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전봉석 2017. 1. 31. 07:43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

잠언 31:8-9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시편 149:1, 5

 

 

 

말 못하는 자,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해 아뢸 줄 모르는 자와 고독한 자, 낙심에 들어 있는 자를 위해 입을 열지니, 기도하자. 입을 열어 변호하고 저를 위해 신원하자. 한 날 한 날의 새로운 이야기를 주께 아뢰며 이를 믿는 이와 함께 나누자. 우리는 서로 주의 영광을 즐거워하며 잠자리에 들면서도 서로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주께 기쁨의 감사를 드릴 것이다. 오늘 말씀이 혹시 오려고 하나 기대했던 어제 친구네 가족을 아쉬워하게 한다. 성도의 왕래는 곧바로 기쁨이 되고 찬송이 된다.

 

늦은 점심께 아내와 같이 영화라도 보러 갔으나 사람이 너무 많아서 돌아왔다. 오전 내내 오스왈드 챔버스의 그리스도가 이끄는 삶, <도움의 장소>를 읽었다. 햇살이 빠짝 듣는 창가에 화분을 놓아두었다. ‘어떠하든 하나님은 목적을 이루어 가신다.’ 전에 적어두었던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요셉이 그 형제들에게 이를 증거 하는 말씀을 적어두었다(창 45:7-8, 50:20).

 

소리 내어 마태복음을 읽다 ‘나네?’ 하고 놀랐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 견디는 것만으로도 사명이었다. 한데 이를 어렵게 하는 것이 있으니, 필연적으로 건사해야 한다고 여기는 자의 고단함에 대해 생각하였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19-20).” 천로역정을 읽다 뜬금없이 아내가 ‘나네?’ 하고 호들갑을 떨었던 게 기억났다.

 

오늘 잠언의 말씀은 그러므로 사랑을 더 받게 되는 필연적인 구조를 연상케 한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고후 12:15).” 주의 사랑을 받는 자가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차고 넘치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데는 받음으로 받아서 내주어주는 게 된다. 이는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늘 충만함으로 이뤄질 수 있는 일이겠다. 그러므로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데도 내어준다(1:8).

 

그런 거 보면 구제하고 선을 이룬다는 게 팔다가 남은 것, 쓰다가 싫증난 것, 있어서 더는 필요 없는 것으로 행해지는 게 아니었다. 내게도 여전히 유용한데 ‘더욱 사랑할수록 사랑을 덜 받겠느냐?’ 차고 넘침의 원리는 결코 각박함과 무관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처럼 묵상을 글로 쓰는 건 참으로 유익한 것 같다. 영적으로 깨어있다는 게 생각과 결단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살아야 하고 이는 일상의 일이며 이를 멈추지 않고 돌아보는 일은 그래서 더없이 유익하였다. 글을 잘 쓰고 못 쓰고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기억을 늘 새롭게 하는 역할을 한다.

 

내게 더하시는 주의 은혜는 결코 막연한 게 아니다. 단회적이지도 않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깊은 관계’의 때를 잊지 않는 것.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렘 2:2).” 그래 맞다. 글쓰기가 주는 가장 큰 유익은 나를 돌아보며 항상 나와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이 전에도 어떻게 나를 주도하시고 인도하셨는지를 재차 확인시켜준다. 곧 언제나 부르심이다.

 

날마다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고 옷매무새를 바로 하듯, 묵상글은 나의 한 날 한 시가 어느 것도 무익하게 드러나고 흘러가는 데 주의하게 한다. 규칙적인 생활이 불규칙적인 생활보다 수월하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세상을 의식하는 삶보다 쉽다. 말씀을 묵상하며 이를 근거로 사는 게 말씀 없이 떠도는 안개 같은 삶보다 선명하다. 문득 동기전도사가 떠오르고, 저가 실의에 빠져 고향에 머무는 게 내심 안타까웠다. 뭐라 문자라도 해볼까 하다 새삼 저의 이름을 적어 붙였다. 그런 것이다. 보잘것없으나 나는 창가에 서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갈 5:7).” 살면서 그런 때가 없으면 좋겠으나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흐름을 거스르는 역류가 있기 마련이다. 쾌쾌 묵은 감정이 올라오고 돌연 서러움으로 저 혼자 꺼이꺼이 울게 되는, 그래도 다행이라면 역류도 흐르는 물에서만 발생한다. 고여 있어 흐름을 멈춘 물에서는 역류도 없다. 생목이 올라오듯 입 안 가득 쓴물이 찰 때,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 죽을 것 같은 자리에서도 내 입에 고이는 한 마디, ‘주님’ 하고 부를 수 있는 기력만 있다면… 이때 도움이 되는 것이 글쓰기다. 나는 내가 실감하고 숱한 믿음의 사람들이 지향했던 글쓰기의 복된 비밀을 알려주고 싶다. 뭘 쓰나? 아무 거나! 어떻게 쓰나? 아무렇게나! 나의 글쓰기에 대한 견해는 무모할 정도로 단순하다.

