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전봉석 2025. 5. 23. 21:14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왕상 16:34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시 130:3-4

 

 

마치 악의 행렬을 보는 듯하다. 어쩜 이렇게들 하지 말라하신 것만 골라서 하는 것일까? 더욱이 마지막 구절의 내용이 압권이다.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 시대’는 ‘그의 날들’이란 뜻으로 그의 시대, 아합의 때, 그의 통치 동안에 있었던 일로 지목한다. 여리고는 본래 베냐민 지파에 배당되었다. “베냐민 자손의 지파가 그들의 가족대로 받은 성읍들은 여리고와 벧 호글라와 에멕 그시스와(수 18:21). 그런데 결국 10지파 반에 속하여 북이스라엘에 편입되었다(12:16-20).

 

이후 북이스라엘의 국경에 있는 성읍이 되었다. 아합 왕은 이 여리고 성읍을 재건함으로 요단을 가로지르는 길목을 장악하려 했을 것이다. 그때 히엘은 이 건축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히엘이 여리고를 재건하는 동안에 두 아들을 잃는다. 이는 곧 일찍이 여호수아가 경고한 내용에 있었다.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수 6:26).”

 

당시의 예언은 벌써 500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이러한 경고를 잊었거나 희미해져 무시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성경은 일찍이 밝히신 바,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삼상 15:29).” 이에 예수님도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곧 우리가 왜 그 무엇보다 말씀을 중심으로 말씀에서 길을 열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점심께 산책을 하며 모처럼 친구와 통화를 했다. 성경공부를 하지 않으면서부터 전화통화가 뜸해졌다. 매일 묻는 안부나 일상은 여전하였다. 요즘은 저녁에 교회에 올라가 잠을 자면서, 같이 어느 날을 정해 성경공부를 하지 않겠나? 하고 물었다. 같이 묵상을 하고 묵상한 것을 서로 나누자고 하는 말인데, 저는 발끈하듯이 되받았다. 주일이고 수요일에도 예배를 나가고, 운전하면서 찬송도 하고 그러는데 무슨 또 성경공부를 하느냐는 것이다. 회사 일이 바빠서 요즘은 성가대 연습도 부담스러워 좀 쉴까 한다면서 말이다. 차츰 시력이 안 좋아지고, 조만간 회사도 그만두긴 해야 할 텐데…. 딱히 뭐라 더 권한다고 될 일은 아니어서 더 하고 싶었던 말을 속으로 삼켰다.

 

나는 점심마다 멀리 한 바퀴 돌아 우리 아파트 건너편에 있는 노인쉼터로 조성된 작은 공원에 앉아 땀을 식힌다. 나 역시 그러고 있으면 같이 노인으로 여겨지는데, 나는 무심히 노인들을 관찰한다. 나이가 들면서 대체로 다들 드세고 완고해지는가? 금연이란 팻말이 버젓이 쓰였는데도 무색하게 담배를 태우는 이도 있고, 서로 장기를 두면서 남들을 의식하지 않고 언성을 높이기도 한다. 때로는 마치 그래도 되는 특권이라도 있는 듯 멋대로 눕거나 양말을 벗고 맨발로 앉아 발가락을 후비거나…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어떤 의식, 자신들이 살아온 날들에 대해 스스로의 항거와 같이 당당하게 그러는 것 같다.

 

노인의 막무가내인 태도들에 나는 요즘 주의를 기울인다. 조만간 나의 외모뿐 아니라, 나이나 성향도 그와 같을 테지만… 친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그것이었다. 늙음을 준비하는 일로 나는 먼저 잠잠히 있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뭐라 할 말이 있어도 참견하기보다 관찰자로 있는 것, 어떤 일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도 남의 의사를 존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잠시 접어두기. 저마다 다르겠으나 노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신념인지 아집이 문제다. 말이 신념이지 아집이다. 그것으로 참견한다. 뭐라 자꾸 훈계하려든다.

 

또 하나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강박에서 벗어나기. 친구는 성경공부 할 시간이 없고, 성가대 연습시간도 줄일까 하면서 정작 자신의 일상에서 늘 틀에 박힌 일상을 정리하거나 줄여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뭐라도 해서 돈벌이를 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래저래 보면 돈이 궁벽한 살림은 아니다. 결국 가만히 있는 시간을 연습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 산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사방팔방 돌아친다. 그러느라 말씀 앞에 가만히 자신을 앉힐 여력이 안 된다. 한심하게 뭐하는 짓인가? 하고 되묻는다.

