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삼하 13:21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
시 104:31
자식 일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 주께 맡김으로 기도하고 속으로 응원하며 할 말을 말씀으로 전하는 것뿐이다. 나로서는 현재 그러하다. 다 큰 자식들을 두고 뭐라 이르기보다 주께 맡김으로, 저들에게 맡겨둔다. 자신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보면 나의 부모는 어떻게 우리 사남매를 이처럼 키우셨는가? 때론 대단한 것 같다. 들어보면 그 답은 늘 주께 맡김이었다. 죽이시든지 살리시든지, 나의 모친은 자식들 일에서는 늘 주께 맡긴 관망자였다.
오늘 다윗의 자식들에 관한 이야기에서 천하의 다윗 또한 자식 일에 뾰족한 수가 없었음을 본다. ‘암논의 일’에 심히 노하였으나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는 2년 동안 누이의 일로 압살롬이 그 마음에 품은 노여움은 자라서 첫째 암논을 살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뒤에도 3년간을 다윗은 뭉개고 있을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21).”
암논이 일을 저질렀을 때, ‘암논이 장자인 고로 다윗이 그를 사랑하여 암논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았다’고 70인 역에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다윗 자신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이미 지은 자로서,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11:4).” 자신이 아들의 죄를 뭐라 나무라고 심판할 자격이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잠 23:13-14).” 그런데 마치 요즘은 훈계로 야단치거나 매를 들면 무슨 끔찍한 일이나 되는 듯, 아이의 인권을 운운하며 ‘고급진 교육정책’으로 아이들이 부모 머리 위에서 산다. 어제도 길가 커피점에 앉아 딸애와 이야기하는데, 옆에 젊은 부모가 아이가 떼쓰며 발광을 하는데도 어찌할 줄 몰라 어르고 달래다 눈총을 샀다. 훈계하라, 채찍하라, 스올에서 구원하라, 하는 성경의 가르치심이 무색하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오늘의 현실은 어른 부재의 시대로 스승도 어른도 제 구실을 못한다. 자칫 뭐라 훈계하고 손이라도 대면 고소당하기 일쑤다. 어쩌면 대학 졸업 후 일생을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았던 나로서도 더는 아이들을 상대하지 않는다. 너무 영악하고 영특하여 두렵다. 초등학교 어린 것들이 아무렇지 않게 성추행이 어떻고 하면서 말할 때 어린 아이들을 상대하는 일을 접었고, 중고등부 아이들이 서슴지 않고 자신의 성정체성을 양성 혹은 동성애자라 하거나 말에 대부분이 거짓말이어서 이 또한 어려워서 멀리하였다. 성경으로, 신앙으로가 아니면 더는 자신없다.
그때 상황을 자세하게 옮겨 적기는 어려우나… 점점 아이와 동물이 주인이 되는 세상에 사는 듯하다. 왜들 또 그처럼 애완견을 데리고 산책을 나오는지, 길거리 커피점에 있으면 한 다리 건너마다 변종된 개가 상전노릇을 하듯 돌봄을 받는다. 사람들이 이기적인 것은 그렇듯 치장한 자기만족의 애완견을 온갖 실험으로 교배하여 변종으로 만들었다. 속된 말로 생명을 가지고 실험을 하고 이와 같은 품종을 유지하려 엄청난 값을 지불하며 이를 사랑이라 여긴다.
오늘 여기 다윗의 우유부단한 처신은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하고(23-29), 나아가 다윗에게 반기(叛起)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15장). 대체로 언제부턴가는 내 곁에 ‘아픈 아이들’이 있어서 저들은 한 없이 이해하고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 외에 달리 길이 없어서 다행이다. 이런 소리하면 욕먹을 것 같지만, ‘라떼는’ 선생들이 깡패였다. 툭하면 손찌검에 심한 욕설도 서슴지 않았는데, 그러는 가운데도 인간적인 교류가 있었다. 실컷 때리고 감싸주며 같이 분식을 먹었던 선생도 있고, 누구는 한참씩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진심으로 나의 장래를 도우려던 이도 있었다. 물론 이런 교육방식을 두둔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의 교감이 사라진 사이에는 기능적인 관계만 남은 듯하다.
또한 우리의 가정교육이란 한 영혼을 세우는 일로, 자녀를 말씀으로 기도로 양육하기란 부모가 늘 주 안에 깨어있어야 한다. 어릴 때 나는 부친에게 자주 맞고 자랐다. 그럴 때면 꼭 끝마무리는 같이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땐 그게 그렇게 싫었는데, 그때 나의 부친이 눈물 흘리며 아뢰던 기도가 오늘의 나로 이 길에 서게 하였다. 결국,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설교를 받아 적게 하고 노트 필기한 것으로 용돈을 주곤 하던 교육이 오늘 이처럼 묵상을 글로 쓰게 하고, 생각하고 기도하기를 손으로 하게 하는 것은 아닐지….
오늘 본문은 우선 하나님이 왜 일부일처를 기준으로 가정을 꾸리게 하셨는지, 그런데 어쩌다 사람은 일부다처의 문화에 흡수되어 이런 결과를 초래하며 살게 되었는지를 살피게 된다. 믿음의 조상도 결국 아내 사라의 몸종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두었고, 이삭과 이스마엘의 불화는 오늘 날에 중동 전쟁으로 여전하다. 야곱에게도 네 명의 아내가 있었고 저들 사이에서 열두 명의 아들과 딸 하나가 있어 이런저런 파국과 동시에 민족을 이루는 것을 본다. 다윗도 여러 명의 부인이 있었고 그 사이에 여러 자식을 두어 골치다. 이복 남매 사이로 암논은 다말을 강간하였고, 오라비 압살롬은 이에 앙심을 품었다가 2년 뒤 복수하여 암논을 살해하였다.
