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나아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왕상 20:13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34:1
우리의 판단은 너무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좋다 나쁘다 판단하기 일쑤다. 아람 왕 벤하닷이 북이스라엘과 대치하고 있다. 세 차례의 전투를 치르는데 이번에 두 번째이다. 아람이 군대를 모아왔는데 32인의 왕들이 각각의 군대를 거느리고 왔다. “아람의 벤하닷 왕이 그의 군대를 다 모으니 왕 삼십이 명이 그와 함께 있고 또 말과 병거들이 있더라 이에 올라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그 곳을 치며(1).” 그 위세에 눌릴만하다.
저는 동맹을 맺은 바 있던 벤하닷 1세(주전 900-860)의 아들이다. 벤하닷 1세는 지중해 무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오므리(아합의 아버지)와도 전쟁을 벌였었다. 본문은 벤하닷 2세(주전 860-841)가 아합을 위협하여 앗수르와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을 끌어내어 연합군이 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 무렵 앗수르의 살만에셀 3세(주전 859-824)는 서서히 벤하닷의 아람(시리아)을 위협해 오고 있었다.
아람은 여러 개의 소규모 국가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다메섹 왕 벤하닷이 주도권을 잡고 타 지역의 왕들 위에 군림하는 군주로 있었다. 여기 32명의 왕들은 벤하닷에게 조공과 병역을 바치는 아람의 소국 왕들이 된다. 벤하닷이 이스라엘의 아합에게 말하였다. 명령하는 것이다.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아내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 하매(3).” 그러자 아합은 그리하겠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 같이 나와 내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 하였더니(4).”
이스라엘의 왕권이 그만큼 무너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은금을 요구하는 것은 국력의 약화를 의미하고, 이스라엘이 벤하닷에게 완전히 굴복하려는 조처다. 또한 아내들과 자녀들을 요구하는 것은 왕권의 존엄성을 상실하였다는 증거다. 이는 저들을 인질로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벤하닷의 요구에 이스라엘의 아합은 굴종한다. 결국 저들의 위세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는 것이다. 엄연히 성경은 이르시길,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고후 10:7).”
그러므로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결국 우리는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지극히 작은 것 같아도 하나를 양보하면 열을 요구하는 게 사탄의 특성이다. 오늘 서두에서(1-6) 아람의 이와 같은 요구에 기가 눌렸다. 이를 보면서 우리의 영안의 눈이 열리기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알겠다. 그렇지 않으면 보이는 것으로 우린 주눅이 들거나 지레 속단하기 일쑤다. 이에,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기죽거나 꿇릴 거 없다. 요즘 내게 하시는 말씀이다. 늘 하나도 발전이 없는 것 같고 가시적으로도 나아지는 게 없는 것은 물론 점점 교회를 이뤄가는 일에서도 어려움을 겪으면서, 임대료를 감당하기도 벅찬데 이대로 괜찮을까? 하는 생각으로 의기소침하기도 했다. 누가 다녀가서 같이 성경공부를 권하거나 어떤 이의 무슨 일에 권하는 일도 그저 하나마나 한 소리가 되고 마는 것 같아서, 이번 달에는 목회자사례비도 반도 다 못 주고 있는 터에 또 월말이라 임대료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계속 지켜 가는 게 맞나? 뭐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마음으로 좀 복잡하다.
한데,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 2:11).” 결국은 하게 하신 이도 그만하게 하시는 이도 주님이실 터, 그렇다면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내 안의 이러한 갈등과 회의가 결코 바람직한 게 아닐 텐데, 하면 이 마음은 타협할 게 아니라 경계할 것으로 오늘 시편의 말씀이 나를 붙드시는 것 같다.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34:1).
인생의 ‘밤에’ 나는 성전에 올라온다. 저녁 먹고 가정예배를 드린 후에 교회로 온다. 이렇듯 말씀을 묵상하고 글로 쓰면서 나의 있는 그대로를 주 앞에 내려놓는다.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결국 이러한 감정도 싸움이라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내 안을 어지럽히는 이런저런 생각과 감정의 소요가 ‘악의 영’이 하는 일이겠다.
오늘 점심께는 어디 다른 교회에라도 가야 하나? 하고 아내에게 속내를 비추기도 했다. 그러니 할 수 있겠나? 나는 할 수 없음으로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결국 내 생이 다 하는 그 날까지 하나님이 나에게 부여하신 오늘의 이 모든 일을 감당하는 일이 전부일 텐데, 어쩌자고 억지로라도 끌어다 이처럼 이 일을 맡기셨는가? 생각할 때면 더러 마음만 답답해진다. 현실은 아람의 32인 왕들이 자신들의 군대를 이끌고 와 나를 포위하고 있는 것 같다.
이때에,
“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나아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왕상 20:13).”
여기서 이 한 선지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한 번도 아합에게 좋은 예언을 한 적이 없는 미가야 선지자도 아닐 테고, 당대의 엘리야 선지자도 아닐 것 같고, 오바댜가 아합과 이세벨을 피해 살려주었던 무명의 100인 선지자 중 한 사람이었을 것 같은데, 저는 과감히 아합 왕에게 전한다.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곧 아합이 벤하닷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것이라 한다(16-21, 26-34).
