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전봉석 2016. 11. 13. 07:29

 

 

 

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잠언 13:3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시편 70:3-4

 

 

 

어쩔 땐 토요일 정오에 아내와 성경공부를 하는 시간을 위해서도 사이를 좋게 한다. 마주보고 성경을 읽으며 그 내용을 삶에 가져다 풀어내는 일은 다채롭다. 아, 그래서였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제는 로마서 3장 9절에서 12절의 말씀을 읽고 나누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의아해하는 아내의 표정이 역력하여 아래층 아이엄마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과 은근히 알아주기를 바라는 내 안의 의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다.’ 곧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 나름 선을 이루고 산다는 여러 사람의 삶을 둘러보았다. 한 탤런트가 반듯하니 어려운 사람들 편에 서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손목에는 노란 팔찌를 하였다. 그런데 그의 신발장에는 몇 백 켤레가 넘는 신발들이 진열이 되어 있었다. 과연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한 게 무엇일까?

 

아들만 생각하고 아들에게서 위로를 얻는 데 대한 마음으로 연관 지었다. 하나님 외의 다른 무엇으로의 위로는 모두 무익하였다. 이를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다 그런 거 아냐? 어떻게 그런 걸 다 지키고 살 수 있어? 우린 다 한계가 있는 사람일 뿐이야!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는 식의 마음이 우리를 두둔하듯 ‘괜찮아, 이만하면 됐어.’ 하고 스스로를 격려한다. 이와 같은 마음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하시는 말씀과 상충된다. 내가 뭘, 나 같은 사람이 무슨! 하는 식의 태도는 겸손이면서 동시에 교만이다. 그래서 그래도 된다고 여기는 마음이라면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하나? 우린 결코 의인이 아니다. ‘의인은 없다, 깨달을 자도 없다, 찾는 자도 없다, 다 치우쳤다, 한 가지로 무익하다,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 여기서 ‘다 치우쳐’는 ‘밖에 기대다, 빗나가다, 지나치다’의 뜻을 갖는다. 모양은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하나님 외의 것에 기대는 것을 말한다. 다시, 결론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 순간 고개를 꺄우뚱하며 걱정이 들기도 한다. 이때,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3).”

 

같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시간 반이 훌쩍 지났다. 주의 긍휼하심 앞에 아멘, 하고 엎드릴 수 있는 용기를 주셨다. 담대히 주 앞에 나올 수 있는 권세. 이보다 더 큰 특혜가 또 있을까? 은혜란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왜 우리에겐 구속이 필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입을 열어 말을 하다보면 어느새 말이 나를 주도하는 것을 느낀다. 생각으로 담고 있을 때와 말로 풀어냈을 때의 차이는 전혀 다르다. 그럴 생각으로 했던 말이 저런 의미로 전달되어질 때의 당혹스러움이라니! 말(言)은 생물이다.

 

그래서 늘 잠언은 다시 일깨운다. ‘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전’한다. 한데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두렵지 않을 수 없다. 말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아무렇지 않게 말이 떠돈다. 남에 대한 말은 진미 같다. 잠언은 이를 엄중히 깨닫게 하신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그 안에 쌓여 악취를 내다 입 밖으로 나온다.

 

그러니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26:22).” 그 배에서는 이제 생수의 강이 흘러나야 하는데 말이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같이 성경공부를 하다보면 누구 이야기를 할 때 엄격해진다. 그것을 자기에게 가져오면 순간 관대해진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 하고 어느새 자기를 두둔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역시 우리가 어찌 우리 자신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것도 죄의 속성이라면 주 앞에 내어놓는 수밖에.

 

구리에서 아이가 생각보다 일찍 왔다. 월요일까지 자소서를 내야 한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벌써 몇 주째 같은 말을 하듯 써봐라, 써둬라 하며 일렀는데. 애나 어른이나 꼭 문제가 닥쳐야 그때 가서 허둥지둥한다. 그동안 썼던 것을 모두 가져다가 정리하도록 시켰다. 한 시간 남짓 기다리는데 아무래도 어렵겠다. 옆에 앉아 프린트한 아이 글을 들고 같이 읽어 내려가며 문맥과 내용을 다듬었다. 그러는데 네 시간이 걸렸다. 나름 완성을 하고 같이 내려가 저녁을 먹였다. 중3, 한참 놀고 싶을 나이였다.

 

어떤 문제가 터지면 우린 저마다의 상식과 원칙을 동원해서 열쇠를 찾는다. 그런데 열쇠로 내놓은 게 번번이 새로운 자물쇠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다보면 본래 풀어야 할 문제가 단순한 하나였다가 여러 개로 부풀리는 것을 경험한다. 비로소 열쇠인 줄 알았는데 더 단단히 잠긴 자물쇠였을 경우가 허다하다. 거리로 백만의 인파가 쏟아져 나왔다. 운집한 군중의 외침이 까만 하늘을 가득 채웠다. 다들 이 난국을 풀 수 있는 열쇠를 찾는다. 당사자는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이 왕왕거리며 자기 의견을 내놓는다. 탄핵은 의미가 없고 하야는 스스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거국내각은 허울뿐이기 쉽고 버티자니 더 큰 화를 부른다.

 

뭐 좋은 수가 없을까? 저마다 열쇠를 들고 서 있는 줄 알았는데 손에 든 건 굳게 닫힌 또 다른 자물쇠일 뿐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거두절미하고 열쇠는 하나님뿐이다.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 왔는지 내 스스로 말함인지 어찌 알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16).” 이 극명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자가 복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얼마나 먼 길을 돌아 여기까지 왔던가! 개인적으로 나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열쇠는 없다.

 

죄는 내가 풀 수 있는 자물쇠가 아니다. 손 씻고 착하게 산다고 그리스도인인가? 가난한 자를 돕고 저들의 선봉에 서서 자신을 희생한다고 의인인가?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전 15:9).” 본래 자신이 어떠했는가를 돌아보는 것은 오늘의 은혜가 어떠한지를 일깨운다. 거듭 자신을 쳐 복종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은혜란,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엡 3:8).” 그럴 수 없는 이를 그렇다 해주시는 이의 값없음이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 1:13-14).” 그러므로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15).” 주 앞에 서면 설수록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 절실해진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빌 3:15).”

 

누구를 욕하다가도 저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알겠다.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던 그 배후에 계신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에 동참하는 일은 기도다. 아이가 돌아가고 아내와 밖에서 만나 주일에 먹을 장을 보았다. 시험 끝내고 모처럼 오는 아이가 고기를 좋아하니까 제육볶음을 해야겠다며 아내는 정육점 앞에 섰다. 이러한 마음을 주시는 이를 신뢰한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그처럼 마음이 가고 신경이 쓰이는 데는 별 수 없다. 주의 사랑은 추상적인 게 아니라 '이처럼' 실제적인 것이다. 주가 우리에게 맡기신 이 교회와 가정을 건사하는 일이 사명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하는 가장 근접한 말씀을 순종하는 일. 누가 오든 안 오든, 어떤 일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주신 바 나의 행동반경 안에서 묵묵히 준행하는 것.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 스스로 열쇠를 찾아 끼우고 만족해하는 자의 자리에 들지 않게 하시기를. 그러므로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다윗의 기도에 아멘, 한다(시 70:3-4).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기를. 주의 구원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