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전봉석 2017. 1. 29. 07:27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하느니라.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잠언 29:11, 22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시편 147:10-11

 

 

 

명절을 쇠고 오다 말하였다. 딸애가 신경안정제를 안 먹었냐고 물어서 나온 말이었다. 그렇게 잘 견딘 건 좋으나 때론 극도로 예민하여서 서로에게 피곤하였다. 마치 어린아이가 경기를 하는 것처럼 작은 소리나 어떤 불안에도 깜짝깜짝 놀라고, 그럴 때면 자지러지게 놀란 가슴으로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는 것이다. 평시엔 덜하다가도 이처럼 예민해지는 때는 아내와 딸애 앞에서 건짜증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다. 익숙하게 잘 아는 길 위에 올라서고서야 그것도 미안한 마음으로 고백하였다.

 

그러니 나는 나의 어리석음을 주체할 길이 없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자기의 노를 잘 드러내는 어리석은 이에 비해 그것을 억제하는 게 지혜자였다. 왜냐하면 노함으로 다툼이 이는 것이고 성냄으로 범죄에 이르는 것이다. 말씀을 대하는 순간 아, 그게 나인데… 하고 절로 한숨이 나온다. 그러니 내가 이를 어찌 이겨낼까? 늘 곁에서 들들 볶이는 게 아내였다.

 

염치없고 그저 송구할 따름이지만 나는 그래서 더욱 주님이 필요하다. 뭔가 대단하고 고상한 일을 추구하기는커녕 정말이지 나 하나 이겨내고 견뎌내는 게 이처럼 고역이다. 다리가 뒤틀리고 맥없이 흐느적거리는 아이의 손을 주무르며 나는 기도하였다. 아이의 고통과 이를 두고 힘겨워하는 부모의 마음과 곁에서 이는 안타까움을 주께서 위로하시고 축복하여 주시기를. 그게 곧 나였구나, 나의 부모 내 형제의 마음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에 울컥하였다. 때로는 하나님이 두신 오늘의 현실이 가혹하다가도 그러므로 더욱 주의 은혜를 체험하고 누리게 하시는 데 놀란다.

 

그 하나님은, “눈을 양털 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 같이 흩으시며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시나니 누가 능히 그의 추위를 감당하리요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시 147:16-18).” 모든 게 자연적인 것 같으나 필연적이고 우연인 것 같으나 절실한 거였다. 어느 것도 허투루 두신 적이 없으신 이가 오늘 내게 두신 이런저런 나만의 사연을 어찌 모르실까? 말은 못하고 바동거리며 누워있던 아이를 보며 그 바람과 소원을 어찌 우리 하나님이 알지 못하실까 생각하였다.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그것들을 녹이신다. 우리의 서러움과 안타까움을 말이다.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른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 보는 이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하게 하신다. 하나님 앞에서의 내밀한 사연을 어찌 다 알 수 있을까만 더불어 주의 이름을 부르기에는 충분하였다. 조심스럽게 다가와 아내도 아이 곁에 앉아 손을 어르고 경직된 발과 다리를 주무르며 주의 이름을 불렀다. 바람이다. 아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성령의 바람이 불어 건조했던 우리의 마음에 물이 흐른다. 이는 결코 측은지심이 아니라 경이로움이다. 가만히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오래된 미래를 생각하였다.

 

어느 훗날 우리는 저 천국에서 서로 이야기할 것이다. 그때 그렇게 내 발을 어루만지며 주의 이름을 되뇔 때 나도 당신의 연약함을 위해 주께 기도하였습니다. 내 부모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 나는 더욱 주의 도우심에 간절하였습니다. 우리는 함께 아브라함의 품에서 서로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주를 경배하며 찬양할 것이었다. 단지 이제 아이를 보며 느끼는 감정이 그저 안타깝고 서러운 게 아니었다. 주께서 이 땅에 보내신 이유였고 목적이었다. 더 큰 영광을 위해 서로는 서로를 통해 주를 바라였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그날에 우리가 주 앞에서 두런두런 이생에서의 일을 정답게 나눌 때, 뭐 그리 위대하였던 예언도 폐하고, 숭고하고 절실하였던 방언도 그치고, 앎으로 풍성하였던 지식도 폐하리라. 그러나 바로 그, 사랑은 결코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한다. 곧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부모가 자식을 형제가 형제를 위한 마음은 위대하였다.

