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전봉석 2025. 3. 5. 05:15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삿 16:17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 51:10-12

 

 

삼손이 가사로 갔다. 가사는 가드,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과 더불어 블레셋의 주요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그중에 가장 남단에 자리하고 있다. 가사에는 애굽에서 서아시아로 통하는 상업로가 있다. 이 도시는 가나안 정복 때 이스라엘에 의해 정복되었으나 해안에 있는 다른 도시들과 함께 곧 블레셋에 의해 재탈환되었다.

 

가사는 삼손의 주요 활동지인 소라에서 약 60Km가량 떨어진 곳이다. 어째서 삼손이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앞서 레히에서 삼손이 활약하여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삼손을 두려워하는 블레셋 사람들로 인해 어느 정도 자신의 힘을 믿고 교만해진 듯하다. 그런 점에서 삼손은 블레셋 땅을 맘대로 다닐 수 있었다. 이러한 만족이 삼손을 실족하게 하여 비극적인 종말을 가져온 것이다.

 

욕망은 잔인할 정도로 악착같이 우릴 사로잡는다. 삼손이 한 기생을 보고 그리로 들어갔다. 삼손이 가사에 어떤 일로 갔다가 기생에 홀려 그녀와 동침한 것은 분명하다. 분명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죄악이다. 사사로 세우심을 받을 때 이를 경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만큼 당시 이스라엘 사사의 일반적 풍조가 매우 문란했음을 시사한다. 죄악 된 습성은 이렇듯 퍼지고 자란다.

 

그러다 삼손이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가사의 기생에 홀려 봉변을 당할 것인데, 다시 육신의 정욕에 빠져 ‘들릴라’라 하는 여인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중심에 두지 않은 사랑은 헛되고 위험하다. 들릴라의 신분도 기생이거나 그다지 도덕적인 여인은 아닌 것 같다. 본문에서 들릴라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다만 그 이름의 뜻은 음탕하다, 연약하다란 것이다. 그녀의 거주지가 삼손의 고향인 소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소렉 골짜기인 것으로 보아 블레셋 여인이 아닌 유다 여인일 가능성도 있다.

 

당시 블레셋 치하에서 유대인과 이방인간의 통혼이 횡행하던 시점이다. 들릴라는 블레셋 사람과 결혼한 여인일 가능성도 농후하다. 어쨌든 그녀는 블레셋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던 것은 확실하다.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 여인에게로 올라가서 그에게 이르되 삼손을 꾀어서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큰 힘이 생기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능히 그를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을는지 알아보라 그리하면 우리가 각각 은 천백 개씩을 네게 주리라 하니(4-5).”

 

소렉 골짜기는 ‘좋은 포도의 골짜기’라는 뜻이다. 예루살렘 서남쪽 약 21Km 지점에 위치한 지중해 해변의 서북쪽으로 약 32Km나 뻗어 있는 골짜기다. 부근에는 소라, 딤나, 레히 같은 성읍이 위치해 있다. 보면 삼손의 우쭐하는 교만과 그에 걸맞은 환경이 저로 하여금 주를 개의치 않고, 안이하고 해이하게 행하도록 하였다. 우리가 늘 근신하고 조심해야 할 것과 교만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이르시는 말씀과 연관이 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이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하다. 결국 삼손은 들릴라의 끈질긴 홀림으로 무너졌다.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17).” 진정 나실인으로서의 하나님의 계명을 욕정에 못이겨 실토하게 된 것이다.

 

저는 누구보다 강했고 거침이 없었다. 저의 힘이 주의 권능으로 ‘주의 영’이 주도하신 것을, 교만과 해이한 마음으로 정욕에 끌려 무릎을 꿇고 말았다. 삼손은 맨손으로 사자를 찢어 죽일 만큼 강했으나 사랑의 유혹, 정욕에는 약했다. 일천 명의 블레셋인들을 나귀턱 뼈로 쳐 죽일 정도로 거침이 없고 당당했으나, 사랑의 올무에서는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항상 영과 육의 싸움에 노출되어 산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6).” 이를 더러 하나로 놓고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7).” 성경의 이와 같은 강조는 괜한 게 아니다.

 

일련의 사태나 사회적 현상으로 미뤄볼 때 저마다의 학식과 지위가 저를 교만하게 하는 것을 본다. 사람들의 인정과 관심이 저로 하여금 분별력을 잃게 하는 것도 본다. 더하여 자신을 따르고 그 말에 아멘, 할 때 이를 마치 자신의 권세로 여길 때는 영락없다. 하여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 곧 우리가 육신에 있다 하는 것은 사람들의 이목과 평가, 그것으로 자신의 확신을 삼을 때는 여지가 없다. 소위 방귀 좀 뀐다는 놈들이 요령껏 사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9-10).”

