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삿 11:31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시 46:10
18년 동안 계속된 암몬의 압제로 인해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과정을 보았다(10:6-16). 그리고 다시 암몬이 길르앗에 침입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입다를 세우셨다. 저는 기생의 아들로 본처의 형제들에게 쫓겨나 이방 땅 돕에 거하였다.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찾아와 요청한다. 암몬의 압제로부터 해방되길 원한다(1-11). 이에 입다가 암몬 왕과 논쟁을 벌인다(12-28). 입다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만큼 신앙 교육을 잘 받았던 것이다. 결국 전투에 앞서 입다는 경솔한 서원을 한다(29-40).
섣불리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데 있어 사람을 약속하였다가 자신의 딸이 그에 해당되는 일은 끔찍하다. 하긴 다윗도 위대한 왕이었으나 그만큼 하나님 앞에 신실하였던 사람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것은 결코 우발적이지 않다. 우리의 본성은 자칫 이러한 실수 아닌 죄악에 사로잡힐 수 있다. 죄는 늘 도사리고 틈이 나면 금세 그 본색을 드러낸다. 그래서 C. S. 루이스는 죄를 가면을 쓴 악이라 하였고, 고통은 가면을 벗은 악이라고 하였다.
성경은 인물을 영웅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누구도 죄가 없다 할 수 없다. 우리는 누구라도 넘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며 그때마다 바로잡으신다. 오늘 여기 입다는 출생이 매우 비천하여 이방의 땅 돕에서 잡류들과 어울리며 생활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이 세우시고 사사로 삼으셨다. 입다는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대적 암몬을 물리쳤다. 그런 가운데 섣불리 서원하여 무남독려 외동딸을 제물로 바쳐야 했다.
결국 우리의 논리는 언제나 순리를 따르기보다 역리를 취한다. 그것은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 1:25).” 이와 같은 속성으로 인하여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26).” 죄를 숨기고 살다 고통을 당한다.
앞서 입다는 암몬과 대화로 풀려했다. 힘의 논리에 따른 극단적인 선택이 폭력이고 그에 따른 결과가 전쟁인 것을 감안하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저마다 일촉즉발의 위기 가운데 언제 멸망해도 이상할 게 없다. 세상의 속성이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으로 죄란 곧 결핍의 산물이란 것을 증명한다. 하나님과 함께 누리던 쉼을 잃고 에덴에서 쫓겨나게 된 것도 실은 하나님을 대신하려 했던 마음으로 인한 것이다. 이후 첫 번째 형제 사이는 살인으로 얼룩진 것도 숨겨진 악의 산물이다. 이에,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시 120:7).
그런 거 보면 모두가 그 속에 화가 가득한 것 같다. 겉으로 멀쩡하던 사람이 언제 돌변하여 기괴한 짓을 할지 모른다. 좋을 때나 좋은 사이라고 돌아서면 헐뜯고 그동안의 고마움은 졸지에 공격의 빌미가 되기 일쑤다. 이에 예수님은 이르시되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그만큼 자신의 화를 누르고 서로가 화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9).”
우리는 할 수 없음으로 악이 악을 죄가 그 꼬리를 물고 악순환은 거듭되는 것이고 이를 끊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를 나의 주로 모시고 사는 길뿐이다. 그러므로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1-12).” 오늘도 이처럼 주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것이 복이다. 나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하심이 은혜이다.
하여 우리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빌 3:14-15).” 이에 오늘 내게 주신 이 마음,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이 기회를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호시탐탐 사탄은 기회를 노린다. 하나를 허용하면 둘을 요구한다. 에이 설마, 하고 엉거주춤할 때 우리 안에 눌러앉으려 한다.
오늘 입다는 확신하였다. “네 신 그모스가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한 것을 네가 차지하지 아니하겠느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서 어떤 사람이든지 쫓아내시면 그것을 우리가 차지하리라(삿 11:24).” 이와 같은 사실을 붙들 때 물러서지 않는다. 하여 성경은 우리로 굳게 잡으라고 이르신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계 2:25-26).” 이는 곧 있어 이루어질 일로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3:11).”
붙들어야 하고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에 더욱 주 앞에 호소한다. “원하건대 심판하시는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삿 11:27).” 하는 입다의 기도는 정당하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시다. 하나님이 내 편이 되길 기도하는 것과 내가 하나님 편임을 명심하는 일은 동시에 필요하다.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
(56:9).
이와 같이 우리의 기도는 정당하여서,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118:6).
오늘의 여러 사정과 그에 따른 여파를 두고 우리는 중심을 잃지 않는다. 성령은 우리로 주의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신다. 오늘 본문 29절에서도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하고 그 위상을 분명히 한다. 입다가 입다의 기질과 능력으로 주의 성전에 참여한 게 아니다. 모든 사사의 경우가 그러하고 주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그때마다 “주의 영이 임하심으로,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3:10).” 주가 이루신다.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또 주의 선한 영을 주사 그들을 가르치시며 주의 만나가 그들의 입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그들의 목마름을 인하여 그들에게 물을 주어 사십 년 동안 들에서 기르시되 부족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사오며(느 9:20-21).”
