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전봉석 2025. 3. 6. 04:39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17:6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시 52:7-8

 

 

오늘에도 어른이 없다. 각 가정은 아버지 부재의 시절이다. 존경할만한 위인이 없어 뭐라 나서서 꾸짖고 야단쳐줄 사람이 없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때에는 왕이 없으므로’ 이렇듯 각자 좋을 대로 믿고 의지한다. 나름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일 텐데, 스스로 만들어 신상을 붓고 적당한 사람을 세워 복을 구한다. 이러한 표현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나타난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18:1, 19:1, 21:25).”

 

왕이 없다 하는 것은 다스리는 자가 없어 생활이 통솔이 어렵다. 하나님이 계신데도 그의 통치에 순응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렇게 할 때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고 이방의 세속적인 왕정을 추구한다. 결국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삶이란 게 어떤 것인지, 스스로 어리석게 되어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

 

누구도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다. 아담 이후 모든 인류는 저마다의 신(神)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섬기며 산다. 여러 신상이 난무하고 심지어는 ‘알지 못하는 신’까지 섬기면서 그 앞에 복을 빈다. 이로써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20).” 궁극적으로 이러는 것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21-22).”

 

그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 오늘 날 우리 사회에 팽배한 바로 그런 것들이다. 곧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이는 내가 어릴 때나 오늘도 여전하여 어쩜 그렇듯 무당과 온갖 잡류들이 등장하여 점을 피고 요술을 부린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23-25).”

 

하여 요즘은 무슨 프로그램에서는 아예 신들린 젊은이들을 상대로 연애를 하도록 주선하는 그런 것도 있다. 대부분 무당이거나 점성술사, 사주관상을 터득한 자도 있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도 어렵지 않게 점집들을 찾아볼 수 있고 그 수 이상으로 교회며 십자가들이 건물마다 난무하다. 지나면서 보면 신유, 치유, 방언, 예언 등 각종 은사를 내걸고 교회들도 그 추구하는 바가 다른 모양이다.

 

이는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29).” 실상은 믿는다고 믿는 것인데 도대체 무엇을 향한 믿음인지는 알 수 없어서 각기 자기 좋을 대로 믿으며 구하고 그리 될 줄 알고 끌려가는 것인데,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30-31).”

 

우리 사회의 총체적난국이 여기 있지 않나?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32).” 그러므로 점점 더 하나님의 언약에는 관심이 없고 이 땅에서 추구하는 바, 그 삶의 윤택함을 바람인데 이를 성경은 ‘왕이 없음으로’ 나타나는 증상으로 보고 있다. 그러니 순종하여 자발적으로 한 마음 한 뜻으로 결집하기란 불가능하다. 오합지졸 이리 모였다 저리 쓸렸다 하면서 더욱이 노인들이 말년에 너무 그 삶이 안쓰럽다.

 

종종 산책을 하다보면 노인들 여럿을 지나칠 때 손에 들린 핸드폰으로 어떤 유튜브인지, 무슨 개인방송인지 알 것 같은 내용을 크게 틀고 듣는다. 마치 다들 뭐에 홀린듯하다. 아이들 또한 다르지 않아서 공부하러 오는 아이 누구도 거의 병적으로 혼자 낄낄거리거나 재미있어 하며 기를 쓰고 어떤 방송을 본다. 이 모든 게 그 영혼이 의지할 데 없고, 누가 잡아줄 어른이 없어서인데… 노인은 늙어서도 고집 센 아이로 늙었을 뿐 누구를 훈계하고 교훈할 능력이 없다.

 

오늘 본문은 미가가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삼은 것과 지나가던 한 레위인 소년을 제사장으로 삼은 경위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저를 ‘유다 가족에 속한 레위인’으로 소개하는데,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레위인들에게는 여섯 도피성과 40여 개의 성읍을 각 지파에서 떼어 주도록 하였다(민 35:6, 수 21:1). 그러나 사사기 시대에는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종교적으로 무질서한 시대였기 때문에 이러한 규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그래서 본래 유다 지파의 땅에 살던 이 레위인 소년도 자신이 거할 적절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이리저리 방황하며 생활했던 모양이다.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때’는 오늘도 여전하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6).” 최소한 어느 절차나 시스템이 작동해야 할 것 같은데, 어제도 미국의 대통령이 의회에서 연설하는 뉴스를 보는데 참으로 가관이다. 강대국으로 저들의 영향력은 알겠는데, 대통령 한 사람으로 인해 그처럼 좌지우지 될 수 있는 게 오늘 날 소위 민주주의라는 것이고, 이는 공산당이나 독재국가와 무엇이 다른가 싶다.