앞장에서 엘리야의 투쟁과 아합의 범죄를 그려가던 말씀에서 갑자기 이러한 내용으로 전환하여 아합의 승리를 수록하는 것에 대해서는 약간 어리둥절하다. 문맥적으로도 어렵다. 아합은 분명히 심판받아 마땅한 왕인데, 하물며 하나님이 저로 승리하게 하신다니!? 여기서 나는 또 하나의 답을 찾은 것 같다.
오늘 본문은 아합의 승리를 알리거나 범죄한 이스라엘의 승리를 알게 하려 하심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데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크신 권능으로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환난 날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이다. 이를 시편에서는,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9:9-10).
즉 나로 이처럼 목사가 되게 하시고 작고 보잘것없는 교회이나 이를 유지하고 지키게 하심은 순전히 나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려 하심이다. 다시 말해서 나로 어떤 일에 쓰임을 다하게 하려 하심이기보다 나로 나 자신이 더는 옛 생활로 돌아가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의 은총과 긍휼하심의 증인이 되게 하려 하심인 것이다. 누굴 위한 게 아니라, 날 위하여…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나타내시고 위하여 오늘도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교회를 지키며 나의 영혼을 지키게 하려 하심인 것이다.
곧 아합을 위한 게 아니고, 범죄한 나라 이스라엘을 위한 게 아니라 그럼에도 그 나라와 그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사 43:3).” 마침 또 이번 주간 설교원고 본문도 그런 내용이라, 내 은혜가 참 귀하다는 생각을 새삼 하였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4-5).”
그리하여,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7-8).”
하는 말씀을 운전을 하고 오면서 읽어주는 성경으로 듣고 또 들으며 운전을 하기도 하고 있다. 그만큼의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10-11).”
이는 결국,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21).”
나로 오늘 여기에서 이처럼 묵상하게 하시고 이를 글로 적으면서 나를 향하신 주의 사랑을 찬송하게 하심인데, 곧 이러한 목적으로 나를 택하신 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하여 ‘보라, 인생의 밤에 주의 성전에 있는 종아!’ 하고 오늘 시편은 나를 불러 세우신다. 오늘 낮에 설교원고 초안으로 작성하던 원고에서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사 43:10).”
오늘 나로 왜 이처럼 아무런 성과도 없는 듯한 일에 묵묵히 이곳을 지키게 하시는가를 알게 한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1).”
나를 구속하고 불렀나니, 나는 주의 것이라. 이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말씀으로도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므로 아무 염려도 하지 말라, 하심인데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29, 31).”
그러므로 오늘 악인으로 불리는 아합을 위한 것도 죄가 관영한 이스라엘을 위한 것도 아니라, 그럼에도 주가 사랑하시는 바 주의 은총을 나타나게 하려 하심이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그러므로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전 16:13).” 즉 오늘이 나는 아합과 다를 게 없고 범죄한 이스라엘과 같으나 이에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것은,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
결국 내가 어찌 해보려하는 모든 것은,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 그러므로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그러느니 오직 주를 바라자. 말씀으로만 바로 서자. 그리하여,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 2:2-3).”
내게 향한 주의 사랑을 나는 맛보아 앎으로, 오늘이 어떠하든지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134:1-3). 아멘.
<추신, 아이와 성경공부 준비>
히 13: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히 13: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히 13: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돈을 사랑치 말라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주 강조된 금지 명령이다. 돈에 대한 탐욕은 타인의 권리를 생각지 아니하고 오직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게 할 뿐 아니라 마음에 두 주인을 섬기게 하여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범죄하게 만든다(마6:24; 눅 16:13; 딤전 6:10). 그 결과 우상 숭배의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현재 주어진 여건과 물질에 대해 만족할 것을 권면한다. 현재 주어진 것에 대해 만족해야 할 이유 두 가지를 제시한다.
2.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현재 주어진 여건에 만족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켜주시고 함께 하시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창 28:15; 신31:6; 수 1:5; 사 41:17). 모든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지켜주신다는 사실은 바울과 같이 현재에 주어진 환경에 자족하게 한다(빌 4:11-13).
3.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시 118:6의 인용으로,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앞서 언급된 인용문과 연결되어 '약속과 응답'의 형태를 취한다. 하나님께서 돕는 자로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시편 기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돈과 죽음의 위협으로 부터 자유로와지며 담대해질 수 있다(2:14,15). 한편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는 부정을 유도하는 수사학적 질문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를 대항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롬 8:31).
4.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인도하는 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히 13:24).”
1) 현재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반면에 신앙을 지키다가 죽은 자도자들을 가리킨다. 인도하는 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공동체 내에서 설교하는 것을 가리킨다(행 4:29,31; 8:25; 13:46, 빌1:14). 이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종말론적 메시지를 전달하였음을 나타낸다(1:1-2).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던 지도자들을 기억하고 더불어 그들의 신앙을 본받아야한다.
2)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곧 종말은 매일의 생활에 결과를 나타낸다. 죽음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지도자들이 수많은 고난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심지어 죽기까지 한 것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과거에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에 의지하며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굳게 잡은 사실을 주의하여 살펴보고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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