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네 성읍들을 무너뜨리며 네가 황폐하게 되리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에스겔 35:4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시편 91:7, 14
성경을 읽다 어느 한 구절에서 풀썩, 하고 주저앉아 한참을 일어설 수가 없다. 가령 “내가 네 성읍들을 무너뜨리며 네가 황폐하게 되리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4).” 하는 부분에서 아- 하고 긴 한숨이 통회하는 마음과 함께 일었다. 결국은 나의 자아가 무너지기까지, 나로 내 영혼이 황폐하여 비로소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던 순간이 교차하였다. 나 자신이 얼마나 완고하고 유난스러웠었는지를 돌아보다, 주님- 하고 부르게 되는 외마디.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회복에 대한 34장의 말씀에 이어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린다. 이스라엘에 대해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소망을 묘사하였다면(34:25-31), 오늘 에돔에 대하여는 직설적이고 역사적으로 서술한다. 오늘 말씀에 이어 내일 보게 될 36장은 그 대상을 ‘산들’로 묘사하고 있다. “인자야 네 얼굴을 세일 산으로 향하고 그에게 예언하여(35:2)”,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산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36:1).” 이를 볼 때 에돔에 대한 심판이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을 보증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오늘 시편의 한 구절에서처럼,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시 91:7).
우리에게 재앙은 새로운 국면, 구원의 관문인 것을 암시한다. 내가, 나의 자아를 무너뜨리지 않으셨다면 나의 영혼이 황폐함을 느끼지 못하였다면 과연 나의 오늘은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난다. 그때 나는 안개 짙은 저수지로 걸어 들어가려 할 때, 마치 의자 손잡이에 붙들린 것처럼 엉덩이를 들어 디딤 발에 힘을 주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투두둑 떨어져 내리며 내가 내가 아닌 듯 왜 울지? 하는 의문이 드는데도 눈물은 마치 비처럼 투두둑 하고 떨어져 내렸을 때…. 언젠가 아무개는 둘째를 재우고 더는 사는 게 힘에 겨워 수면제를 털어 넣었다가 순간 영원히 들어가야 할 지옥이 무서워서 억지로 손가락을 쑤셔 넣고 토해내다 잠들어 응급실에서 깨어났다고 하던데…. 더는 어쩔 수 없는 어느 순간을 맞닥뜨리고서야 아-, 주님- 하고 외치게 되는 비명 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오늘 에돔에 대한 말씀에서 왜 나는 자꾸 예전의 나를 비추게 되는 것일까? 유난히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적 행위에 사로잡혔던 나라(1-9),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지배하려던 에돔에 대하여(10-15), 본문은 평화에 대한 예언이 에돔의 멸망으로 실제적인 것을 알린다. ‘나의 에돔’, 내가 에돔이었던 그 시절이 너무 길었을까? 아무개가 그때의 일을 말하며, 사는 게 지옥 같아서 죽으려고 수면제를 털어 넣은 것인데 순간 주일학교 때 선생님한테 들었던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이 목구멍에 걸린 것 같더니 순간 영원히 들어가야 한다는 지옥이 너무 끔찍하게 무서웠어요! 하는 그 말에 나 역시 그러했던가? 사느니 죽는 게 더 낫겠다 여겨 안개 짙은 그 속으로 들어가려는데, 어떤 힘이 또는 두려움이 내 손을 붙들고 놓지 않을 때의 당혹스러움을 나는 안다.
하나님은 우리가 딛고 산다고 살던 땅을 황무케 하심으로 우리 안의 참 평화, 잃어버리고 살았던 자유를 순간 그리워하게 하신다. 오늘 본문에서 특별히 독립적으로 읽히는 네 가지 진술,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세일 산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손을 네 위에 펴서 네가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할지라(3).”와 같이 5-9절, 10-13절, 그리고 14절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온 땅이 즐거워할 때에 내가 너를 황폐하게 하되”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진술 앞에서 순간 아차, 싶은 어떤 느낌. ‘땅의 황무함에 대한 선언적인 진술(3)’에서 나의 날들이 어떠했는지를, 내 안의 어떤 적대감에 짓눌려 살았던 날(5-9)의 고통스러웠던 기억. 질투였는지 자격지심이었는지 알 수 없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절망(10-13), 그렇듯 내 곁의 믿는 자들이 기뻐할 때 나는 소외된 것 같았던 외로움(14절). 말씀이 마치 나를 겨냥하고 있는 듯 하다가도 이 모든 이야기가 결국 가리키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임을 알게 된다.
“내가 네 성읍들을 무너뜨리며 네가 황폐하게 되리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4).”
“너를 영원히 황폐하게 하여 네 성읍들에 다시는 거주하는 자가 없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9).”
“그러므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그들을 미워하여 노하며 질투한 대로 내가 네게 행하여 너를 심판할 때에 그들이 나를 알게 하리라(11).”