 

이 모두는 주의 사랑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단지 나는 안타까움으로 주의 이름을 찾는 게 전부였지만, 주의 사랑은 내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죽어 마땅한 그때에 이미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까지 사랑하신 거였다. 고로 나의 어떤 수고와 애씀도 그 값을 대신할 수 없다.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노래일수록 가장 슬픈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 우리의 노래는 그러해서 말씀으로 우리를 찾아오시고 완악했던 우리의 마음을 녹이시는 주의 사랑이다. 성령을 불어 우리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시는 것이다. 나야말로 늘 누추하고 보잘것없으나 온통 다 나를 위하고 사랑하는 손길로 충만하였다. 의당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닌데, 그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의뢰하게 하시는 것을 느낀다. 그러므로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좋은 것도 좋으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의 고단함이 복되었다. 누구는 이에 그 축복을 누리지 못하지만 이로써 성도란 아이의 뒤틀린 몸을 어르며 주의 사랑을 회복한다. 나의 연약하고 불편함이 그래서 더 주만 의지하게 하는 것이다. 바로 그 어느 훗날 주님이 우리를 인정하신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눅 22:28).” 주가 더하신 마음을 헛되이 버려두지 않은 데 칭찬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히 2:17).” 충만하였다. 충분하였다.

 

집에 돌아와 다 씻고 눕는데 울컥, 모든 게 다 감사하였다. 이럴 걸, 그처럼 안달을 부리고 성화를 내며 조바심을 떨고 두려워서 쩔쩔맸었구나. 아, 나의 고단한 순간순간이 서러우면서 감사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복되었다. 부모의 모질고 험난했던 신앙 여정이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감사와 찬송으로 드려지는 데 축복이었다. 이와 같이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11).” 우리 형제들이 다 같이 한 곳을 주목하며 한 근원으로 살다가는 이 땅이 복되었다.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37:14).”

 

빈둥거리듯 책을 읽다 밑줄을 긋고 메모해둔 성경구절이 아침마다 묵상 글을 쓰는데 참으로 적절하다. 앞뒤 문맥은 기억나지 않아도 오롯이 말씀만으로 족하였다. 우리 속에 주의 영을 두심으로 우리는 같이 저 본향을 향한다니. 주께서 말씀하시고 말씀하신 것을 이룰 것이다. 우리로 이를 알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다. 때로는 성경구절만 나열하듯 메모했을 뿐인데 그 모든 게 저절로 한데 이어져 이해를 돕고 더욱 확신을 더하게 하시는 게 신비롭다. 그러므로 잠잠히 주를 바랄 수 있게 하시고 이를 소원함으로 기도가 기도되어지게 하는 것이다.

 

막연히 도와주세요, 낫게 해주세요, 하였던 말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로 바뀌는 과정이다. 그래 맞다. 거룩한 성도는 하나님을 바란다. 내 안의 거룩은 하나님이 주신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나의 평안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나의 바람은 고마우신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다만 하나님이시다. 그 차이를 이제 조금은 알겠다. 앞에 붙이곤 하는 여러 수사적인 요구와 소원을 모두 걷어내고 오롯이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바라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내게 두신 고통과 불안과 온갖 염려까지도 발판으로 하여 주를 바라게 한다.

 

단지 이 땅에서의 소원이 전부가 아닌 것이다. 그것까지도 주가 이루시겠으나 그게 어찌 전부이겠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그러므로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하여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13).” 이로써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11).”

 

기승전, 결국은 하나님이시다.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시 147:10-11).” 감히 유추하자면 그래서 나의 연약함이 축복이었구나! 오늘의 어려움이 복된 거였구나! 오직 주를 경외하고 그의 인자하심만을 바라게 하시려고,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9).”

 

그리하여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30-3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