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삼하 21:1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12:1
삶의 여러 시련은 남은 죄를 씻게 하려하심이다. 다윗의 시대에 3년 기근이 찾아왔다. 이는 직접적으로 다윗에 의한 게 아니라 사울 시대의 일 때문이었다.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1).” 사실 이 ‘기브온 거민 학살 사건’은 성경 어느 곳에 명확히 기록되지 않았다. 다만 7-9절에 보면, 다윗 왕이 므비보셋을 찾은 얼마 후 발생한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압살롬의 반란 이전의 일이다(15:7-12).
여하튼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기근은 칼(전쟁)과 사나운 짐승과 전염병 등과 더불어 하나님께 범죄한 백성에게 벌을 내리시는 일종의 심판이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내가 나의 네 가지 중한 벌 곧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전염병을 예루살렘에 함께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중에서 끊으리니 그 해가 더욱 심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4:21).” 특히 기근이 계속되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치명적이다.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음이여 어린 아이들이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애 4:4).”
그럴 때 우린 오늘 다윗의 태도에서 신앙을 배운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이는 기근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범죄한 사실이 있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그 진상을 알아보려는 다윗의 신앙의 자세는 오늘을 살면서 어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범위를 가르쳐준다. 더욱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란 ‘여호와의 얼굴을 찾으매’란 뜻과 동일하다. 곧 하나님의 심판의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갔다는 말이다.
이에 하나님은 답하신다. 곧 우리의 허물과 죄를 기억나게 하신다.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즉 기브온 거민 학살 사건이 사울 시대에 일어났음에도 다윗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하나님의 징벌이 가해진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시간이 하나님 앞에서 ‘시간과 인격을 초월한 공동체’의 시간이다. 앞서 율법으로는 ‘아비의 허물이 자손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7).”
결국 징계를 통해 백성의 범죄를 방지하거나 돌이켜 성숙한 신앙의 인격으로 나아가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다. 이를 야고보 사도의 증언으로 살펴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2-3).” 그러므로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에 대하여도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삶에 있어 어떤 시련으로도 주 앞에 온전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이다. 그 사랑은 공의로우시다. 곧 우리의 죄는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앞에 정죄함을 받아야 한다. 이에 구약의 관점으로는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 이를 신약의 관점에서는,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하여 우리로서는 이와 같은 심판을 견딜 수 없다. 그러므로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고로 하나님의 공의로 우리는 모두 죄의 심판을 면할 수 없지만 또한 동시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하나님의 사랑이 공의를 충족하심으로 그 어떤 심판에서도 예수는 우리의 대언자가 되신다. 즉 예수의 보혈로 우린 곧 죄 사함을 받았다. 이를 성경은 알게 하라고 하신다. 어제 우리는 주일 말씀으로 이와 같은 사실 앞에서 이제 서로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살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세례요한과 같이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설령 곧 바람에 흩어져 사라지고 마는 소리일지라도,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6).”
우리의 그 유한함과 일시적인 삶의 무게를 바로 알 때,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9).”
비로소 하나님을 본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여야 한다. 오랜만에 ‘아이’가 직접 와서 같이 예배를 드리고 식사를 하고 올라와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 이 말씀의 의미를 다시금 살폈다. 현재 사귀고 있는 아이와 결혼 이야기까지 오가면서 안 믿는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아이의 사명, 곧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1).”
하심에 대하여, 저들로 그 삶의 곤고함의 원인을 알게 해야 한다는 대화를 나누었다.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2).”
곧 우리는 사느라 그 사는 일에 다들 너무 힘겹다. 이는 모두 죄의 결과로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인생의 결국은 이러하나 그런 가운데서 ‘위로하라’ 하심은 주의 자녀들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할 일이어서,
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시 38:3).
사는 게 고달플 때,
“너는 어찌하여 네 상처 때문에 부르짖느냐 네 고통이 심하도다 네 악행이 많고 네 죄가 허다하므로 내가 이 일을 너에게 행하였느니라(렘 30:15).”
그에 따른 원인을 안다면,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겔 18:30).”
돌이켜 죄를 떠나야 한다.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하심에 주목하게 하려, 오늘 본문의 사건도 여전히 이고 지고 안고 사는 죄의 문제를 없이 하게 한다.
언젠가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실 때, 기브온 사람은 가나안 땅의 기브온 성에 살고 있던 사람들로 이들은 본래 진멸의 대상이었다(신 7:1-5). 그러나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당시 이스라엘과 여호와의 이름으로 화친하였다.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조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수 9:15).” 그렇게 해서 “회중 족장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치지 못한지라 그러므로 회중이 다 족장들을 원망하니 모든 족장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하였은즉 이제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리라(18-19).” 했던 사실이 있다.
따라서 사울 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을 깨고 기브온 거민들을 죽인 행위는 ‘하나님의 성호’를 가볍게 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실추시킨 것이다. 저들 ‘기브온 사람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들이었다. 기브온 사람은 히위 족속이다(수 11:19). 아모리 족속은 가나안 땅의 이방 민족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기브온 사람이 아모리 사람 중에 남은 자라 불리었다. 하여 이 일이 이처럼 위험한 것을 두고,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고후 6:14).” 하신 말씀도 다시금 주목하게 된다.
