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왕상 18:21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시 132:13-14
많은 날이 지났다. ‘제 삼 년에’ 이르렀다.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1).” 이 날들은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 거하기 시작한 때부터 일컫는 기간이다(17:8-16).
많은 날이 흐르고 또 ‘제 삼 년에’라 하면서 따로 구분하는 것은 ‘엘리야 시대의 가뭄’이 3년 반 동안 계속되었다는 것을 신약에서 알림으로 그 고통의 시간이 얼마나 처절하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눅 4:25).”
즉 고난의 날은 하루가 너무 길고 그 날 수가 더디고 더 많다고 느껴져서 길기만하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약 5:17-18).” 그러므로 오늘 성경의 ‘많은 날’과 ‘제 삼 년에’는 실제 느껴야 했을 가뭄으로 인한 고통의 정도가 그만큼 더 가중되었음을 알게 한다.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가뭄을 선포한 때,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17:1).” 이를 기점으로 잡고 계산된 것은 아니다. 그 또한 때가 이르렀다.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하시는 말씀에서 끝을 알게 한다. 곧 주의 은총은 이 땅에서의 모든 고통이 어떠하든지 끝은 있다는 것이다.
이를 ‘보이라’라고 하시는데, 그 뜻은 ‘가서 만나라’ 하는 말씀인데 ‘보이라’ 하심은 ‘제시하다’, ‘증명해 보이다’ 하는 의미를 내포한다. 즉 이 동사에는 앞서 선행된 예언에 대한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는 행동을 나타내 보이라는 뜻을 함축한다.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그것은 이제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하는 말씀으로 주의 말씀은 결국 증명될 것이란 사실을 알게 한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가뭄을 예언하였고, 이제 엘리야는 그 가뭄을 종식시킬 것이다. 곧 주의 말씀은 예언으로 이를 이루실 것이며 그에 따른 선포는 공개적이고 모두가 알 수 있게 행하실 것을 알린다. 엘리야가 그 같이 선포하였고, 이를 저들 앞에서 풀어 보임으로 이러한 고난의 시간, 곧 가뭄과 같은 자연의 고삐를 쥐고 계신 분이 저들의 우상 바알과 아세라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심이 명백하게 증명한다. 사마리아는 언제부턴가 우상숭배의 온상이 되었다. 그러다 아합 때에 더욱 기승을 부려 ‘자연의 풍요로움과 생산의 풍부’를 보장하는 것이 바알 신이라 여겨졌다.
유다의 아사 왕 때에 북이스라엘의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왕이 되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사마리아에서 22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였다.’ 그것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16:31-33).”
그런 곳에 하나님은 기근을 선포하셨고, 저들은 그와 같은 가뭄으로 허덕이며 고통 가운데 있었다. 이는 모두가 바알 숭배의 허구성을 폭로하시려는 하나님의 자연적 재해를 이루신 것이다. 여기서 그 기근이 ‘심하였더라’ 하는 것은 ‘아주 맹렬하였다’는 것으로 그와 같은 고통으로 온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 가운데 시달려야 했다. 이는 모두 거짓 선지자들로 더하여 기승을 부렸는데, 선지자들 모두가 그러해서 바알을 섬기는 450명과 아세라를 섬기는 400명이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을 숭배하였다.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19).”
이때에 그들 중에 한 명 오바댜는 여호와를 섬겼다.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3).” 저는 앞전에 100명의 신실한 선지자들을 50명씩 숨겨서 살렸다.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4).” 즉 아무리 시대가 암울하고 다수가 어떠하다 한들 주 앞에 온전하고 주를 경외하는 ‘남은 자’가 모든 시대마다 있었다.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남은 자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사 28:5).”
