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전봉석 2024. 1. 26. 06:0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요 15:16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시 108:13

 

 

가끔씩 두려운 것은 누가 나를 속이거나 대적하려 할 때이다. 그것은 내가 옳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나는 주의 보호하심 아래 있기 때문이다. 하여 나 또한 누구와 척을 지려할 때 주의한다. 행여 나의 생각과 말이 저에게 저주가 될까 하여서 말이다. 이는 내가 나를 특별한 자로 여겨서가 아니라 주께서 나를 항상 특별히 다루시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원리가 그러하다.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선민을 상징하나 모든 믿는 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사 5:1-2).” 곧 하나님은 교회를 피 값으로 사셨고 우리를 주의 자녀로 삼으셨다. 그런데 “많은 목자가 내 포도원을 헐며 내 몫을 짓밟아서 내가 기뻐하는 땅을 황무지로 만들었도다(렘 12:10).”

 

이를 바로잡고 온전히 하는 데 있어 하나님은 가차 없으시다. 그 아들까지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바, 일찍이 나는 어려서부터 주의 종을 향하여 공격하거나 불순할 때 뒤미처 찾아오는 어떤 뜻하지 않은 일을 자주 목격하였다. 것도 그럴 것이 내가 선택한 게 아니다. 오히려 이 길을 피하려 그리 멀리 떠났다고 하였는데 때가 이르면서 하나님의 강권하심은 ‘죽여서라도 살리시는’ 것이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그러므로 믿는 자의 삶은 스스로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이는 매우 두려운 일로 누구를 두고 생각할 때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하여서는 자칫 그것으로 화가 될 수 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사 53:11).”

 

가령 가까이서 늘 보고 자랐던 친구 사이에서 내가 주의 길을 가게 되면서 저들이 꺼려하거나 어려워하는 것을 본다. 심지어 전혀 그럴 사이가 아닌데 누구는 선뜻 학비를 내주었고, 나의 생활을 돌보기도 하였다. 말이나 행동에서는 물론 저들도 은연중에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롬 7:4).”

 

나 역시 신기하고 다들 어려워하는 일은 이렇게 해서 어찌 교회가 유지되고 나의 생활이 되겠나 싶은데, 글방에서 예배가 드려지고 교회로 지나오면서 한 번도 월세를 밀린 적 없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두고 걱정한 적이 없다. 주가 돌보심은 주의 사람에 대한 주의 절대적인 행사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하신 말씀이 두려울 정도로 가깝다. 이를 알면서부터 나는 가벼이도 누구와 감정이 상하는 것을 극도로 주의한다. 함부로 저를 탓하거나 원망하려 하지 않는다. 누구를 만나거나 어디를 가면 그곳을 위해 복을 빈다. 주의 인자하심을 구한다.

 

누구와의 대화에서 나는 저들에게 이와 같은 저들의 신분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다. 곧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15:16).” 하면 오늘의 그런저런 무책임과 무기력함은 곧 하나님께 대한 거역이고 불순종이다. 아직도 그 안에 어릴 적 부모에 대한 어떤 서러움을 품고 있으니까… 나는 저이의 말을 듣다 소름이 돋은 것도 그 때문이다. 거짓말처럼 양가 어른들 내외와 그들 각자의 생활이 피폐하였다. 심지어 저들과 얽힌 인친척 모든 관계들마저 저주 아래 있는 것처럼 말이 아니었다. 집집마다 모든 종교가 다 섞여 있는 것은 다반사이고, 서로가 원수보다 못한 사이로 헐뜯는 관계 또한 예사였다.

 

듣다보니 저의 마음에 여전히 그 부모를 용서하지 못한 게 있고, 심지어 자신의 문제를 저들 때문이라 여겨 여전히 서러워하고 억울해하고 있었다. 하나님께 저주 받은 운명이란 두려운 것이다. 오늘 2절,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이에 가차 없음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그 쓰임에 다하지 못할 때 용서 없는 버려짐은 당연하였다. 고로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마 7:18-19).”

 

97학번으로 신학을 다시 하게 된 것도 전적인 누군가의 권유 때문이었다. 저는 내게 심지어 자신이 모든 학비와 책값 등을 제공하는 데 있어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하였다. 돌아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데 있어 타종교인이면서도 나로 하여금 신학을 하게하고 그 어떤 어려움 없이 그 길를 갈 수 있도록 저를 강권하심이었다. 당시 매학기 2, 3백 이상의 등록금과 책값을 부쳐왔고 그 일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 먼저 행하는 데 있어 그때도 의아해했다. 종종 찾아와 안부를 묻고 별도의 생활비도 주었지만 그때 처가 쪽 누가 돌아가셨나 했는데, 저가 그 장례식장까지 와서 문상을 하고 적잖은 돈을 주고 가기도 했다.