 

그렇게 500년쯤 흘렀을까? 오늘 여기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다. 앞서 그와 같은 경고의 예언이 있었다는 것을 저들 문화로 비춰볼 때 모를 리 없다. 결국은 말씀대로 이루어져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참혹한데 뒤늦었다. 터를 쌓을 때 맏아들을 잃었으면 멈출 법 한데, 저는 그렇듯 맏아들의 장례를 치르고도 여리고를 계속 지어가며 성문을 세울 때에 다시 둘째 아들도 잃었다. 두 아들을 잃고서야 깨달았을까?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우리 스스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게 우상이다. “열방 중에서 피난한 자들아 너희는 모여 오라 함께 가까이 나아오라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구원하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은 무지한 자들이니라(사 45:20).” 요즘은 예순 살, 일흔 살 정도는 청춘이라 할 정도로 젊다고 하는데… 말이 그렇지 대체로 지저질환 한둘씩은 이고 지고 산다. 더욱이 나와 친구처럼 육신이 남들보다 연약한 경우에는 몸의 한계가 일찍 온다. 하긴 가까운 내외도 정년퇴직하고 세계여행을 하네, 무슨 계획으로 노년을 설계하곤 했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병원에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니 계획했던 일들은 묘연해졌다.

 

“그것이 둥근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이 메어야 하느니라 그것이 그들에게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느니라(렘 10:5).”

 

그러니 남은 생에 대한 여정을 누가 장담하겠나? 또한 어느 것이 복이랄지 누가 알겠나? 누군 여가시간을 즐기느라 주일이고 성경공부고 그럴 여력이 없다. 멋들어진 캠핑카를 사서 주말이면 아이들 데리고 어디 야외로 나가는 게 요즘 저의 즐거움이다. 사는 게 뭐 있나?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이를 기억하든지 안 하든지 말씀은 이루어진다. 오늘 본문에서 이를 명심하게 된다. 욥은 말하길,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욥 23:13-14).”

 

다들 사느라 사는 데 정신 팔리기 마련이라지만 우리는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이를 바울은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후 4:7-8).”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이 경건의 훈련일 텐데, 이를 무엇으로 준비할 수 있을까?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 이처럼 오늘 본문은 말씀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죄악 된 삶이 경주하듯 이어진다.

 

하나니의 아들 예후는 그 이름의 뜻이 ‘그는 여호와이시다’이다. 예후의 아버지 하나니는 유다 왕 아사의 실책을 경고하다 옥에 갇힌 인물이다. “그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와서 그에게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대하 16:7).” 하여 그의 아들 예후는 본장에서 바아사를 책망했을 뿐 아니라, 여호사밧 왕을 아합 왕과 연합한 일로 책망하였다.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이르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부터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19:2).”

 

이처럼 예후 부자(父子)는 하나님의 신실한 선지자들이었다. 유다의 선자자 예후가 이스라엘 왕 바아사를 책망한 것은 이례적이다. 당시 예후의 예언 속에는 하나님의 끝없는 관심과 배려가 내포되어 있었다. 남북으로 분단되기는 했으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언약은 공통적이다. 우리는 말씀을 전하고 나누는 데 있어, 실은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으며 남녀가 무슨 차이가 있겠나?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2).”

 

말씀을 벗어나면 누구라도, 어느 민족이라도 ‘여로보암의 집 같이 되게 하리니’ 하는 말씀으로 경고다. 당시 바아사의 죄는 우상 숭배였다. 바아사의 가문은 ‘여로보암의 집 같이’ 되게 한다는, “내가 너 바아사와 네 집을 쓸어버려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 같이 되게 하리니 바아사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그에게 속한 자가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 하셨더라(왕상 16:3-4).” 하는 말씀 앞에서 두려워나 했을까?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결국 우리는 이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처럼 오늘을 사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노년의 생이 어찌 중요한가 하면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 않은 것이다. 이어서 디르사, 곧 세겜에 이어 두 번째로 북이스라엘의 수도가 된 왕도에서 ‘그 아들 엘라’ 곧 바아사의 아들 엘라는 ‘왕이 되니라.’ 그런데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니의 아들 선지자 예후에게도 임하사 바아사와 그의 집을 꾸짖으심은 그가 여로보암의 집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모든 악을 행하며 그의 손의 행위로 여호와를 노엽게 하였음이며 또 그의 집을 쳤음이더라(7).”

