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전봉석 2024. 1. 24. 04:1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요 13:20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시 106:14-15

 

 

어떤 기도응답에 있어 그것을 복이라 할 수 있을지, 차라리 들어주지 않으시는 게 복일는지 우리는 그때에 분별하기 어렵다. 오히려 ‘요구한 것을 주셨지만 그 영혼은 쇠약해지는 결과’의 것도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하실 때에 우리로 먼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하고 이르셨음을 안다.

 

곧 우리의 ‘먼저와 나중’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때가 있다. 가령 나는 자주 여호수아를 생각한다. 저는 이제 명령에 따라 요단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할 때 요단강을 먼저 마르게 해주시면 건널 것인데, 그 시기는 하필 범람하여 물이 깊을 때였다. 하나님은 그 물을 딛고 설 때 물이 마를 것을 알리시고, 우리는 속내가 먼저 거두심으로 마른 땅을 딛고 건너겠다고 한다. ‘나의 먼저’와 ‘하나님의 먼저’가 충돌할 때가 있다.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우리의 바람은 우선하는 게 급선무일 때가 있다.

 

하여 이를 들어주시는 것을 무작정 응답 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 발람이 발락의 요구에 결국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고자 떠난 일도 결국은 가라 하셨으니 간 것이라 할 수 있겠으나… 히스기야가 죽을병에 걸려 기도하였을 때 저의 생명이 연장된 것으로 후에 자행한 저의 일과 므낫세를 낳은 것을 생각하면 결국 그의 기도응답이 정녕 주의 뜻에 합한 것이었는지… 우리의 구함과 찾음과 두드림이 자칫 우리 영혼을 더 쇠약하게 할 수 있음을.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시 106:14-15).

 

우리의 장래는 이 땅에 있지 않다. 우리에게는 돌아가야 할 본향이 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인생을 나그네로 묘사하는데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창 47:9).” 또한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1:17, 2:11).” 하고 베드로는 주의를 당부하였다. 고작 우리 인생이란,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90:10, 12).

 

그럼에도 그저 당장 지금의 필요를 구하고, 그에 따른 응답으로 만족하면서 산다. “또한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정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니라(전 12:5).” 순간 돌아보니 내가 어느새 중년이 되었고 곧 노년에 이를 것으로 몸은 이를 마중하고 나섰다. 이틀 걸러 하루가 아플 때도 있어 때로는 이제 내 몸 하나 건사하는 일에서도 ‘메뚜기도 짐이 되고 정욕이 그쳤다.’ 그럼에도 소망은 우리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어서,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5-16).”

 

내가 가야 하는 나라, 저 본향을 그리며 살 때 이 땅의 것은 그다지 목숨 걸고 붙들 게 없다. 그런 가운데 우린 저마다 감정으로 휘둘리기 마련이어서 마치 당장은 호언장담하며 스스로를 속이는 게 일이어서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하고 자신하였다(37).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 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8).” 절대 그럴 리 없다던 길에서 우리는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 곧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 곧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 37).”

 

무엇도 우리 스스로는 자신할 수 없으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나의 겉사람은 죽고 나의 속사람은 산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를 알 때에 하나님의 섭리, 그 뜻하신 바를 묵상하며 주의 선하심을 신뢰한다. 설령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고, 죽이신다 해도 우리로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주셨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나는 누구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고 오늘 저가 붙들고 씨름하는 것의 덧없음에 대하여 말해주고 싶었다. 올 것 같더니 오지 않았고 이어 아무런 연락도 없어서 나는 그냥 두었다. 결국은 어쩔 수 없는 일에 있어서는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과 같이 갈 데까지 가 봐야 할 일이다. 결코 누구 말도 듣지 않을 때는 별 수 없다. 그런 거 보면 나로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맡기신다. 육신의 약함도, 누구로 인한 마음씀도, 그 일로 어려워하는 데서 기도하는 정도도… 어찌 내가 주의 뜻을 다 알 수 있을까?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

 