 

일련의 예를 들어도 그렇고 어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이한 일은 다반사다. 이는 결국 나 때문이 아니라 나로 ‘자기 것’을 삼으신 이의 손길인 것을 한 해 한 해 더욱 실감할 수 있다. 가끔은 저가 내게 뭘 그렇게까지 하나싶어서 민망할 때도 있는데, 실은 내가 두려워할 일이었다. 오늘 본문을 그렇게 읽는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3-4).” 주가 내 안에, 내가 주 안에 거한다는 것은 내가 누구를 상대하는 일이나 의식하고 생각하는 일을 주가 하신다는 것이다. 가끔은 내가 저 때문에 왜 이처럼 볶이듯 괴로운가 하고 보면, 주가 나로 행하게 하심이었다.

 

특히 요즘은 말로 누구를 권면하거나 성경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때마다 주가 내 입에 넣으시는 말이나 이해가 놀랍다. 가령 어제도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그 잠깐을 성경공부 하는데, 내가 미리 준비하지 못한 본문이었다. 이를 설명하고 저의 일상의 것으로 풀어 연관 지을 때 저는 진지하였고 나는 신중하였다. 이걸 어찌 설명하기가 쉽지 않는데 우린 그저 같이 자란 친구다. 평소 욕지기와 농담이 어울리는 사이다. 그런데 나를 대하는 저나, 저를 대하는 나나 서로는 사뭇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진지하였고 나 역시 내가 미처 알지 못하고 있던 말이나 어떤 설명을 예로 들 때는 말하는 나와 듣는 나가 서로 분리된 듯한 느낌도 든다. 이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5).”

 

내가 주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 오늘 이처럼 이 자리를 지키는 게 내 일이라 나는 가끔 놀라기도 한다. 내가 아는 나라면 소위 이처럼 아무 것도 안 하는 듯, 아무 데도 안 가고, 아무도 안 만나면서 이러고 있을 내가 아니다. 그러지 못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

 

그렇다고 나는 결코 신비주의자가 아니다. 이상론자도 아니다. 오래도록 나는 아이들 논술을 가르쳤고, 이는 타당성과 합리성이 몸에 밴 사람이다. 논리적이며 이성적이라 나는 솔직히 방언도 할 줄 모르고 어떤 은사에 대해 무분별하지도 않다. 지금도 나는 또박또박 아뢰고 심지어는 누구를 두고 기도문을 쓰기도 한다. 그럼에도 내가 아는 어떤, 그 이상의 어떤 일들 사이에서 나는 주만 바란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 어떤 일로 누구에게 척을 지고, 감정이 생기는 것을 피하는 이유는 행여 저로 화가 될까 하여 두렵다.

 

결국 오늘 본문처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6-7).” 이와 같은 말씀이 실제 삶으로 느껴져 누구를 생각하고 대하는 일에 있어 주의하게 되는 것이다. 하여 주님도 당부하시길,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9).” 곧 내가 주의 사랑 안에 거하지 않을 때, 그렇게 못하게 모든 것을 제거하심이다. 이는 경고가 아니라 축복이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11).”

 

늘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어느 순간 이후 먹고 사는 문제에서 내 몸의 이런저런 연약함에서도 놓였다. 모든 것이 적당하여서 그리 감당할 수 있게 하시는 주의 은총을 확신한다. 역으로 어떤 일에, 누구에 대하여 함부로 생각하지도 않을 것은 자칫 그로 인하여 저에게 끼칠 화가 있을 것을 염려해서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4).” 어느 순간부터 아주 사소한 일에까지 주께 아뢰고 고하면서 미주알고주알 수다 떠는 친구 사이처럼 아뢴다. 아뢰다 보니 더러는 지금의 현상 그 너머의 일을 두고 두려워하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어느 가정의 그 아이를 두고 생각하고, 저를 위해 그 부모에게 혹은 누구에게 이를 때 나의 간절함이 때로는 낯설다. 한데 이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16).” 오늘 이 말씀으로 그 의문이 풀린다. 내 마음이 아니었다. 나의 관심과 사랑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쓰이고 생각이 머무는 것이었다. 더하여 어떤 일이나 사람에 대해서는 그렇게 죽을 것처럼 마음이 가다 어느 순간 사라진 듯 조용해진다. 죽고 못 살 것처럼 귀히 여기던 사람이고 그 일이었는데, 순간 고요한 적막처럼 아무 느낌도 없이 말이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17).”

 

무엇을 구할 때 혹은 위하여 기도할 때 신중한 것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곧 누가 어떠할 때, 저러면 안 되는데… 싶은, 어떤 안타까움이 두려움으로 번진다. 교회를 상대하고 하나님께 행하는 일일진대 저의 무책임함이나 무례함이 나를 두렵게 한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이를 알면 알수록 나는 주 앞에서 근신한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보다 높으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

(시 108:1, 4).

 

우리가 주를 믿는다고 하는 일을 너무 소홀히 생각할 때 주 앞에 다시 세우신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한다고 하면서 저주 아래 사는 사람들의 무지함이 나는 두렵다. 곧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19:8).

 

이에,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108: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