그러니 그는 얼마나 외롭고 지치고 두려웠을까? 하나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이를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 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도 그리하리라(암 4:2).” 그리하여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신앙을 잃지 않고 산다는 일은 아무나 그리할 수 없다. 오늘 이 오바댜는 또 서슬 퍼런 아합의 궁내 대신의 신분이었다.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왕상 18:3).” 그러니 지근거리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거짓 선지자들이 포진하여 눈에 불을 켜고 자신들의 영예를 지키려하는 곳에서 주를 온전히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투쟁이었을까?
‘궁내 대신 오바댜’는 그럼에도 그리하였다. ‘오바댜’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를 섬기다’라는 뜻이다. 이 이름 속에 담긴 속뜻은 ‘노예처럼, 종처럼 섬기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좀 더 쉽게 이해하면 자신의 주장이나 판단보다 종과 같이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듯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섬긴 것이다. 곧 그의 이름 그대로 오바댜는 지극한 열심으로 여호와를 섬긴 사람이다. 당시 바알 숭배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아합의 궁중에서 고위직으로 있으면서 그가 어떻게 이처럼 여호와를 온전히 섬길 수 있었는지… 그리하여 참 선지자 100인을 숨겨주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고 가히 그 신앙의 열성이 어떠하였을지 짐작하게 한다.
이는 마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같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서도 ‘뜻을 정하여’ 주만 바라는 마음으로 오직 한 길을 다짐할 때 주가 보장하신다. 당시 우상의 제단에 드려졌던 음식을 거부하고,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단 1:8).”
말이 쉽지 이와 같은 믿음의 순수함을 지키기란 목숨을 건 굳건한 신앙을 바탕으로 한다. 오늘 이 오바댜와 같은 신앙의 인물은 구약에 여럿 있다. 먼저는 가나안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이 떠오른다. 저이는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살려주었는데,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이다.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수 6:17).”
앞서 요셉도 다르지 않다. 노예로 애굽에 팔려가 종살이 할 때도,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서도 저는 그 신앙을 지켰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도 저는 주를 경외함으로 야곱 즉 이스라엘의 70여 명을 식솔들을 살렸다. 후에 이들은 이스라엘로 약속의 민족, 하나님의 선민들로 구별되었다. 그런 중에 야곱이 죽고 형제들이 두려워할 때,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하고 묻고는,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19, 20-21).” 이 놀라운 믿음과 신앙이 저절로 갖추어진 게 아니었다. 우리가 마음과 힘을 다하여 주를 섬긴다는 것은 이처럼 놀라운 신앙을 나타내게 하는데 이는 결코 사람의 의지로는 불가능한 신앙이겠다.
내가 인연이 있는 애양원 교회의 손양원 목사님도 두 아들을 잃고, 이를 살해한 자들을 양자로 들여 훗날 주의 사역을 감당하게 하심으로 ‘사랑의 원자탄’이란 별칭이 붙기도 했다. 목숨을 걸고 이 작은 동방의 나라 조선에까지 복음을 들고 찾아왔던 아펜젤러 목사나 언더우드 선교사와 같은 분들도 주님이 세우시는 불가항력적인 은사로 이와 같은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 이후 오늘 우리의 복음이 오히려 전 세계로 나아가는데 초석이 된 수 많은 목사님들의 순교와 이름 없이 무명의 신앙으로 교회를 뿌리내리게 한 익명의 ‘오바댜’들이 있었음을 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40).”
하는 믿음으로 그 신앙을 지킨 것이다. 당시의 모든 선지자들이 그랬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거짓 선지자들이 아합과 이세벨의 혀가 되어 바알과 아세라상을 섬기는 데 앞장 섰던 때였다. 이에 엘리야의 오늘 행보는 정면 도전에 대한 보복 조처로 당당히 아합 왕 앞에 나섰다. “엘리야가 이르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 아합에게 보이리라(15).”
이에 갈멜 산에 모이게 했다. ‘여호와 종교’와 ‘바알 종교’의 대결 장소로 갈멜 산이 선택되었다.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19).” 이때 갈멜 산이 선택된 이유가 있다. 갈멜 산은 엘리야, 엘리사의 경우에서 보듯 여호와 신자들에게 특별한 장소이면서 동시에 바알에게 바쳐진 성소이기도 한 탓이다. 갈멜 산은 이스라엘과 바알 종교의 본산지인 두로 사이의 중간 지점이다.