말씀으로 이끄시는 하루의 날들로 족하였다. 어떤 일로 마음이 어려울 때나 사람에 대한 환멸까지도 더는 그것으로 실족하지 않게 하심으로,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욥 11:7).” 그러니까 말이다. 어떤 일이 그리 될 때는 모두 그에 따른 주의 뜻이 있고, 그의 선하심을 신뢰함으로 견디게 하시는 일이었으니…. 동생의 최종 재판이 이 달 말에서 다시 내달 뒤로 연기되었다. 인사이동기간이라 재판부가 바뀌게 된 까닭이라는데, 하필 고소하였던 이는 조급했던지 구구절절 마지막 탄원서를 제출했고, 그에 따른 반박을 조목조목 짚어서 저의 주장이 바뀌고 심지어 다른 이에 대한 무고한 억지까지 반박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우린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로 그 장래 일을 알지 못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3-14).”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시려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 그 이상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알게 될 것이다. 하여,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누구보다 내가 나를 아는 터라, 나는 오늘도 눈을 뜨고 조금 이른 시간이었으나 도로 눕지 않고 교회로 올라왔다. 곧 나는 나를 신뢰하지 않음으로 주의 도우심을 더욱 바란다. 어떤 마음에 대해 섣불리 속단하고 원칙을 주장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니 저의 심정은 또 오죽하겠나? 하는 생각으로 참고 기다린다. 서로 얼굴을 붉혀 옳고 그름을 따지다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삼지나 않을까하여, 아내를 다독이고 나의 마음을 다스리기도 한다. 이를 두고 기도한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5-27).” 이를 위해 주님이 본을 보이셨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3-15).”

 

우리가 서로를 섬긴다는 것은 주를 따르는 일인데,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저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한낱 흙으로 지으심을 받은 짐승과 같다. 짐승과 다른 것은 우리 안에 생기를 불어 생령이 되게 하심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그러므로 이를 상실하고 살 때 서로가 다 사람이라 하나 짐승과 다를 바 없고, 더욱 더 교묘하여 악에 악을 더하고, 거짓에 거짓을 더하기 일쑤이다. 이에,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사 5:18-19).” 스스로 옳다 여기는 데 함몰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이에 동조하며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0).”

 

두려운 일은 이 땅에서의 결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차라리 죽음으로 모든 게 끝이라면 다행일 텐데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계 14:11).” 그 밤낮이 영원함일 텐데… 나는 그 끝없음이 두렵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12).” 하여 오늘도 굳이 억울함을 대신하려 앙갚음하지 않고 주께 맡긴다. 원칙을 운운하며 옳고 그름을 따져 상대를 공격하지 않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 13:16-17).”

 

한 날을 살면서 주를 인정하는 일, 전화 통화로나마 성경공부를 하고 저로 더욱 주를 알고자 하는 마음에 힘을 더한다. 아이가 찾아오면 마다하지 않고 같이 점심을 먹고 아이의 이런저런 말을 들어준다. 누구의 일을 두고 마음에 담아 그 답답함으로 주께 호소한다. 그리하여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18).” 주님의 모든 선택은 말씀을 응하심이었고, 심지어는 자신을 팔 자에게도 알리시어 혹시나 저로 그 죄를 피할 수 있게 하려 하셨음이니.

 

오늘 이처럼 말씀 앞에 먼저 나를 앉게 하심도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19).” 하여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이를 순종함은 이 땅에서의 순탄한 삶이 목적은 아니라는 것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20).”

 

그럼에도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30).” 아,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한 일이었으나 오히려 주의 영광은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31).” 곧 저가 행할 일로 주의 구속사역은 진행되는 바,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32).” 나는 이에 따른 말씀의 앞섬과 그 진행과정에서 오늘의 나를 본다. 내가 누구를 생각함은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내 안에 두시는 저에 대한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나를 주의 하여 삼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살피게 하심이었다. 그러므로,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누가 능히 여호와의 권능을 다 말하며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다 선포하랴

(106:1-2).

 

우린 누구도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측량할 수 없으니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구하노라, 이 아침에도 나는 구하고 또 바란다. 행여,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15).

 

아, 이 불행한 일을 두려워하다

 

그들을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

(46).

 

고로,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4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