 허둥대는 동안 놀랍게 지나간 날들의 나의 ‘바로’을 애통해한다. ‘애굽’을 생각하며 애가를 부른다. 실은 그와 같은 짙은 어둠으로 나는 빛의 자녀가 되었다. ‘복음의 침입’은 역설적이게도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이를 일깨운다. 내 안의 어둠이 걷히면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요 1:30).”

 

저는 곧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에게 침입하신 복음이며,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그러므로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가난한 자’ 곧 ‘심령이 가난한 자’로 더는 다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영혼의 절대적인 가난을 간직하고 사는 자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우리가 감히 입을 벌려 뭐라 외친들,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살후 1:5).” 그리하여 오늘 ‘바로’와 ‘애굽의 무리’가 내려가는 그 ‘구덩이’를 벗어난 것이 능력이다. 이 능력은,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려 주셨나이다

(시 140:7).

 

이로써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 40:26).” 우리는 이제 확신에 찬 눈으로 본다. 그리고 달려갈 길을 다한다. 이때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29-31).”

 

아, 이 놀라운 능력!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이를 가지고 오늘을 산다.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88:1-2).

 

사는 날 동안 어쩌면 여전히 우린 무덤 같은 아니 지하 같은 구덩이 속에 숨은 자아를 붙들고 씨름해야 할지 모른다. 저는 여전히 우리로 약속의 땅을 가는 데 있어 이를 가로막는 ‘바로’이며, 뒤돌아보게 하는 ‘애굽의 무리’들이다. 이에,

 

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3-5).

 

그러므로,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

(6-7).

 

이는 곧 광명으로 나올 수 있게, 복음의 침입이 성공하기까지,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8-10).

 

역설적이게도 ‘바로’와 ‘애굽’이 나로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게 한다. 설마 하나님이 여기서 멈추실 텐가? 시인은 항변한다.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11-12).

 

기어이 살리시기 위해 나를 죽이셨다. 기필코 우리의 짙은 어둠을 모두 털어내기 위해 우리 안에 침입하셨다. 그리하여,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13-14).

 

나는 나의 죄로 오히려 당당하게 주의 은혜를 차지한다. 나의 은혜가 남다르고 큰 것은 나의 죄가 짙었고 추하였고 더는 회복불능의 죄인이었음을 인정하면 할수록,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15-17).

 

그러나 이제 단언하건대, 나를 주의 자녀 삼으시고 빛의 자녀로 살게 하시려고, 내가 그토록 사랑하고 의지하며 자랑하였던 것들로부터 해방하게 하셨다.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