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전봉석 2025. 5. 14. 22:50

 

솔로몬 왕이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만드는 모든 일을 마친지라 이에 솔로몬이 그의 아버지 다윗이 드린 물건 곧 은과 금과 기구들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성전 곳간에 두었더라

왕상 7:51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시 121:5-6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을 섬긴다. 솔로몬이 그의 거처할 궁을 지었다. 저의 왕궁은 성전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의 통치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바랐다. 이는 다니엘이 비록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서 저들의 내각에서 일을 하였으나 하루 세 번 정한 시간에 주 앞에 기도하였던 것과 같은 의미다. 설령 그것이 죽음을 부르는 일이 된다 해도,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세상을 산다.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으로 바라며 산다. 고로 하나님께 속한 자들로,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요 17:15-16).” 이에 우리가 오늘도 세상에 있음은 더 나은 본향의 예비 된 영광을 더하기 위함으로,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1).”

 

하여,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 9:6).”

 

하는 원리와 같다. 이를 앎으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아니면 그저 천국 가는 것으로 족할 뿐 더 나은 구원을 위해 뭐 그리 애쓰고 수고하여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할 필요가 있겠나? 한데도 성경은 이르시길, 우리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하는 구분이 있다.

 

하여 우린 오늘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하시는 데서, 이는 ‘성령을 소멸하지 않는 일’로,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19-22).” 하심을 명심하게 된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16-18).” 곧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 때,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19).” 하심을 바로 안다.

 

방금 전 저녁에 가정예배로 드릴 때에 이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면서, 이는 의무와 명령으로 우리가 반드시 그리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성령을 소멸하지 않는 일이란, 기뻐할 수 없을 때도 기뻐하고 이를 위해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으로 가능하여서, 범사에 감사할 때 그리 행할 수 있는 성령의 역사이었다.

 

오늘 본문은 솔로몬이 자신이 거처할 궁을 세우는 데 있어 성전을 앞에 두고 그리 하여, 보좌의 낭실(재판하는 낭실) 뒤편에 왕이 거처하는 궁이 있었다. 이궁은 레바논 나무 궁이나 재판하는 낭실과 달리 솔로몬이 사적으로 생활하는 장소였다. 이를 저는 화려하게 꾸며 ‘백향목과 상아 장식 등이 사용되었다. “왕이 또 상아로 큰 보좌를 만들고 정금으로 입혔으니 그 보좌에는 여섯 층계가 있고 보좌 뒤에 둥근 머리가 있고 앉는 자리 양쪽에는 팔걸이가 있고 팔걸이 곁에는 사자가 하나씩 서 있으며 또 열두 사자가 있어 그 여섯 층계 좌우편에 서 있으니 어느 나라에도 이같이 만든 것이 없었더라(10:18-20).”

 

이는 솔로몬이 결혼한 바로 공주를 위해서도 자신의 거처와 같은 식으로 궁을 마련해 주었다. 이는 주의 궤가 있어 거룩함을 위한 것이었다. “솔로몬이 바로의 딸을 데리고 다윗 성에서부터 그를 위하여 건축한 왕궁에 이르러 이르되 내 아내가 이스라엘 왕 다윗의 왕궁에 살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궤가 이른 곳은 다 거룩함이니라 하였더라(대하 8:11).” 이 궁은 솔로몬의 모든 부인과 후궁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단지 바로의 공주만을 위한 사저였다. 그만큼 애굽의 위세와 더불어 솔로몬의 부인 중 으뜸의 지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이를 위하여 “솔로몬 왕이 사람을 보내어 히람을 두로에서 데려오니 그는 납달리 지파 과부의 아들이요 그의 아버지는 두로 사람이니 놋쇠 대장장이라 이 히람은 모든 놋 일에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구비한 자이더니 솔로몬 왕에게 와서 그 모든 공사를 하니라(왕상 7:13-14).” 여기서 솔로몬은 사람을 보내어, 즉 왕의 대리자를 보내어 히람을 데려왔다. 히람은 뛰어난 놋 기술자였다. “내가 이제 재주 있고 총명한 사람을 보내오니 전에 내 아버지 후람에게 속하였던 자라(대하 2:13).” 히람은 모세 시대의 성막 제조 기술자인 브사렐(출 31:2-5)과 비견될 수 있는 인물로 놋 뿐만 아니라, 금은동철 및 돌과 나무, 천을 다루는 일에도 탁월한 기술을 지니고 있는 장인이었다.

 

“이 사람은 단의 여자들 중 한 여인의 아들이요 그의 아버지는 두로 사람이라 능히 금, 은, 동, 철과 돌과 나무와 자색 청색 홍색 실과 가는 베로 일을 잘하며 또 모든 아로새기는 일에 익숙하고 모든 기묘한 양식에 능한 자이니 그에게 당신의 재주 있는 사람들과 당신의 아버지 내 주 다윗의 재주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대하 2:14).”

