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
삼하 15:30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돌보사 내가 주의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게 하사 주의 유산을 자랑하게 하소서
시 106:4-5
압살롬이 결국 10년 만에 일을 냈다. 형 암논을 살해하고 3년을 피해있다, 요압의 중재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으나 다윗이 보지 않는 2년을 가택연금과 같은 신세로 지냈다. 그러다 4년 동안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고 자신이 서원했던 일이라고 아뢰어 헤브론으로 가서 스스로 왕이 되었다. “또 압살롬이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정의 베풀기를 원하노라 하고… 사 년 만에 압살롬이 왕께 아뢰되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내가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하소서(삼하 15:4, 7).”
사람들이 저를 따랐고 저는 사람들의 마음을 훔쳤다. ‘내가 재판관이 되고,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정의를 베풀기를 원하노라.’ 하고 압살롬이 왕자의 신분을 이용하여 스스로 백성의 재판관이 되었다. 당시 이스라엘의 재판관 조직이 체계화되지 못하였다. 왕이 이를 주로 관장하다, 유다 왕 여호사밧 때 조직이 완성되었다. “여호사밧이 예루살렘에 살더니 다시 나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에브라임 산지까지 민간에 두루 다니며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고…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하여 할 것인지 여호와를 위하여 할 것인지를 잘 살피라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심이니라(대하 19:4, 6).”
압살롬의 이러한 관점, ‘내게로 오는 자에게’ 하며 백성들을 사로잡았고 백성들의 마음은 압살롬에게로 향해, 백성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하였다. 이 일은 4년 동안 있어서 저로 하여금 스스로도 이미 다 이루었다 하는 마음이 들었을지 모른다. 압살롬은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하고 아버지 다윗에게조차 헤브론으로 가려 하는 속내를 숨길 수 있었다. 그렇게 아무런 의혹도 사지 않고 예루살렘을 떠나 압살롬은 헤브론에서 거사를 치르게 되었다. 이에 하나님께 서원하였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팔았다.
우리에게 혹, 하는 마음은 예상치 못한 순간의 일이다. 우리가 그 중심을 잃지 않으려면 언제나 주께 마음을 두고 말씀으로 단단히 서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분명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그 공로를 따라 판단하지 않으신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요 7:24).” 그러니 우리 곁의 여러 모양이나 이론을 함부로 따라서는 안 된다. 사탄도 그를 광명의 천사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15).”
스스로 이와 같이 자신을 재판관으로 세우고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왕이 되고자 하는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다. 자만이란 그렇듯 자신으로 흡족해하는 것이어서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우리는 무엇보다 영적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높아지는 것은 자신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이뤄진다. 자신을 낮출 때 하나님이 높이신다.
지혜는 일러,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잠 27:2).”
이 단순하고 명징한 진리가 생활 속에서는 참 어렵다. 한 번 굳어진 마음은 쉽게 허물 수 없고, 자신으로 완고한 자기만족은 어떤 권유에도 교만할 뿐이다. 하여 주님은 이르시되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그러므로 우리가 압살롬의 스스로 높임을 보며, 우리를 옳다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신 것을 새삼 알게 된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후 10:17-18).”
이는 모든 성경의 믿음의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그러므로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스스로 높여 왕이 돼야 할 것 같은 염려가 압살롬 안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아버지 다윗의 마음을 믿을 수 없어서 스스로가 이러한 일에 가담한 것일 텐데,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7).” 말씀은 오직 ‘주께 맡기라’ 하신다.
그렇듯 압살롬은 백성들 위에 스스로 굴림하였다. 많은 사람이 저를 지지하였다. 저가 환심을 사려 사람들을 획책한 게 들어맞았다. 하여 ‘헤브론에 가서 이루게 하소서.’ 하는 저의 본심을 다윗은 읽지 못했고, 백성들은 이를 따랐다. 헤브론은 예루살렘 남쪽으로 약 30여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이다. 헤브론은 본래 여호와 신앙의 발상지이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창 13:18).”
그런 점에서도 압살롬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헤브론으로 가겠다고 한 것도 다 의도된 계획이었다. “당신의 종이 아람 그술에 있을 때에 서원하기를 만일 여호와께서 반드시 나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내가 여호와를 섬기리이다 하였나이다(삼하 15:8).” 결국은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 두루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 소리를 듣거든 곧 말하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라(10).”
이를 다윗이 압살롬을 상대로 대치하기보다 도망쳤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중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그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 우리를 해하고 칼날로 성읍을 칠까 하노라(14).” 이는 앞서 나단 선지자가 그에게 예언했던 재앙을 의식했는지 모른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12:10-11).”