 

결국 오늘도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것이라, 각자의 삶은 물론 한 나라의 대통령이란 사람이 쥐락펴락하는 세상이란 게 참으로 모순되고 위태롭기만 하다. 이를 현재 우리 사회가 겪고 있고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은 점점 더 패가 갈려 각자의 진영에 따라 그 논리가 전혀 다른 접근으로 반목과 적대감이 팽배하다. 이를 여기 ‘미가의 가정’을 통해 타락한 이 땅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신다.

 

먼저는 황금만능주의의가 팽배한 것이다. 본문에서 어미의 돈을 훔친 미가와 돈을 훔친 자를 저주하는 어미의 대화로 시작된다(1-2). 부유한 미가가 돈과 재물로 ‘레위 소년’을 자기 가정에 들여 사적인 제사장으로 고용하는 내용도 나온다(7-13). 그야말로 돈이면 뭐든 다 되는 오늘 이 사회의 모습도 전혀 다를 게 없다. 여기 ‘미가의 제사장’은 후에 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단 지파의 제사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내용으로 이어진다(18:19-20).

 

이는 아담 이래 여전히 모든 사회는 ‘타락한 시대’를 살고 있다. 거기에는 종교의 혼합주의가 한몫을 한다.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는 여호와 유일종교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는 것인데, 실상은 가나안 종교와 기타 여러 이방종교와의 혼합이 변행되면서, 돈으로 우상을 만들듯 그 돈으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찾아 서로 혼합하여 이상한 신들을 섬긴다. “미가가 그 은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머니가 그 은 이백을 가져다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고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4).”

 

이와 같은 것이 오늘은 아니 그러한가? 다들 배울 만큼 배워서 더는 미개한 신앙이 없는가? 오늘 우리 사회는 어떠한지? 자신들 경선에서 토론할 때마다 손바닥에 왕 자를 새겨 은연중에 노출시키던 이가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뽑히면서 오늘의 이 사달이 난 게 아닌가? 속속 드러나는 듣도 보도 못한 무속과 주술이 그들을 에우고 있고, 그런 가운데 개신교가 왜들 그렇듯 덩달아서 날뛰게 되는 것인지… 뉴스나 사회적 현상을 보다보면 뭐가 뭔지 바르게 분별하기가 어려워진다.

 

오늘 본문에서 미가의 가정에 수호신인 드라빔을 가졌다고 해서 여호와의 제사장인 것처럼 행세한다거나(5), 그렇듯 미가 어미의 저주는 복술(卜術), 점(占), 마술(魔術) 등 이방 종교에 유일신 하나님을 접목시켜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우상 숭배행위가 있는 그대로 진술되어 있는 것이다(2).

 

그렇듯 미가는 재물도 많았을 뿐 아니라, 개인적인 신당까지 두고 있어 주위 사람들의 부러움을 독점하였다(5). 그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성막과 법궤가 있는 실로에서만 세울 수 있는 제사장을 자신의 가정에 개인적으로 들여 종교적인 만족을 추구했다(7-13). 제사장도 아닌 미가는 레위 소년을 제사장으로 세우면서 그를 거룩히 구별하는 의식도 행했다. “미가가 그 레위인을 거룩하게 구별하매 그 청년이 미가의 제사장이 되어 그 집에 있었더라(12).”

 

결국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은 극단적인 현상이 오늘 우리 사회도, 그 가정들도 그대로 재연된다. 집으로 오는 꼬맹이가 하나 있는데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서른 남짓한 어린 부모는 저 아이 하나를 어쩌지 못해 쩔쩔맨다. 아이는 갑자기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다가, 동화책을 보겠다고 했다가, 무엇을 달라고 요구하면서 애를 먹인다. 그 부모도 애 하나를 어쩌지 못해서 서로 번갈아가며 데려다주고 데리고 가는데 그때마다 진을 뺀다. 오히려 그럴 때는 ‘똥싸개’가 그래도 오래 돼서 그런가, 의젓해 보이지만 그 집안도 말이 아니라… 저마다 야단법석이 따로 없다.

