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삼하 23:2-4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안이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시 114:1-2
‘자신을 높이 올리운 자’라 표현하는 다윗의 고백으로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높일 때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 올리신다. 다윗으로는 저를 왕으로 올리셨고 민족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 세우셨다. 비천한 일개 목동에서 저가 한 민족의 왕이 되었을 뿐 아니라, 오늘 날 온 세계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표징이 된다.
이를 저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하고 자신하였다(2). 여기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은 ‘내 안에서 말씀하셨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이 감동하신 상황을 설명한다. 다윗은 자신의 찬송이 사적인 감상에 따른 노래가 아니라는 것을 밝힌다. 곧 하나님의 영이 주도하심으로 그 의미는 계시와 예언의 말씀으로 승격한다.
곧 내가 성경을 묵상하고 이를 정리하고 생각하며, 초안을 잡고 원고작성을 하는 내내 하나님의 영이 나의 이해와 지식을 주장하신다. 그리고 이를 말씀을 선포할 때에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즉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전하게 하시는 말씀을 따라 하게 하신다. 이를 강하게 경험했던 것은 누구의 병실에서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저에게 기도와 말씀으로 함께 하실 때의 그 생생한 ‘어쩔 수 없음’이다.
나로서 ‘어쩔 수 없음’이란 표현을 쓰는 것은 나는 언제부턴가 내 임의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고 그 많은 곳이나 새로운 자리에 가지 못한다. 이것을 병적으로 그러하다 해도 달리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심지어는 병원에 갔을 때도 사람들이 왁자하니 가득하면 기다리는 그 시간이 더욱 고역이다. 한의원에서도 정형외과에서도 진료를 받고 대기하면서 ‘꼼짝 못하는 어떤 상황’이 공포로 다가온다. 기다리다 몇 번을 화장실에 들락거릴 정도로 긴장하고 힘들어한다. 더욱이 누구 새로운 사람이나 환경, 자리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한다고 할 때 나는 그런 자리를 피하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말의 힘’이 있다.
다윗이 오늘 자신의 입술을 주장하는 주체가 자신의 감정이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리하신다고 할 때, 나는 그 의미를 이해할 것 같다. 가소롭게도 나는 가족들이 전부인 예배 시간에 앞서서도 안정제를 먹어야 한다. 그러니 나는 그야말로 ‘꼼짝 못하고’ 여호와의 신 곧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만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 전에는 그래도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고 제법 변죽 좋게 말도 잘하면서 그런 사교적인 자리를 좋아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임의로 막으신다.
그러니 오늘 다윗의 고백이, 지금 자신이 성령의 완전한 지배하에 있음을 고백하는 것임을 이해한다. 이와 같은 ‘성령의 완전한 지배’를 <성령 충만>이라 부른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즉 내가 임의로 자화자찬하듯 떠들어대는 말과 다르다. 자신의 신념과 확신으로 주장하는 연설이 설교가 될 수 없다. 그래서도 일련의 사태에 거리에서 사람들이 예배하며 설교를 빙자하여 자기 연설로 정치적 선동을 하는 것에 분노했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성경을 읽을 때, 들을 때도 성령의 감동으로 그리해야 하듯이 찬송과 찬송으로 노래하고 화답할 때도 ‘범사에’ 예수 이름으로 ‘감사하며’ 서로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나 가능하여서 ‘피차 복종하게 한다.’ 이것으로 교회가 하나 되게 하심인데,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1:8-10).”
하여 오늘도 다윗의 노래는 신적인 권위를 가진다. 이를 들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하고 선언한다. 이는 앞에서 선지자들이 주의 뜻을 전하는 데 있어 가졌던 두려움으로 주를 경외하는 마음으로다. 곧 다윗의 시와 노래의 기원은 하나님이심을 밝혀 준다. 곧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이와 같은 저의 노래에 동감하게 되는 모든 성도들의 동일한 감동이다. 누가 이 글을 읽을 때 내가 주 안에서 받은 감동이 저에게 전달되기를….
어제 우연히 랩으로 부른 CCM을 들었는데 그 가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다비드 남)과 <그의 빛에 살면>(조수아)의 찬양을 듣다 눈물이 와락, 고였다. 물론 나는 그런 비트나 노래 형식에 익숙하지 않다. 그렇게 보수적이라 여겨지지는 않는데 찬양이 너무 대중적이거나 감성적일 때 다소 감동이 덜하기는 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어제 저 두 찬양에서 이상하게(?) 랩의 가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찬양에서 눈물이 핑, 돌면서 마치 나의 이야기로 나의 고백 같아서 울컥했던 것 같다. 저절로 주님, 하고 나의 날들이 새삼스러웠다.
이로 보건대 오늘 다윗이 시에서 사용하는 이 호칭,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구속 사역과 연결된다. 그 주인은 의로운 통치자 메시아를 다루고 있다. ‘이스라엘의 반석’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비유적 호칭이다.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삼하 22:3).” 반석, 방패, 구원의 뿔, 높은 망대, 피난처, 구원자 등 모든 표현이 구속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이에,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22:47).”
우리의 이 ‘반석’은 흔들림이 없는 하나님의 불변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거대한 바위 덩어리 같이 영구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반석의 속성’과 ‘다윗 언약’이 이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삼하 7:8-9).”
목동에서 왕으로 삼고,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하고 그 모든 일을 주관하심을, 이는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하여 저는 모든 믿는 자들의 표본이 되었다. 그렇듯 반석은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를 심고 그를 거주하게 하고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하며 …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10-12).” 하심으로 메시아가 그 뒤에 있으심을 약속하셨다.
