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전봉석 2025. 2. 27. 04:4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삿 10:15-16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시 45:6

 

 

악은 항상 부지런하다. 죄는 언제나 재빠르다. 언제 그랬나 싶게 내 안에 죄가 늘 잰걸음으로 움직인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먹은 게 무색하게 악한 생각이나 말은 늘 한 발 앞선다. 우리의 삶이란 ‘사사시대’와 같이 그 죄악이 늘 반복된다. 마치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22).” 하심이 우리 생활에 연속적으로 나타난다.

 

오늘도 돌라와 야일 두 사사의 활약이 무색하게 이스라엘은 악으로 돌아갔다. 죄가 늘 그 가운데 머문다. ‘부아의 아들 돌라’라 설명하는데, ‘부아’는 입 또는 말(言)이란 뜻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 ‘돌라’는 곤충 또는 벌레란 뜻이다. 저들은 이스라엘의 소사사(小士師)로 분류한다. 돌라와 그의 아비 부아의 행적이 성경에 달리 언급된 것이 없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하심인데, 돌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어떤 대적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했는지, 본문에는 아무 언급이 없다. 에브라임 산지 사밀을 지칭하는 데 있어 ‘에브라임 산지’를 덧붙인 것은 ‘유다 산지 사밀’과 구별하기 위한 것 같다. 돌라가 자기 기업의 땅을 떠나 에브라임 지파의 땅에 우거했음을 나타낸다.

 

‘그 후에’ 돌라를 이어 야일이 사사가 되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성경에 기록이 없다. 또한 시대를 추측하기 어렵다. 시간적으로도 얼마나 걸린 것인지 모른다. 다만 ‘길르앗 사람 야일’이다. 길르앗은 요단 동편이다. 거기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그 지역은 이스라엘이 시혼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에게 분배한 곳이다(수 32:33-42).

 

성경에 ‘길르앗 가족’에 대한 언급이 있다. “므낫세의 자손 중 마길에게서 난 자손은 마길 종족이라 마길이 길르앗을 낳았고 길르앗에게서 난 자손은 길르앗 종족이라(민 26:29).” 따라서 돌라를 이은 사사 야일은 길르앗 원주민이 아니라, 므낫세 지파 출신이다. 한편 야일 역시 돌라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소사사로 그의 행적에 대한 별다른 언급이 없다. 다만 그의 이름의 뜻은 ‘비추는 자’, ‘깨우치는 자’이다.

 

“그에게 아들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하는 데서 고대 근동 지방에서 나귀를 탄다는 것은 그 사람의 지위가 매우 높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니까 야일의 아들 30명이 각기 자기 소유의 어린 나귀를 타고 다녔다는 사실은 당시 야일이 사사로서 이스라엘 가운데 부와 명예를 얻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성읍 삼십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으로도 입증된다. ‘하봇야일’ 곧 야일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모세 당시 므낫세의 아들 야일이 길르앗의 촌락들을 점령한 뒤 그곳 성읍들에 붙인 새로운 이름이 하봇야일이다. “므낫세의 아들 야일은 가서 그 촌락들을 빼앗고 하봇야일이라 불렀으며(민32:41).” 따라서 사사 야일은 자기 선조 야일이 취하여 하봇야일이라 부른 그 성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내용 외에 별다른 상황 설명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 그들의 삶은 악을 행하고 죄 가운데 거하기를 밥 먹듯이 했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삿 10:6).” 하는 내용으로 늘 그렇듯 죄악은 부지런하다. 그럴 때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그들을 파시매(7).” 하나님의 진노가 이어진다.

 

우리는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복이 한정되고 일시적이라는 사실에 항상 목말라하는 것 같다. 사사가 세워지는 때는 그나마 일시적으로 평화가 깃든다. 그렇게 옷니엘에 의해 40년, 에훗에 의해 80년, 드보라에 의해 40년, 기드온에 의해 40년… 이와 같은 평화는 일시적으로 잠시 지속되다 다시 죄에 빠지기 일쑤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영구적이고 지속적인 평화를 갈망한다.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어제는 좀 괜찮다가 오늘은 어디가 힘든 육체의 여건과 같이 그때그때 다르다.