 

일면 이것이 아이 문제이겠나? 기독교 국가를 자처하는 강대국으로 예의도 없고 관례도 없고 그야말로 무슨 망나니가 휘두르는 칼춤처럼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정책으로 전 세계를 호령하고 있는 형국이다. 오늘 이 ‘미가의 가정’이 고스란히 우리 사회와 가정뿐 아니라 전 세계의 정세를 단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이에 성경은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신 30:15-18).”

 

자, 그러니 어쩔 것인지?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 그 죄로 말미암아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대하 24:18).” 오늘의 현상은 그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예전에도 그러했고 오늘도 여전하듯 앞으로도 그러할 텐데, 이와 같은 죄악을 통제하지 않으면 곧 이 모든 세계는 자멸할 것이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 5:6-7).”

 

다들 싫어한다. 그나마 하루에 한 장 성경을 쓰게 하고, 이를 잘했다잘했다 하며 격려하며 한 아이를 인도한다. 그런 가운데 매주 수요일 아침 일찍, 출근 전에 40여 분 시간을 내어 줌으로나마 성경공부를 하는 아이가 희귀할 정도이다. 나는 일체 강요하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그런다고 안 할 사람이 할 것도 아니고, 할 사람이 안 할 것도 아니어서… 오히려 참다못해 권하면 서로 그게 계면쩍어서 불편해진다.

 

친구 아무개에게도 그렇듯 새벽예배를 나가고, 짬을 내어 틈틈이 성경을 읽고 연구하며 ‘숙제’로나마 하던 것이 교회가 이런저런 일로 성경공부가 중단되면서 모든 것을 중단하여, 나는 그의 열심이 아쉽고 아타까워서 같이 할까? 하고 물었다가 저의 거절에 서로가 괜히 머쓱해졌다.

 

그러니 우리 안에 왕을 모시고 산다는 일은 점점 더 희박한 일이다. 자신이 신(神)이 되면서 나름의 자유의지를 운운하며 그 자존감이 어떻고, 자기존중이 어떻고 하는 시대에 개인의 성(性)도 사랑도 뒤죽박죽 각자 좋을 대로 취하였다가 다른 것으로 바꾸었다가 하는 터라…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2).” 나는 그럴수록 ‘시편을 살자’, ‘말씀을 먹자’ 하고 나 혼자 다짐하듯 ‘나를 쳐 복종케 한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시 119:11).

 

그러다보니 요즘은 성경공부를 같이 한다는 게 별 희안한 일 같이 되어간다. 오히려 이단이나 사이비종교는 무슨 재주로 그리 열심인지, 다들 이 땅의 안위를 추구하는 데 혈안이 돼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것이 아침의 묵상글쓰기와 저녁의 가정예배이다. 아흔둘이 되는 장모는 틈만 나면 예전에 신주단지 모시고 살던 때를 기억하고 주섬주섬 그때 일을 더듬기를 좋아한다. 치매가 오는가, 싶은 것은 그처럼 예전 일은 선명한데 어제오늘의 일은 오락가락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오히려 감사하는 것은 거동이 더는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같이 예배드리자 하고, 곁에 끼고 앉아 말씀으로 전하면 그래도 꼼짝없이 듣는다.

 

그렇듯 우린 이제 스스로 옥죌 필요가 있다.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 잠시 한 눈 팔다 어느 순간에 딸려간다. 나는 아무개에게 만 얼마 하는 유튜브 유료를 없애라 했다. 한 번 검색하여 본 것을 연차적으로 계속 유도하는 알고리즘을 타고 속수무책 같은 내용의 개인방송으로 끌려 다닌다. 내게 누굴 권할 때면 저는 이미 골수분자가 되었다! 그러니 말끝마다 성경공부를 하고 싶다는 둥 성경을 더 알고 싶다는 둥 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주장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애고 어른이고 할 거 없이 왕의 부재, 부모의 부재 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다. 이는,

 

“돌아서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따르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삼상 12:21).”

 

그렇듯 악은 점점 더 부지런하고,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렘 4:22).” 선은 점점 퇴행을 하는 중이라, 오늘 시편도 이르기를…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시 52:7).

 

그러니 부디 말씀으로 붙들려서,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 하심을 굳게 믿음으로,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1).

 

이에,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8).

 

그리하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