은연중에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에서 자칫 오늘 말씀과 같은 일로 시련을 당하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가령 안 믿는 상대와 결혼하여 믿게 하면 전도가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있으나 그만큼 짊어져야 하는 삶의 질고도 각오해야 한다. 더 나아가 믿지 않는 상대를 따라 자신의 믿음과 신앙이 약화되거나 갈 길을 잃는 경우도 허다하다. 가령 아무개의 경우 저는 나이 많은 신랑을 얻었는데 천주교인이었다. 결혼 전에는 ‘교회는 같다’는 소리로 남편 되는 이가 교회를 같이 다닐 것처럼 했으나 이내 성당을 고집했고 나중에는 자신도 안 다니면서, 교회로는 못 가게 하였다. 같은 양상으로 또래 누가 안 믿는 신랑과 결혼했는데 저는 차라리 자신은 안 믿지만 교회 가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렇듯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하신 데 따른 의미를 바로 알지 않으면 지금 좋은 것으로 평생을 이고 지고 살아야 할 수 있다. 어제는 아이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내가 알기로 저의 모친도 그런 경우라, 안 믿는 부친과 결혼하면서 오늘은 서로가 믿지 않는 자들로 살고 있다. 모처럼 쉬는 연휴라, 주일에 교회 간다고 뭐라 안 그러시던가? 하고 부모의 입장을 물었더니 아이는 그 정도는 아니라며 멋쩍게 웃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한다는 것은 그만큼을 돌아갈 길을 각오해야 한다. 이는 결코 가벼울 일이 아니다. 나는 가끔 믿음 안에서 외로움을 느낀다. 어떤 사안을 두고 신앙 안에서의 대화가 어렵거나 서로 같이 기도를 부탁하고 합심하여 기도할 수 있는 여력이 우리 사이에는 아직도 부족하다. 늙으신 장모도 그렇고 아내는 가끔 두렵다며 ‘지옥’을 두고 확신이 없다. 이는 말로 어찌 설명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하나님과 나’의 문제로 각자 개별적인 관계라, 오늘 이 ‘기브온 사람들’ 또는 ‘아모리 사람들’과 맺은 언약으로 인하여 겪는 기근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다.
이에 답은 하나다. 기도로 이겨내야 한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1)” 하여 다윗은 “다윗이 그들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하니(3).” 하고 해결방안을 찾았다. 곧 성경은 일갈하시길,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암 5:15).”
이는,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2-13).”
누구라도 섣불리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자 사이의 일이 어찌 될까? 할 때 함부로 자신하지 말아야 한다. 결과적으로는 믿는 자를 하나님이 끝내 돌이키시고 붙드시나 그 시간은 짧지 않아서 누구는 일생을 걸려 비로소 놓여나거나 뒤늦게 돌이키게도 한다. 선뜻 자신할 일이 아닌 것이다. 좋을 때야 그 모든 것을 짊어질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무개 딸은 기어이 안 믿는 가정에 흡수되어 교회를 등지고 산다. 결혼 전에 철썩 같이 약속했으나 그만큼 소진해야 하는 세월이 너무 길다. 누구 두 부부는 신앙으로 서로 하나 되어 정말 다들 기특한데, 양가 부모가 모두 안 믿는 가정이라! 명절 때나 제사 때마다 두 부부는 괴로워한다. 그렇다고 늙으신 부모들을 등지고 살 수도 없고….
섣불리 주의 이름으로 맹세하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반드시 요구하신다. 나는 이에 따른 ‘기근’으로 은혜였다고 이제는 고백하지만 얼추 2, 30년 가까이 나름은 세상을 즐기며 살다 돌이킬 때의 시련이라니…. 그때에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리했다고 한다.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2).” 그러니 섣부르다 하는 것은 자칭 열심은 화를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사울의 열심은 원칙상 율법의 조항과 일치할지 모른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신 7:2).” 그러나 동시에 또 율법과 충돌한다. 즉 저들과 주의 이름으로 화친한 것 때문이다. 결국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어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아끼고, 아야의 딸 리스바, 사울의 딸 메랍 등의 자녀 일곱을 내어주었다. “자손 일곱 사람을 우리에게 내주소서 여호와께서 택하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목 매어 달겠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내가 내주리라 하니라(삼하 21:6).” 이 끔찍하고 잔인한 해결은, 우리 현실에서도 같다.
다만 오늘 우리가 은혜의 시대를 살면서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하여 오늘 아침, 새삼 주의 은혜로 내가 참 복이 많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막 8:37).” 함부로 사랑하고 좋아해서 자신의 신앙을 확신하는 오류에 빠지면 안 된다. 우리의 믿음도 사랑도 주의 권능으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어서,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민 30:2).”
그러므로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12:1).
오늘 나는 이 말씀으로 크게 즐거워하는 자인가? 그렇다면,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2-3).
축복은 한 길에 있다.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
(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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