 

이처럼 하나님은 그때에 필요한 인재를 두셨다. 복음을 전하는 때에도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로 적재적소에 맞게 그 쓰임을 다하도록 하신다. 즉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오늘 나의 이 하는 모든 일에서도 주의 뜻을 따라 주가 원하시는 바 그 사용하시는 ‘그릇이 되어,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하심인데, 동역을 통해 사명을 완수한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막 6:7-10).” 부르셨고 각각 그 쓰임에 따라 사명을 맡기셨다.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눅 10:1-2).”

 

곧 솔로몬은 그 시대에 맞는 주의 일꾼으로 저는 지혜의 왕으로 사용하셨고, 솔로몬은 당대의 장인 히람을 불러 동역자로 삼았다. 곧 우리의 어떤 인간적인 조건이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할 수 없다. “그는 납달리 지파 과부의 아들이요 그의 아버지는 두로 사람이니 놋쇠 대장장이라 이 히람은 모든 놋 일에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구비한 자이더니 솔로몬 왕에게 와서 그 모든 공사를 하니라(왕상 7:14).” 히람의 모친은 납달리 사람으로 유대인이었으나 부친은 두로 사람으로 이방인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을 때 그러한 조건이 제약이 되지 않는다.

 

사사시대 에훗도 왼손잡이였는데, 다른 해석으로는 ‘오른손이 닫힌 사람’이라 하여 짐작컨대 오른손 장애가 있던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저를 불러 주의 일에 사사로 세우셨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삿 3:15).” 또는 베드로와 요한은 당시 무식한 어부였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행 4:13-14).”

 

그러니 우린 사람의 외모나 학벌, 지위를 보고 평가하기 일쑤인데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할 때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차별 없이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거든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신 1:17).” 이에 교회는 열린 품과 같이 하나님의 품으로 모두를 품어야 한다. 히람은 그렇듯 쓰임을 다하였고, 베드로도 이를 증언할 때에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이에 비로소 “솔로몬 왕이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만드는 모든 일을 마친지라 이에 솔로몬이 그의 아버지 다윗이 드린 물건 곧 은과 금과 기구들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성전 곳간에 두었더라(왕상 7:51).” 하고 성전과 왕궁을 끝마쳤다. 이를 연결하면서 오늘 시편이 주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두 번째 편으로 우리가 그때마다 두리번거리며 도움을 찾는 데 따른 올바른 자세를 일러준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 121:1-2).

 

역사적 배경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유다를 향해 출발 할 때, 우린 가야할 길에서 두리번거리며 도움을 바라게 된다. 낯설고 두렵고 어려울 때 의당 어디서 도움이 없을까? 하고, 일반적으로 순례자들의 여행길에서 그러한 도움을 바라듯 ‘하나님의 지켜 주심’에 대해 감사의 노래로 걸음을 옮겨놓는다.

 

결국 하나님 안에서만 진정한 만족과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신앙 고백이 저절로 나오는 것은 여러 상처와 배신과 올무가 도처에 있고, 외면서 냉소가 가득함을 알 때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에 더욱 찬양이 드려지게 된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올꼬?” 하는 물음을 살면서 사는 내내 드는 심경이다. 이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2).

 

하는 이 놀라운 깨달음이 어떠한 어려움이나 고난을 겪으면서 더욱 확실해져서 우리는 비로소 쉬지 않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게 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3).

 

곧 어떠한 위험도 우리를 삼키지 못하게 하심으로 완벽하게 보호하시는 분임을 노래한다. 내일 아침에는 오늘 못한 아이와의 성경공부를 하게 되는데, 아이가 보낸 성경구절은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6-18).”

 

이에 우리는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한다. 맹세는 다투는 일에서 최후 확정이 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상기시켜(17절) 당시 일반 사람들이 하던 맹세와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맹세는 결정적이고 구속력이 있다. 더욱이 구약에서 맹세는 맹세하는 사람보다 더 크고 위대한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는데,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신 6:13).”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10:20).” 함으로, 만일 맹세를 하고 이를 어기면 제 3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하심에 어긋난다. 하여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신 5:11).”

 

곧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이 되셨다.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은 불변하심을 의미한다. 그렇듯 하나님은 약속하신 바,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그러므로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삼하 7:9).”

 

이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하시고,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사 43:2-3).”

 

하심으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 대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신 보증이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8).” 그렇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6:13)” 하심을 명심할 때,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17).” 바로 이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가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

 

하나님께서 “맹세”하여 보증하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성취하신 것이다.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6:20).” 이에,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121:5-6).

 

하시는 오늘 시편의 말씀으로도 확신하여,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7-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