그러니 우리의 죄의식이 그만큼 사람을 주눅 들게 하고 거짓된 마음으로 사로잡히게도 한다. 그런 가운데도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나 피신 길에 오르면서 궁을 지키도록 후궁 10명을 남겨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으로 하여금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왕이 나갈 때에 그의 가족을 다 따르게 하고 후궁 열 명을 왕이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하니라(삼하 15:16).”
2년 동안 벼르다 기어코 암논을 살해하고, 압살롬은 3년을 도망자로 있다 돌아와서 2년 동안을 또 연금(軟禁) 상태로 방치되었다. “압살롬이 이태 동안 예루살렘에 있으되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므로(14:28).” 결국 이러한 사태가 오늘의 다윗을 이처럼 궁지로 몰아넣었다. 앞서 충분히 치리하고 다스렸어야 할 일인데, 오늘의 이러한 사태는 예상했어야 한다.
이때 다윗과 더불어 예루살렘을 탈출한 사람은 호위병과 6백 명의 병사들 그리고 많은 대신(大臣)과 백성들도 있었다. “왕이 나가매 모든 백성이 다 따라서 벧메르학에 이르러 멈추어 서니 그의 모든 신하들이 그의 곁으로 지나가고 모든 그렛 사람과 모든 블렛 사람과 및 왕을 따라 가드에서 온 모든 가드 사람 육백 명이 왕 앞으로 행진하니라(17-18).”
그런 거 보면 아무리 옥토라도 햇볕만 내리쬐면 사막이 된다. 다윗은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으나 동시에 또한 누구보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았다. 더러는 오늘과 같은 비바람과 폭우를 통해 더욱 주를 바라며 의지하게 된다. 나는 늘 어디가 아픈 사람이라, 무릎이 너무 아픈가 하면 어느 날은 허리가 아프고, 어깨가 그런가 하면 진통제 때문인지, 속이 울렁거리기도 한다. 어제는 허리였는데 조짐이 보여 산책을 살살하고 왔는데 결국 한의원으로 가서 침을 맞았다. 그게 또 불안이 겹쳐 안쪽 구석진 데서 참을 수가 없어서 밖으로 나와 조금 넓은 곳에서 치료했다. 앞서 초조와 불안으로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일은 기본이었다.
추나요법으로 허리가 놀랐는지, 이 새벽은 앉아 있기도 힘들어 서서 묵상글을 쓰다 앉다 한다. 간신히 양말을 신고 운전을 하고 오는데 울먹거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할 수 있는 일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뿐이다. 주님, 하고 끙, 하다 앓는 소리에서 입을 삐쭉거리며 서럽기도 하다. 다윗의 오늘은 저로 하여금 주만 바라게 하려 하심이다. 그것이 어디까지인가하면 쫓겨 가는 다윗을 향해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16:7).” 하며 조롱하는 정도여서, 얼마든지 저 같은 자를 상대할 수 있었으나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6).” 그런 가운데,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9-10).”
우리로 낮아지게 하심은 주께로 우리 마음이 일심으로 온전하게 하려 하심이다. 곧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히 12:6, 10).” 살면서 사는 동안에 여러 고통이 또한 어려움이 우리로 힘들게 하지만 이는 단지 고통으로 그치는 게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하는 말씀으로 나는 나의 약함을 받아낸다.
다윗이 다윗으로 하나님께 합한 자일 수 있었던 것은 저가 누구보다 완벽하고 죄와 허물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늘의 이와 같은 어려움으로 저는 주를 바라였다. 더욱이 아들의 반역으로 쫓겨 도망치는 그 심정은 예전에 사울에게 쫓겨 도망치던 광야와는 달랐을 것이다. “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삼하 15:30).”
곧 우리가 오늘을 사는 동안 그리하여 천국을 사모한다. 애통함으로 주의 위로를 구한다. 하여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 2:11).”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너무 어지럽고 혼탁한 때에, 모든 시대가 그러하였겠으나 오늘의 나의 날들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이로써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신 5:11).” 하여 오늘도 나의 처지와 상황에서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시대가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더욱 오늘 다윗이 처한 상황을 지켜보면서,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이를 위하여,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누가 능히 여호와의 권능을 다 말하며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다 선포하랴
(시 106:1-2).
오늘의 이와 같은 처지에서 주께 아뢰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돌보사
내가 주의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게 하사
주의 유산을 자랑하게 하소서
(4-5).
아무리 우리의 오늘이 어떠하다 해도,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들의 고통을 돌보시며
그들을 위하여 그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크신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그들을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
(44-46).
그러므로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
(47-4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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