이 놀라운,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그래서도 더욱 샘나는 이 일에 대하여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13-15).” 여기서 이제 ‘그’의 자리에 ‘내가’ 있음을 확신하면서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16).”
이제 이와 같은 언약이 다윗 한 사람의 것이 아님을 안다. 이를 기초로 하는 ‘확신의 시’로서 한번 약속하신 사실을 결코 변개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불변성과 신실성을 오늘 우리도 안다. 앎으로 이와 같은 말씀에 공감하고 아멘,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하실 때 오늘 내게 두시는 나의 몸을 비롯하여 모든 사정과 여건과 상황이 모두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음을 고백한다.
결국 나로 하나님을 높일 때 하나님이 나를 높이심으로, 이는 모든 성경의 관점으로 일관되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하심의 원이로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눅 14:10).” 일상에서 내가 나를 높이지 않고 주가 나를 높이시도록,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하시는 이와 같은 말씀들이 모두 같은 목소리로 외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이를 위하여는 베드로 사도의 다음 말씀으로 그에 따른 원인과 결과로 접근할 수 있다. 곧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7).” 우리가 보면 다 알듯이 자신을 높이는 자의 특징은 염려 때문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그 이상과 목표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고 지레 염려가 근심이 또 불안과 갈등이 고조되다 기어이 자신이 어떻게 하려는 생각에서 교만이 자란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부추기는 세상의 표준이 그러하다. 저들과 우리가 다른 점은 같은 불안과 근심으로 시달린다고 하나, 우리는 이내 주께 맡긴다. 주께 맡김으로 주의 돌보심을 바란다. 나의 바람은 현실이 되어 평안이 깃든다.
결국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어, 한 성령으로 오늘 이 말씀 앞에서 나 역시 또한 같은 성령으로 감동되어 이 글을 읽거나 묵상을 쓴다. 수천 년 전 예레미야 선지자에게도 “너는 두루마리 책을 가져다가 내가 네게 말하던 날 곧 요시야의 날부터 오늘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와 모든 나라에 대하여 내가 네게 일러 준 모든 말을 거기에 기록하라(렘 36:2).” 하셨듯이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5).”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계 1:1).”
하심 같이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 23:2).” 하고 찬송하게 한다. 이에 정의롭고,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렘 23:5, 33:15).”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경외심을 갖는다.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
(시 7:8).
나의 성실함이란 오직 주만을 바라고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 앞에 엎드리는 것으로, 다윗은 언제나 역대 유다 왕들의 기준이 되었다.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행한 대로 다 행하였어도…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왕하 14:3, 18:3, 22:2).”
이와 같이 오늘 나의 하루도 누군가의 발자취가 될 것인데,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34:23-24).”
곧 우리에게는 예수의 말씀으로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3-5).” 이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1-2).” 오늘의 나로도 그리 살게 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안이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114:1-2).
그렇게 오늘도 아이와 나눌 말씀을 준비하며 마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히 2:1-4).”
‘그러므로’는 ‘아들인 그리스도가 천사들보다 우월한 존재이므로’ 하는 앞의 내용을 이어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할 때, ‘들은 것’은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 복음이 되신 ‘케리그마’를 위하여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즉 ‘더욱 주의하고 숙고하라’는 것이다. 말씀을 모를 때나 어설프게 알 때는 와 닿지 않는 말씀으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하시는 경고에 더욱 유념한다.
왜냐하면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하여 도로 위에도 여러 표지판이 경고한다. ‘사고다발지역’, ‘속도를 낮추시오’, ‘어린이보호구역’ 하는 식으로 각 도로마다 속도를 제한하기도 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다 어느 순간 ‘흘러 떠내려’ 가는 영혼들이 어디 한둘이었던가?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듯이, 그러므로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이는 곧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계시하여 전하여준 여러 말씀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하는 것은 앞선 믿음의 사람들의 행적을 통해 보고 듣고 배우는 게 없다면, 살아서 사는 동안에 기어이 허송세월 다 보낸 뒤에나 깨달으면 좋으려나? ‘어찌 피하리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 가룟인 유다처럼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가거나… 도마와 같이 의심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하거나, 기어이 베드로와 같이 세 번씩 부인하는 자리에 빠지거나… 어찌 피하리요? 하고 성경은 역설적으로 묻는 것이다. 곧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이다. 주로, 자주, 늘… 성경의 일관된 목소리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을 우리는 잃지 말아야 한다.
이에 ‘하나님도,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곧 복음을 들은 자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여’ 그들이 전하여 복음을 선포할 때, 확증시켜주신다. ‘표적’은 기적의 의미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을 우린 모두 간증으로 삼았다. ‘기사들’은 가시적으로 실제 일어난 ‘경이로운 기적’을 의미한다. 또한 ‘여러 가지 능력’이 있었다. 앞전에도 설명한 것처럼 누구의 병실에서 나 같은 자로 말씀을 전하게 하실 때의 그 ‘능력’이다.
끝으로 ‘성령의 나눠 주신 것’이 있다. 이를 소유격 ‘의’로 볼 때 ‘성령의’는 목적격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성령’을 의미한다. 나로서는 이해와 상식으로 감당이 안 되는 내 안의 믿음도 그런 것이다. 또한 ‘성령의’를 주격으로 보면 각각 ‘믿음의 분량대로 각 사람에게’ 성령께서 나눠주신 은사가 있다. 저마다 다른 듯하나 모두는 같은 목적으로 한 뜻을 행한다.
이상, 네 가지 ‘표적, 기사들, 여러 가지 능력,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 오늘 우리는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히 2:3).” 그러므로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4).”
곧 오늘 우리 삶 가운데서 하나님이 더하시는 증거들로 산다. 이에 다윗의 노래로 마무리하면,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 27: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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