 

즉 바아사가 우상 숭배의 죄악을 저질렀을 뿐 아니라, 여로보암 일족을 살해한 일도 고발하고 있다. 다시 말해 바아사가 여로보암 왕조를 전복시키고 왕위를 찬탈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야심과 정권욕으로 인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바아사를 도구로 패역한 여로보암 가문을 징계한 것일 뿐이다. 이때는 남유다 왕 아사 제 26년의 일이다. 아사는 주전 910년경에 즉위했다. 그렇다면 이때는 주전 886년경이다. 엘라는 2년을 위에 있었다. 엘라는 이듬해에 자신의 군대장관 시므리에게 살해당했다(9-10). 엘라는 만 2년을 채 통치하지 못하고 죽었다. 앞서 나답이 당한 것과 똑같다. “유다의 아사 왕 셋째 해에 (북이스라엘의) 바아사가 나답을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15:28).

 

신복 시므리가 왕을 모반하였다. 가장 뼈아픈 죽음이다. 시므리는 북이스라엘 병거부대를 이끄는 군대 장관이다. “엘라가 디르사에 있어 왕궁 맡은 자 아르사의 집에서 마시고 취할 때에 그 신하 곧 병거 절반을 통솔한 지휘관 시므리가 왕을 모반하여 시므리가 들어가서 그를 쳐죽이고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 곧 유다의 아사 왕 27년이라(9-10).” 그러니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 127:1).

 

결국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반드시 성취되고야 만다.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0-11).” 그러므로 나는 찬송도 필요하고, 기도도 좋으나, 말씀으로 우리가 무장하여 날마다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찬송과 기도는 감정에 휘둘리기 쉬우나 말씀은 깨어있어 지각으로 의식하고 되새기며 적용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날 때 보면 말씀과 멀어졌을 때이다. 말씀이 빈 마음을 감정이 격동한다. 그럼 우린 속수무책으로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돼 있다. 나는 누구와의 만남에서 저에게 묵상 글쓰기를 권한다. 같이 나누며 성경공부를 제안한다. 공부라고 하기에는 너무 한정된 의미가 있지만 공부 곧 연마하여 몸에 밴 습관으로 나의 영혼을 연단해야 한다. 안 그러면 세상 모든 게 우상이라, 도무지 숭배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나의 의지, 나의 판단도 숭배의 대상이 된다. 자식들과 가족도 숭배가 될 수 있다. 자신은 물론 그 의지도 당연하다. 노인이 되면 유난히 더 완고하고 자기주장이 강해지는 것도 ‘먼저 살아보니 알겠더라’는 착각이 더해져서이다.

 

이 무슨, 시므리가 7일동안 왕이 되었다! “유다의 아사 왕 제이십칠년에 시므리가 디르사에서 칠 일 동안 왕이 되니라 그 때에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에게 속한 깁브돈을 향하여 진을 치고 있더니(왕상 16:15).” 그나마 시므리가 1주일 동안이라도 재위(在位)할 수 있었던 것은 기실 깁브돈 출정군이 디르사로 회군(回軍)하는 데 1주일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회군한 군대는 마침내 시므리를 왕에서 끌어내렸다. 시므리가 엘라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이처럼 단명한 것은 백성들이 그의 반란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6-18). 그 까닭은 시므리가 매우 잔인한 성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11).

 

이어 오므리가 왕이 되었다. “진 중 백성들이 시므리가 모반하여 왕을 죽였다는 말을 들은지라 그 날에 이스라엘의 무리가 진에서 군대 지휘관 오므리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매(16).” 저는 로마사에서 자주 보듯 전쟁에서 군대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다. 따라서 그가 명실 공히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군림하기까지는 좀더 많은 세월이 걸렸다. 오므리는 시므리를 제거하고도(17-18), 디브니라는 경쟁자와 약 5년간의 내전을 치렀다(21-23).

 

이는 마치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 같이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8).” 그런 가운데서도 “오므리가 이에 이스라엘의 무리를 거느리고 깁브돈에서부터 올라와서 디르사를 에워 쌌더라(왕상 16:17).” 전쟁과 전쟁, 난리와 난리가 연속이다. 결국은 다 우상 탓이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30-33).”

 

참 지긋지긋하다. 오늘도 여전한 걸 보면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 어쩔 것인가?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130:1-2).

 

늘 어느 때보다 깊은 죄악의 그늘에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3-4).

 

하면 답은 오직 하나,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5).

 

이는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