 

이에 예수님은 이르시되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곧 우리가 얻는 평화는 짧고 한정되나 주가 주시는 평안은 영원함을 앞서 다니엘이 예언한 바 있다.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 2:44).”

 

곧 오늘도 우리가 사모하는 평화는 영원한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이를 구할 수 없다. 잠시 맛보아 알 뿐이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4:8).

 

곧 우리가 사는 오늘은,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경배하여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사 2:8-9).” 우리의 현실이 때로는 엄혹하다. 이는 우리가 스스로 자처하는 일로 “너를 위하여 네가 만든 네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네가 환난을 당할 때에 구원할 수 있으면 일어날 것이니라 유다여 너의 신들이 너의 성읍 수와 같도다(렘 2:28).” 그리하여 우리의 악은 부지런하고 우리의 죄는 항상 잰걸음으로 달려온다.

 

결국 하나님을 저버릴 때면 우리 삶에 곤고함이 찾아든다. “암몬 자손이 또 요단을 건너서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과 싸우므로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삿 10:9).” 오늘 본문은 두 사사가 소개 되고는 있지만 이는 일시적일 뿐, 우리의 선택은 여전히 스스로 섬길 신을 두고 하나님을 뒤로 미루는 것이다. 누구는 돈과 명예를 좇고, 누구는 자신의 행복을 희구하느라 신앙은 마음의 위안을 위한 종교 하나쯤으로나 두고 이를 우선하지는 않는다. 그럴 때 오늘 말씀이 들려주는 것은 우리 삶의 황폐함과 곤고함으로 힘에 겨운 것이다.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하니(수 24:20).”

 

오늘을 사는 데 있어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모든 게 다 우상이다. 그럴 때면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뒤로 하고 우선하게 되는 것들이 우리를 따라잡는지 모른다. 순간적으로 모면하려 거짓을 말하거나 더 나은 어떤 결과를 위해 습관적으로 악을 도모할 때도 있다. 욱, 하고 올라올 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욕설이 터지거나 남을 비난하거나 몹쓸 생각이 삽시간에 우리의 감정을 치고 들 때도 허다하다. 그럴 때 우리가 흔히 극단적이라는 것은 이를 행동으로 옮겨 남을 해하거나 나를 불편하게 하는 무엇을 제거하려드는 것을 말한다. 일련의 계엄 내란이 그러하였다. 개개인으로는 그렇게 해서 약물중독, 알코올중독, 마약중독과 같이 그와 같은 행위에 묻혀 사는 것이다.

 

이는 이사야의 절규에서 분명해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4-6).”

 

이에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주 앞에 엎드려 구한다. ‘주의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삿 10:15).” 주께 기도하며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그러할 때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마음으로 근심하신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16).”

 

이와 같은 놀라운 사실에 감격한다. 나 같은 게 뭐라고 주가 그토록 마음을 쓰시는가? 이러한 고백은 주의 자녀들만이 할 수 있다. 그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자들’만이 한다. 곧 우리는 죄의 몸으로 살면서 나이 들고 병들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를 복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죄악 됨을 깨닫고 있음이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란 나의 요구로 하나님의 뜻을 바꾸려고 하다, 어느 순간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게 한다. 하여 고통 중에 욥은 아뢰기를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곧 죽을 것을 알면서도 주가 나를 죽이시나 나는 주를 신뢰함으로 아뢰는 일이다. 늘 우리의 회개는 때늦은 후회와 함께 찾아오지만, 그래서 악은 빠르고 회개는 늦은 것 같아도 진정한 회개의 마음으로 “오늘날 우리를 건져 내옵소서.” 하고 주께 구한다. 주의 뜻에 나를 맡길 때 고통도 감당할 수 있다.