 

우리가 늘 말씀으로 무장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언제든 나 자신도 다르지 않다는 데서 주의하는 것이다. 삼손의 사사로서 활동은 제멋대로였다. 감정적이었고 즉흥적이었다. 남다른 저의 은사가 저로 하여금 교만을 일삼고 해이한 마음으로 세속적인 쾌락에 쉽게 노출시켰다. 힘이 장사이니 누가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터에 넘치는 저의 정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수시로 이방 여인과 문란한 생활로 방종하게 하였다.

 

그런 거 보면 넘치는 축복이 위험한 것은 이를 온전히 다룰 수 있는 제어능력도 필요하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우리가 저마다 가지고 있는 자신의 약함이 곧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을 지키고 보존하며 누릴 수 있게 한다. 물론 고통이 좋을 리 없어서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8).” 누군들 고통을 자처하겠나?

 

그러나 늘 돌이켜 보면 나를 멈추게 하고 주를 바라게 하였던 것은 언제나 ‘고통’이었다. C. S. 루이스는 고통은 ‘가면을 벗은 악’이라 하였다. 상대적으로 죄는 늘 가면을 쓰고 있다는 소리다. ‘거룩’이라는 가면, ‘경건’이라는 가면, ‘친절’이라는 가면, ‘희생’이라는 가면… 뒤에서 아이와 오늘 나눌 율법이라는 가면까지. 그것으로 우리는 남들에게 인정받고 스스로의 공로로 여겨 스스로의 만족을 마다하지 못한다. 죄를 ‘가면을 쓴 악’이라 하는 것도 때로는 그러한 자신의 경건과 희생을 대단하게 여긴 까닭이다. 그래서 누구라도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한다고 할 때 더욱 주의 할 것은 그 때문이다.

 

결국 삼손은 사랑에 빠졌고,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나실인의 규례를 실토함으로 그 힘을 잃고, 두 눈이 뽑히고, 블레셋인들에게 끌려가 조롱거리가 되었다. 이때의 ‘수치’는 저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하였다. 오늘 날 우리가 잃어버린 자정능력 중 하나는 수치심이다. 스스로 자신이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한 것을 수치라 하는데, 오늘 날 쏟아져 나오는 여러 뉴스나 그에 따른 사건 사고들을 보면 그야말로 수치심을 느끼는 회로가 다들 망가진 듯하다.

 

누가 들어도 자신의 목소린데도 그에 대해 인정할 줄 모른다. 나 같으면 속된 말로 쪽팔릴 텐데, 대충 봐도 논문을 표절한 게 사실인데도 일체 부정한다. 이것이 저들 부부만의 일이겠나? 이를 또 곁에서 두둔하고 덩달아 편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더 이상하기는 하다. 다들 그 밥에 그 나물이어서 그런가, 그러려니 남을 탓한다. 수치심을 무마하는 데 남 탓보다 탁월한 진통효과도 없는 것 같다. 아플 땐 아파야 하는데 잠시도 아플 틈을 주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의약이 발달한 게 문제인가? 우리의 양심이 조금은 수치를 느껴야 하는데 그럴 시간을 주지 않는다. 공교롭지만 나는 노무현과 노회찬의 죽음을 두둔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느꼈을 수치심을 생각하곤 한다.

 

삼손은 사사로 사는 동안에 한 번도 주 앞에 부르짖고 아뢰어 기도한 것을 볼 수 없다. 넘치는 힘과 그에 따른 능력 때문이었는지, 저는 기어이 눈알이 뽑히고 힘없이 끌려와 남들 앞에 수모를 당하면서야 수치를 느꼈다. 그리하여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도하였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28).”

 

안타까운 일이나 다행이란 생각도 드는 것은, 이와 같은 사건으로 저가 블레셋의 많은 사람을 죽여서가 아니라 비로소 주의 이름을 부른 데서 말이다. 삼손의 생애는 하나님께 받은 남다른 축복이 저의 출생 전부터 이미 예정하신 것으로, 넘치는 은혜로 과분하였을 이스라엘 백성의 실상을 함축하고 있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의 죄도 결국은 하나님으로 충만하던 때를 가벼이 여긴 결과이다. 이를 틈타서 사탄의 유혹은 자기주장, 그 잘난 자유의지를 발동시킨 것이다. 모든 선택이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할 때는 필요하지도 않던 의지이다.