성경은 일러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 19:6).” 이를 기준으로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잠 5:18).”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 13:4).” 하여 한 가정을 이뤄 이를 지속하여 같이 가는 길이 유익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친구를 사귀는 데 있어 이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암논이 다말로 음욕의 감정이 고조되었을 때 사촌이자 친구 요나답의 잔꾀가 이런 사달을 냈다. 저를 일컬어 ‘심히 간교한 자’라고 하였다. 결국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 13:20).” 이는 만고의 진리 같아서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27:6).” 하여 이 또한 복이다.
내게도 늘 두 종류의 친구가 있었는지 내 안의 주의 영이 하나는 꺼려지게 하고 하나는 가까이 하게 하셨다. 보면 나는 늘 복이 많았다. 모두가 주의 은혜이다. 더러는 하나님을 모르거나 멀리하게 된 친구였어도 저들로 나를 돕는 자로 주가 늘 내 곁에 두셨다. 그런 자들이 오늘에 이르러서도 나로 주의 길을 가는 데 있어 훌륭한 길라잡이가 되어준다. 더러는 서슴지 않고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사이가 복되다. 이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3-14).” 하여 바울은 직언하기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전 5:11).”
더욱이 요즘은 입바른 소리로 친절한 타인이 참 많다. 적당할 때 좋은 친구였는데 항상 보면 ‘미혹하는 영’으로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 24:5).” 마치 좋을 때는 간 쓸개 다 빼줄 사이처럼 굴다, 그런 사이가 꼭 깊은 상처를 남기고 떠난다. 무던하고 덤덤하니 서로가 기도로 이어지는 관계는 뜸했던 시간과 무관하게 언제라도 말씀으로 서로를 이끈다.
또 하나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게 암논의 연애하는 마음인데, ‘연애하다’의 뜻은 ‘성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인데 이를 ‘사랑으로 느끼는 것’이라 생각한다. 늘 그래왔듯 우리 사람은 동물과 전혀 다를 게 없다. 서로가 뒷구멍을 킁킁거리며 만나면 좋다고 하는 개들처럼 사람들 속내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점점 더 그러는가, 예전에도 다를 게 없는 듯 암논은 다말을 인격으로 사랑한 게 아니다. 킁킁거리는 개처럼 암논의 감정은 충동적이었고, 성적 욕망에 사로잡힌 거였다(14-15). 그렇듯 요즘은 서로 좋으면 동거가 일반적이다. 살아보고 결혼도 결정할 일이라며 공공연하게 방송에서도 떠들어댄다. 하긴 그게 합리적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시 119:9).
아니면 어떠한가?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 사람 감정이란 게 그리 정직하지가 못하다.
‘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동침하였다.’ 곧 근친상간자는 수간(獸姦)하는 자와 남색(男色)하는 자와 더불어 반드시 정죄함을 받는다. “너는 네 자매 곧 네 아버지의 딸이나 네 어머니의 딸이나 집에서나 다른 곳에서 출생하였음을 막론하고 그들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레 18:9).” 에이, 설마 하지만 “누구든지 그의 자매 곧 그의 아버지의 딸이나 그의 어머니의 딸을 데려다가 그 여자의 하체를 보고 여자는 그 남자의 하체를 보면 부끄러운 일이라 그들의 민족 앞에서 그들이 끊어질지니 그가 자기의 자매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그가 그의 죄를 담당하리라(20:17).”
이는 괴악한 일로 “그의 자매 곧 그의 아버지의 딸이나 어머니의 딸과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 27:22).” 더하여 동물과 교접하는 일도 적잖은 듯 하여 예나지금이나 죄는 여전하다. 이는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짐승 같은 행위’다. 음행과 악독은 같다. “이 백성이 모두 경건하지 아니하며 악을 행하며 모든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니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의 장정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그들의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사 9:17).”
끝으로 다윗의 묵인과 암묵적인 회피다. 암논이 자행한 일에 대해 다윗은 2년이 지나도록 방치하여 결국 자식들끼리 살육하게 하였고,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하고 3년 동안 다윗은 압살롬의 죄악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자식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애끓었다.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39).”
곧 다윗의 회피로 의분은 사그라들었고 오히려 압살롬에 대한 연민으로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어쩔 수 없으나 압살롬에 대한 사랑으로 ‘왕이 위로를 받았다.’ 우리의 이런 감정은 결국 사람을 좋게 하려는 마음에서이다. 다들 그러고 산다고 해서 그래도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엄히 경고하여,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이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그래서도 사람에게 너무 정 주지 말 것과 섣불리 믿지 말아야 한다. 나 자신을 봐도 그렇지만 감정이란 참 가벼운 것이어서 그때는 좋았다가 이제는 미워하는 게 한둘이 아니듯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선한 마음 가운데 악한 마음도 버젓이 더 많다. 내 속의 마음은 그러하다.
그래서도 나는 점점 나이가 들고 병들고 몸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이 더러는 참 다행이고 감사하다. 다소 무감각해지는 것들을 사랑한다. 예전에는 지나가는 참새 궁둥이만 봐도 음욕이 일더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이러한 감정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서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를 피해 도망친 것처럼,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 2:22).” 피할 때 주가 부르심을 따라야 한다. 그러할 때,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 4:2).”
결국 우리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사랑으로 인격적인 것이어야 하고,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 7).” 그리하여,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시 104:1).
사람의 사랑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데 여기서 인격적인 관계로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짐승과 다를 게 없는 욕구만 남을 뿐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데 있어 우리의 성실함으로,
사람은 나와서 일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23-24).
하면 우리가 이를 보며 하나님을 보고, 이를 느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인데,
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으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28-29).
이와 같은 순리를 배워서,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
(30-31).
그리하여,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3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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