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고로 히람과 솔로몬이 친목하여 두 사람이 함께 약조를 맺었더라
왕상 5:12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시 119:130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공급하신다. 오늘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 데 있어 “솔로몬이 기름 부음을 받고 그의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되었다 함을 두로 왕 히람이 듣고 그의 신하들을 솔로몬에게 보냈으니 이는 히람이 평생에 다윗을 사랑하였음이라(1).” 저로 기뻐하게 하시고, “이에 솔로몬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당신이 사람을 보내어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거니와 내 백향목 재목과 잣나무 재목에 대하여는 당신이 바라시는 대로 할지라(8).” 이에 응하여 성전에 필요한 재료를 공급하게 하신다.
이와 같이 주의 일에 있어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시고 공급하시는 주의 손길을 나는 누구보다 직접적으로 체험하며 살아왔다. 신학을 공부하는 데 있어 학부와 대학원을 그때마다 주가 예비하신 손길로 채우셨고, 나는 거저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시작하고 오늘까지도 비록 가난하고 그 숫자도 터무니없이 적을 뿐이지만 그래서도 어찌 운영이 가능할까 싶은데 늘 그때마다 주가 돌보시고 공급하심을 체험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하여 나는 언제부턴가 여러 가지 필연적인 어려움에서 놓여났다. 먼저는 가장으로서 일정 기간 수입을 책임져야 한다는 데서 예외가 되었다. 늘 잔고는 바닥이고 가진 게 없으면서도 궁색함으로 마음을 졸이지 않게 하신다. 바울 사도의 표현과 같이 일체의 비밀을 깨달은 바, 자족하게 하는 비결을 알았다. 또는 사람을 대하고 사귀는 데 있어서도 예전 같이 사람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하여 나는 자주 더욱 말씀 묵상하는 일과 이처럼 이를 글로 쓰는 일에서 열심을 다하게 된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주께서 또 다른 일에서 놓여나게도 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나로 사는 그 자체로 사역이 되었고, 내 곁의 한 영혼으로 위하고 섬기는 데서 분수에 넘치지 않도록 한다. 오늘부터는 저녁에 교회로 올라와 자고 묵상을 하고 글을 쓴다. 겨울 동안에 잠시 멈추었던 것인데, 이처럼 가만히 밤 시간에 고요한 시간을 차지하게 하심이 복이다.
오늘 본문으로 다시 넘어오면 “당신도 알거니와” 하고 솔로몬은 성전 건축에 대한 비전을 히람에게 알린다. “당신도 알거니와 내 아버지 다윗이 사방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들을 그의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나이다(3).”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는 히람이 평생에 다윗을 사랑하였음이라(1).” 하는 사실을 솔로몬은 알고 있었다. 하여 히람에게 전하기를,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에 내가 너를 이어 네 자리에 오르게 할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라 하신 대로 내가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려 하오니(5).”
두로 왕 히람은 솔로몬의 교역 제의를 받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강력한 세력을 지닌 이스라엘과 탄탄한 정치적 우호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적 통상 관계로 자신들도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베니게(두로와 시돈) 지역은 좁은 해안 지대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작물 재배가 여의치 않았다. 따라서 베니게는 이스라엘에 곡물 수입을 의존해야만 했다. 하여, “내 종이 레바논에서 바다로 운반하겠고 내가 그것을 바다에서 뗏목으로 엮어 당신이 지정하는 곳으로 보내고 거기서 그것을 풀리니 당신은 받으시고 내 원을 이루어 나의 궁정을 위하여 음식물을 주소서 하고(9).” 서로 필요한 물자의 교역이 성사되었다.
이때 저의 입으로 “여호와를 찬양할지로다” 하고 주를 인정하였다. “히람이 솔로몬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이르되 오늘 여호와를 찬양할지로다 그가 다윗에게 지혜로운 아들을 주사 그 많은 백성을 다스리게 하셨도다 하고(7).” 찬양할지로다,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무릎을 꿇는다’는 의미다. 찬양이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는 행위’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찬양은 히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유일신으로 믿고 하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히람이 다스리던 베니게에도 다신 숭배와 바알 숭배가 성행했다. 그러므로 히람은 단지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로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를 인정했던 것이다.
그가 아는 신이 ‘다윗에게 지혜로운 아들을 주셨다.’ 부친 다윗과 마찬가지로 히람은 솔로몬과도 계속 화평을 유지하기를 원했다. 이를 통해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려는 솔로몬의 요구가 두로 왕 히람에게 ‘지혜롭게’ 비쳐졌다. 사실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해 많은 준비를 살아생전에 했었다.