 

삼손이 누렸을 하나님의 축복이 결국은 저로 방종하게 한 것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따른 것이다. 분명 나실인으로서 구별되게 선별하셨으나 저는 자신의 의지를 따라 그 좋을 대로 판단하고 선택하여 오늘의 이 결과를 초래하였다. 여기서 문득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스스로의 절제와 인내가 필요함을, 있을 때 더 조심하고 괜찮다고 여길 때 더 주의해야 할 것을…. 밤중에 아이가 보낸 성경구절을 가지고 오늘 아침도 아이 출근 전에 성경공부를 하게 되는데,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2-14).”

 

앞서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시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누구도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서 의인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삼는 자는 저주 아래 있다는 것으로, 죄의 보편성이란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려는 데 있다. 율법을 따르는 자들은 칭의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인데, 율법으로 자신을 지킨다는 것이 우리의 능력 밖이다. 율법으로는 우리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뼈저리게 느낄 따름이다. 곧 주의 긍휼하심으로가 아니면 하나님의 공의로 인한 정죄와 진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갈 3:12).” 하심은, 우리의 판단과 기준이 ‘내 것’을 중심으로 할 때 이미 죄다. 상대적으로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심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김으로 모든 나의 의지를 이양하는 것이다. 이를 바울은 구약, 곧 성경에서 찾았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이 구절은 원래 하박국이 갈대아인의 침공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즉 사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하박국은 하나님을 향한 겸손과 신뢰로 고백하였다.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위기와 저주 가운데서 살 길은, ‘오직 믿음으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그러므로 하박국이 여호와를 바라는 것과 바울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고자 하는 마음은 궁극적으로 ‘오직 믿음으로’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아이가 궁금해하는,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하심은 갈라디아의 유대주의자들 앞에서 구약을 인용하여,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율법)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레 18:5).” 믿음과 율법이 조화될 수 없는 관계인 것을 증거 한다. 즉 율법으로 행하려는 자들은 끝까지 율법을, 곧 자신의 행위로 의롭게 살며 삶으로 살아서 율법을 완성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뒤집어서는 율법을 행치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자기 오류에 빠진다. 결국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바 의로운 행위로 구원을 추구한다.

 

그렇게 해서 근본주의자들이나 신사도주의자들이 외치는 직통계시니 은사주의니 하는 따위는 그야말로 자가당착을 낳는다. 그 실상은 자신들의 주장과 생각이 옳다고 여김으로, 저들은 나름 자신들만의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그 원칙과 상식을 신봉한다. 같이 무리지어 집회를 선호하고 선동하여 자신들 그 소수의 특권의식에 사로잡힌다. 이는 처음 사람 아담이 가졌을 '하나님과 같이 되는 자'로 자신들을 놓음으로 자신들의 판단으로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약속의 언약을 파괴한 것이다. 왜들 개신교 목사들이 선봉에 서는가, 바로 알아야 할 것은 저들의 신념이 저의 신앙이다. 율법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인 것과 같다. 오늘의 삼손이 기어이 힘을 잃고 수모를 겪으며 수치심 가운데서 후회하고 저주를 깨닫는 것도 결국은 갈 데까지 가야 할 노릇이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4-5).”

 

결국 구원은 전적인 주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이를 우리는 믿음으로만이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이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곧 우리가 말하는 은혜란 우리 입장에서는 거저이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희생이고 선이다. 즉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대가로, 그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는 결국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속전(贖錢)을 얻었다. ‘속전은 죄를 면하기 위해 들이는 돈’이다. 우리 죄의 값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4).”

 

오늘에 이르러 내가 주의 자녀로, 주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을 수 있는 이 믿음의 값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얻어진 엄청난 값의 결과이다. 우리 구속한 목적은 ‘아브라함의 복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우리들)에게도 미치게 하려는 것이다.’ 또한 이를 ‘믿는 자들이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의 복과 오늘 우리가 누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복은 동일하다.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 것과 성령을 선물로 얻는 것은, 아브라함이 받은 복과 같다. 이는,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눅 24:49).”

 

하신 예수의 약속이시다. 오늘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죄를 회개하며 시를 지었다. 주목하게 되는 것은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 달라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 51:1, 10-12).

 

오늘 아침에는 아이와의 성경공부까지 같이 묵상하면서… 삼손의 넘치는 축복이 저로 죄악 중에서도 주의 일을 감당하게 하심을 알 수 있었다. 아이와 나눌 말씀에서 내 안의 율법적인 나의 자의식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에 대하여 점검하게 되었다. 이를 시편의 시각으로 다시 한 번 돌아보면,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14-15).

 

이를 위하여 나는 늘 나의 상한 심령을 주 앞에 내어놓으며 주의 긍휼하심을 바랄 때,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