당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각지에 퍼져 활동하고 있었다. 아합은 이들을 집합시키며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을 모이라고 기별하였다. 즉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들이 여호와의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역할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거짓이 난무하고 비진리가 진리를 대신하고 있는 오늘의 교회와 다양한 진영의 신학들을 연상하게 한다. 이에 엘리야는 외친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21).”
이는 마치 오늘 우리에 크게 외치는 음성으로 들린다. 교회는 다니고, 믿는다고 다들 믿는데 혼합 종교로 ‘예수님은 사랑을 부처님은 자비를 나타낸다’는 식으로 마치 저마다의 좋은 점(?)을 사유하려는 기독교도들도 부지기수다. 이에 엘리야가 소리친다.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우리가 살면서 여느 옳고 그름 사이에서, 선과 악의 사이에서, 그 ‘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듯한데, 죄의 반대는 믿음이다. 고로 온전한 믿음의 반대는 죄다. 믿지 않는 것과 더불어, 혼합하여 믿는 것은 같은 의미로 안 믿는 자이다.
차라리 배교를 하거나 신앙을 내팽개치면 그나마 구분이 확실한데, 어정쩡한 상태에서 믿는 것도 아니면서 안 믿는 것도 아닌 신자들이 늘어간다. 내 주변에도 교회는 안 가고, 자신을 기독교인이라 한다. 말씀과 상관없이 살면서도 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다며 자기 믿음을 확신한다. 그런 자들은 안 믿는 자들보다 패역하다.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다.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 자로 여긴다. 하여,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저들은 죽어서도 항변할 사람들이다. 현실에서도 하나님과 바알을 겸하여 섬기는 사람들, 미지근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더욱 노하게 하는 사람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결국 저들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즉 진리와 비진리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자들이 많다. 과감한 신앙의 결단을 뒤로 하고 엉거주춤 목사로 사역자로 교회도 섬기고 ‘사회’도 섬기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저들은 교회가 마치 NGO 단체인 줄 아는 것 같다. 신앙으로는 미적지근한 태도로 중용을 선택한다. 말로 미화시켜 종교적 화합을 외치기도 한다. 이에,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왕상 18:22).” 이와 같이 더러는 믿음을 바로 지킨다는 일은 극히 소수의 일로 외로운 길이다.
당시 거짓 선지자들의 총수가 850명인데 450명만 언급하여, 바알의 선지자만 지목하였는데 나머지 아세라 선지자 400명은 갈멜 산의 대결에 참예하지 않았다.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붙이지 말라(25).” 따라서 그들은 학살을 당하지 않았다.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40).”
그렇다고 바알의 선지자와 아세라의 선지자가 엄밀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모두 바알의 선지자로 통칭된다. 그렇다면 아합의 요청에도 이세벨이 아세라의 제사장을 보내지 않은 탓에 갈멜 산 대결에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만 참석하였다. 이는 후에 나머지 저들이 돌이켜 주 앞에 경건한 자들로 돌이켰을까? 그럴 리 없다.
나는 오늘 말씀에서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본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오바댜가 있었다. 엘리야가 남았다. 모두가 거짓 되이 바알과 아세라 상을 섬기는 거짓 선지자들로 부패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묵상하게 된다. 이는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 오늘 우리가 지키고 사는 신앙의 기준이 여느 교회, 혹은 교단, 어느 목사의 권위가 아닌 것을 새삼 되새기게 된다.
하여,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누가 감히 스스로를 내세우며 옳다고 자부하겠나? 우린 다만 모두 무익한 종이라! 주의 영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히 4:2).” 이에 나는,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시 40:1).
오직 주의 이름으로, 주의 말씀만을 가지고,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132:7).
그리하면,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
(8).
이에,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13-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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