“이스라엘 족속의 기업이 황폐하므로 네가 즐거워한 것 같이 내가 너를 황폐하게 하리라 세일 산아 너와 에돔 온 땅이 황폐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무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15).”
그러므로 나는 죽어 내가 살았다는 바울의 고백 가운데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말씀에서 안도하게 되는 오늘의 내가 지난날의 나를 관전하는 것 같다.
하나님은 결국 나를 황무케 하심으로, “네가 말하기를 이 두 민족과 두 땅은 다 내 것이며 내 기업이 되리라 하였도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셨느니라(10절).” 나의 겉사람도 나의 속사람도 궁극적으로는 모두 하나님의 것인 것을 이제는 안다. 그때의 나, 황폐하여 더는 가망이 없을 것 같은 영혼으로 살고자 할 때 나를 죽이시더니 그리하여 죽으려고 하자 비로소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신 이유,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9).” 아, 주가 날 위하여 행하신 그 사랑이 ‘나의 에돔’을 멸하시고 ‘내 안의 이스라엘’을 살아나게 하신 거였다.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관계이면서 동시에 둘 다 하나님의 것임을 알게 하시려고, ‘에돔’을 대적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속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에돔’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있는 상황인데, ‘에돔’에 대한 예언의 말씀은 다소 생뚱맞기도 하다. 죽어라 살려고 할 때는 죽을 것 같더니, 죽고자 하자 비로소 살게 하심으로 우리 안에 소망이 있었음을 알게 하신 것. 결국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주권을 확인할 수 있도록, 기어이 ‘탕자’를 돼지우리에까지 놓아두셨던 아버지. 거기에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자 기꺼이 달려 나와 먼저 안고 반갑게 맞아주셨던 아버지….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 15:20-22).”
그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셨을까? 그러하기까지 참고 또 숨을 죽이며 지켜보고 계셨을… 돌아와 나는 울었다. 가족들 앞에서 울고 우린 그날부터 가정예배를 드렸다. 새벽에 깨워 교회로 달려가게 하셨는데, 나는 매일 아침 울었다. 어느 날은 나를 용서하신 것에 염치가 없어 울고, 어떤 날은 스스로도 용서가 안 돼 울고… 그리고 어슴푸레 날이 밝아 집으로 돌아올 때면 내가 왜 울었는지, 알 수 없어서 또 울고. 울다 울다 나중에는 웃음이 나와서 또 울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126:5-6).
더는 갚을 길이 없어 울다 웃는다. 오늘 본문에서 ‘에돔’을 의인화하고, ‘세일 산’을 인격적인 대상으로 표현하는 대목에서 나는 나의 날들을 돌아보게 된 것일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세일 산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손을 네 위에 펴서 네가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할지라(3절).” 본래 야곱은 에서였다. 둘은 같은 뱃속에 있었고 둘 다 그토록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였다. 에서는 장자인 것을 자부하며 자신의 힘으로 얻으려 하였고, 야곱은 확정된 사랑으로 얼결에 받았다. ‘에서’의 적대감을 나는 안타까워한다. 상대적으로 야곱의 일방적인 은혜가 불공평하게도 여겨진다. “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 내어 울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창 27:34).”
나로 ‘에서’ 그대로 두셨다면 나 역시 오늘 ‘에돔’의 심판이 마땅하지 않았을까? 오늘 에돔이 받는 심판의 모습들은 이미 에돔이 이스라엘에게 행했던 죄악과 동일하다. 에돔은 이스라엘에게 피를 흘리게 하였으므로 동일하게 피흘림을 당하고(6), 거민들을 죽여 여러 곳에 흩어 놓았기 때문에 동일하게 살육을 당할 것이며(7, 8), 성읍을 훼파하였기 때문에 성읍이 파괴당하는 것이다(9).
이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행한 대로 보응을 받게 된다는 말씀을 이루심인데,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이에 앞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를 불가항력적으로 붙들고 이끌어 내셨던 주의 인자하심 앞에서 울었다. 그 은혜가 너무 커서,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하네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당했네
나를 구원하실 이 예수 밖에 없네
(새찬송가 544장 1절)
예수밖에 없다는, 힘써도 못하고, 참아도 못하지만, 믿으면 된다는 찬양을 가만히 흥얼거리며 이 시간 묵상글을 쓰고 있다는 것에 놀란다! 이렇게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하는 가사에 맞게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3-14).”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셨다는 사실, 오늘 10절, “네가 말하기를 이 두 민족과 두 땅은 다 내 것이며 내 기업이 되리라 하였도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셨느니라.” 하시는 것과 같이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때론 너무 뻔뻔하고 염치없는 것 같지만 은혜 앞에서 누구라도 송구하고 민망하지 않을까?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91:1-3).
누가 뭐래도 그게 나였다는 것에서,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4-6).
그리하여,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7).
아, 이 놀라운. 감출 수도 숨길 수도 없는 주의 사랑 앞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
(14-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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