오늘까지 사는 동안 주가 어찌 나를 도우시고 함께 하셨는가를 나는 경험으로 생생하게 안다. 내 삶의 증거가 있다. 어쩌다 우연이라 하기에는 너무 확실하여서 부정할 수 없다. 신학을 하게 하시는 것에서도 87학번으로 다른 대학을 간 것인데, 97학번으로 도로 신학을 하게 하시더니 그때도 마다하고 신대원을 포기하였는데, 09학년으로 다시 불러다 세우시기까지… 그때마다 돕는 손길을 세우심으로 강권하여 학비를 책임지셨고, 나의 생계를 주관하셨다. 두 아이를 주가 키우셨고, 곁의 모든 사람과 사건과 역사를 그리로 모아가셨다.
나는 이를 자주 떠올리고 되새긴다. 더 일찍이 아주 어릴 적 나의 부친으로 그렇듯 강권하여 주의 길에 세우셨던 것처럼 나의 형제들도 그리 불러 주의 사명을 맡기셨다. 그런 가운데 나는 끝까지 그릇된 길로 가듯이 거역하며 살았던 것인데, 느헤미야의 증언처럼, “또 주의 선한 영을 주사… 가르치시며 주의 만나가… 입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목마름을 인하여 물을 주어” 여기까지 오게 하셨음을 부인할 수 없다.
주의 영이 그리하신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사 11:2-3).” 그렇게 나는 오늘도 이처럼 주 앞에 섰다. 나의 날들이 나의 증거다. 오늘 입다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심으로 저가 주의 일에 참여하였다.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고로 우리 가는 길은 주가 이끄신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욜 2:28-30).”
그리하여 내가 보는 것은 내 곁의 모든 사람들이 들을 것이고, 내가 들은 것을 모두가 볼 것이다. 그런데 오늘 입다는 성급했다. 실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경솔했고, 경솔하였다고 하기에는 악하다. 서원이 기도 응답의 조건이 아닌데, 저는 감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신 사람을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제물로 바치겠다고 서원하였다. 이 얼마나 끔찍하고 사악한 약속인지… 그만큼 승리를 확신해서 그랬는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담보로 하려고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도 가끔은 그와 같은 서원을 남모르게 속으로 하곤 한다. 마치 우리의 서원이 기도응답의 조건이나 되는 것처럼 말이다.
다급하고 간절할 때, 하나님이 이를 들어주시면 내가 무얼 바치거나 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하는 짓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이 우리의 어떤 조건과 무슨 선행의 결과가 아니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145:9).
그런데 종종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옹졸한 대상으로 여기는 듯 자신의 무엇을 조건으로 내걸고는 한다. 우리는 다만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주의 긍휼하심으로 오늘 여기에 있다. 나의 어떤 선행이나 남다른 성의를 보고 주의 사랑이 임하신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전혀 그럴 자격도 염치도 없는 나인데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은혜를 고마워하며 눈물겹다.
하나님은 우리의 무지한 종교적 신념이니 이상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요즘 특히 정치적인 일에 교회가 나서고 간간히 들리는 설교인지 연설에서 어떤 조건적인 상황을 설정하여 하나님을 운운하는 것을 들을 때면 오금이 저린다. 어찌 하나님의 역사를 이처럼 만홀히 여기는가 하고 놀라기도 한다. 섣부른 우리의 약속이 우리의 불행이 된다. 오늘 입다의 서원이 그 증거다.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삿 11:34).”
저도 그럴 줄 알았겠나? 하나님이 언제 그것을 요구하셨던가? 가령 바울의 열심은 다만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8-29).”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오늘도 주 앞에 올라왔다. 결국,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118:7).
하나님은 내 편이시고 나는 하나님과 같은 편이다. 입다의 어릴 적 환경 때문이었을까? 그의 성장 과정과 그에 따른 불행 때문이었을까? 기생의 몸에서 태어났고, 배다른 형제들에게 쫓겨나 고향을 떠나 이방 땅 돕에서 사는 동안 저의 하나님은 그렇듯 조건부적인 대상이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말씀을 보다, 자기 나름의 평화적인 방법을 모색하였던 것을. 암몬을 설득하여 논쟁하였던 것을. 결국 죄와는 타협의 여지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1-12).”
비록 입다가 성급한 서원으로 승리의 기쁨이 애곡이 되는 것을 보지만, 그럼에도 입다와 그의 딸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켰다는 것에 놀란다. 입다는 자신의 성급했던 서원이라 해도 이를 저버릴 수 없었다. 그 어떤 고통과 비교할 수 없었겠지만 이를 감내하고 하나님 앞에 그 신앙을 지켰다. 이에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3-24).”
현실은 비극적인 것 같아도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무모하게 버려두지 않으신다. 지혜자는 이르길, “함부로 이 물건은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덫이 되느니라(잠 20:25).” 그러므로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전 5:4).” 곧 “지식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잘못 가느니라(잠 19:2).” 그런 가운데 우리는 오늘도 주 앞에서 위로를 받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46:1-3).
천지개벽을 한다 해도 우리는 결국 주의 사랑으로,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10-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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