“다윗이 명령하여 이스라엘 땅에 거류하는 이방 사람을 모으고 석수를 시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돌을 다듬게 하고 다윗이 또 문짝 못과 거멀 못에 쓸 철을 많이 준비하고 또 무게를 달 수 없을 만큼 심히 많은 놋을 준비하고 또 백향목을 무수히 준비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이 백향목을 다윗에게로 많이 수운하여 왔음이라(대상 22:2-4).”
이때 벌써 많은 기술자와 및 백향목을 두로와 시돈으로부터 공급받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두로 왕 히람 역시 이러한 다윗의 성전 건축 준비 작업을 이미 도운 바 있다. “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절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그들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삼하 5:11).” 따라서 히람은 다윗의 성전 건축에 대한 열망을 잘 알고 있었다. “또 백향목을 무수히 준비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이 백향목을 다윗에게로 많이 수운하여 왔음이라(대상 22:4).”
그때 다윗의 성전 건축이 좌절된 것은 표면적으로는 ‘사방의 전쟁으로 인하여’ 그러했다. 하나 이는 주께서 이를 용납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곧 모든 게 다 때가 있어서 누구는 원하나 그리할 수 없었고, 누구는 다 준비된 것으로 순탄하였다. 우리는 오늘에도 같아서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실은 이보다 더 복된 은혜가 또 있을까?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교회나 성전의 의미가 외형적인 교회나 건물로 인식되면서 소위 ‘하루살이 거처’로 주일 하루 한 번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여기는 경우도 허다한데, 그러니 더러 사는 게 참 팍팍하다. 그러나 성경은 이르시길,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나의 일상이 주의 날들로 성전이 되어서 사는 동안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곧 주가 우리로 교회 삼으신 데는 평안을 주시기 위함이다. 요즘은 한 시간 이상 동네 조금 먼 곳까지 걷곤 하는데 느린 걸음으로지만 주변의 여러 풍경이 눈물겨울 때가 있다. 몸도 불편한 노인이 파지를 주워 위태로운 수레로 옮기는 모습에도, 길거리 한쪽 구석진 데 앉아 나물과 기름을 하는 어느 노파의 꾸부정한 허리에도, 한참씩 더딘 걸음에도 바삐 돌아가는 삶의 추가 그러해서인지 그렇게 다시 아파트 단지로 들어오고 나면 가끔씩은 기시감이 들기도 한다. 마치 다른 세계를 다녀온 것 같기도 하고….
다윗이 그토록 성전 건축을 소원하였으나 하나님은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고, 그러나 다윗은 잦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성전 건축의 때가 오면 필요한 것들을 미리 예비하였다. 비록 하나님이 보시기에 평화의 성전 건축에 다윗을 적격자로 삼으시지 않았지만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대상 22:8).” 그는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즉 다윗은 ‘성전 건축을 목적으로’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신 12:5).” 필요한 것을 예비하고 그에 따른 관계를 형성하였던 것 같이,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으로 내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11).”
이에 오늘을 살면서 예전의 내가 아니라서 참 좋다. 조용한 교회에서 이처럼 고요하게 글을 쓰고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것으로도 ‘오직,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하신, 지금 이 시간, 장소’ 등 이를 통하여 ‘전을 건축하는 삶’으로의 또 하루를 살고 있다는 것, 비록 너무 부족하고 미약하기 짝이 없지만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한 날 한 시의 모든 삶이 주 안에서 세워져가기를. 이에,
“당신도 알거니와 내 아버지 다윗이 사방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들을 그의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나이다(왕상 5:3).”
할 때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즉 발아래 앉는, 종속관계로 이방의 원수들과 우리의 관계 설정을 돌아보게 한다. 다들 너무 공평과 평화를 운운하여 이런 소리가 마뜩찮을 수 있지만, 우리는 죄에 종속되지 않음으로 세상에 굴하지 않고, 세상에 굴종하지 않을 때 다들 사느라 아등바등 여념이 없는 일에서도 놓여나서 산다. 즉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하지는 않는다. 이는,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 8:6-9).
더욱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억매이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정복이고 승리의 삶인가를…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사 63:3).” 그리하여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롬 16:20).” 더는 세상이 나의 왕 노릇할 수 없다. 사람으로 인하여 연연해하지 않는다. 오직 나로 주의 성전이 되게 하심으로,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119:101-102).
이때야 비로소 확실히 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105).
그러므로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사오나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나이다
…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109, 114).
하여 오늘도,
나는 주의 종이오니 나를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들을 알게 하소서
(125).
그리하여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
나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어떤 죄악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
(130, 133).
이에,
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규례들이 나를 돕게 하소서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175-17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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