 

하여,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지만 우리는 기어이 고통 중에나 주의 뜻을 구한다. 살만하고 적당할 때는 언제나 죄가 빠르다. 악은 항상 부지런하다. 틈만 노린다. 그래서 말씀은 일러,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하시는데, 번번이 우리는 죄에 걸려 넘어지고 나서야 아차, 싶은 것이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은 주 앞에 고하며 ‘하나님의 어떠한 처벌이든지 달게 받겠다’고 고백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뒤늦게 깨달았다. 적의 압제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다면 하나님의 그 어떤 처벌도 달게 받을 것을 말이다. 이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손 내미시며 이르시길,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바울은 이를 알았고,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딤전 4:10).” 하는 설교로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오늘 우리의 현실과 이 사회의 어지러운 대립과 반목을 바로 직시하게 한다. 곧 우리는 어찌됐든 하나님의 선민이다. 이방의 압제를 당하면서 사느니 하나님의 징계로 돌이켜 주 앞에 바로 서는 것이 복이다.

 

단지 이스라엘이 원수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자신들을 원수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심으로 자신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진 하나님의 이름이 다시 영광 받게 해달라는 간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진정한 회개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저 오늘의 문제를 해결 받고자 용서를 구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죽이신다 해도 그 하나님을 자신은 의뢰하겠다는 것이다. 단지 이 상황을 모면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나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진 것이 회복되기를….

 

오늘 우리 사회의 난국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는 데 따른 회개가 필요한 이유다. 사회란 그럴 수 있다. 서로 의견이 다르고 그것으로 대립하고 다투면서 투쟁하고 항변하여 서로가 더 나은 쪽으로 합일점을 찾아가는 게 민주주의다. 민주주의한 공산주의와 달리 단일화될 수 없고 획일화될 수 없다. 무슨 합의를 운운하는 것은 너무 이상적인, 공산주의적인 발상이다. 합의를 위해 서로 양보하고 타협하는 것이나 그게 안 되니까 투표를 하고 다수결의 원칙으로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다. 이걸 부정하고 자신들이 옳다고 여겨, 현실의 부당함을 무력으로 통제하고 억압하는 게 극단적인 것이다.

 

성경의 이스라엘 역사나 오늘의 우리 사회의 다양한 방식과 각양각색의 방법들로 자기주장을 하는 것을 보면서, 이 땅에서는 평화가 불가능함을 여실히 느낀다. 영구적인 평안이란 없다. 40년이나 80년이나 사사가 사는 동안은 평화가 깃들었다고 그것이 영원한 것은 아니다. 이에 오늘 본문은 ‘자기 가운데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하며 우리의 행동을 요구한다.

 

우리의 기도는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마음으로, 자신이 고백한 죄로부터 떠나야 한다. 우리가 ‘어느 쪽’에 속해서 ‘광화문’이냐, ‘여의도’냐, ‘헌재 앞’이냐 하는 게 중요한 아니다. 우리의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 이는 분명 진정한 회개가 그 개인의 삶에서 우선될 때 가능하다. 오늘 본문은 그러므로 우리에게 ‘참된 회개의 본’을 보여주는 것 같다. 우리의 회개는 ‘하나님의 마음을 근심하게 한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충돌하면서 주의 긍휼하심이 은총 가운데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이다.

 

여기서 ‘근심하다’는 히브리어의 뜻으로 ‘견디지 못하다’란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뉘우침과 진정한 회개를 외면하시지 못하심이다. 우리의 회개와 곤고한 삶을 보시고 더는 모르는 척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을 알게 한다. 이에 우리가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16).” 하여 오늘도 나는 시편의 표현과 같이,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 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

(시 45:1).

 

하는 기도로 주께 올린다.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왕의 위엄을 세우시고 병거에 오르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놀라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4).

 

이에,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6).

 

그리하여

 

왕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왕에게 부어

왕의 동료보다 뛰어나게 하셨나이다

(7).

 

곧 오늘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주 앞에 엎드린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하여 오늘도 그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한다. 나의 왕 나의 구주 되신 이를 찬양한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5: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