 

쓰지 않아서 그렇지 쓰다보면 중독성이 있다. 필터 역할을 하여 감정의 실체를 마주하게 한다. 언제 어디서든 되새길 수 있다. 함께 나눌 수도 있고, 대화와 달리 깊은 묵상의 여지를 남긴다. 다음 말을 고를 때 평소 외면하던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껄끄럽고 싫어도 나에게 맡기신 나다. 그런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다. 즉 나도 내 것이 아님을 느낀다. 구석구석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나의 그릇된 속성을 마주하게 된다. 이를 언어화하는 건 의미를 파악하는 일로 최소한 더는 모르고 당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글쓰기 예찬론자다. 더욱이 묵상글은 늘 영적으로 깨어있을 수 있는 신선한 자극이 된다.

 

유혹이 언제 어떻게 올지 모른다. 죄란 그리 대단하게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나의 약점을 알 때 이를 인정하는 일도 쉽다. 대비책을 강구할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에 대해 더는 위선을 떨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는 부끄러울 게 없다. 나는 글을 잘 쓰기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잘 읽히려고 글을 쓰지도 않는다. 묵상글이란 신비한 게 쓰면서도 놀랍지만 쓸 수 없어서도 놀랍다. 쓰다말고 멈춰야 할 때 생각을 집중하며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게 관건이다. 적당한 어휘는 쓰면서 생겨나는 것이다.

 

“주여 사람이 사는 것이 이에 있고 내 심령의 생명도 온전히 거기에 있사오니 원하건대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 주옵소서(사 38:16).” 감히 말하지만 저가 이와 같이 아뢸 수 있었던 건 이를 글로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17).” 그리고 이와 같은 확신은 쓰면서 쓰는 동안에 드러난 자신의 지난날이 증거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에 대한 기록들이 말이다.

 

묵상글을 쓰면서 확실히 알겠는 건, 그냥 지낼 땐 그저 무료하고 그 날이 그 날인 것처럼 평범하기 그지없던 날들도 어느 한 날 한순간도 헛되지 않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냥 볼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글쓰기를 위한 생각의 필터를 대면서는 더욱 세세하게 느껴지고 보여지는 것이다. 이는 또한 허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얼마나 매순간이 가짜 바람들로 가득한지를 알게 한다. 허상은 가짜 생각이다. 죄는 본능적으로 꾸며낸다. 그럴 것 같다. 그게 맞는 것 같다.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지면 더욱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므로 묵상글이란 교묘하게 맞장구치는 순간, 그래도 될 것 같은 것들로부터 보호한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요 2:24).” 예수님만이 허상에 기대하지 않으셨다. 우린 수시로 서로를 의지하고 심지어 자신의 행위나 말에도 기댄다. 이 정도 했으니까 뭐, 하는 순간 앞서 행한 선이 선으로의 본연의 의미를 상실한다. 남은 것을 주고, 쓰다 소용이 없을 때 나누고, 하나 더 있어서 주고, 날짜가 다 돼서 건네는 것들을 과연 어느 훗날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까? 물론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나마 고마운 일이겠으나 주는 사람 입장에서는 헛된 게 된다. 그저 자기만족으로 충분한 것이다.

 

허상을 주의하게 하는 데 일기보다 유용한 게 없다. 일기는 자기 이야기로 그치지만 묵상글은 말씀으로 나아가게 한다. 권하고 소개하면 글을 못 써서, 귀찮아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사양한다. 그러게, 더 나은 게 있으려나 모르겠다. 모든 문제는 허상에서 비롯된다. 자기만족의 극치가 허상이다. 행여 묵상글도 다를 바 없다면 이는 둘 중에 하나 때문이다. 자기 푸념으로만 일관했던가, 남에게 보이는 데만 열중했던가! 그래서 나는 일부러라도 잘 쓰려고 하지 않는다. 잘 쓰고 못 쓰고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보고 안 보고의 문제도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보고서를 바라시는 게 아니다.

 

순진하게! 그냥 쓰니까 쓰고 써지니까 쓴다. 하지만 어른이 돼서 순진한 건 폐다. 어린아이의 순진함은 사랑스럽고 귀엽고 모든 게 용서가 되지만 어른의 순진함은 무지함과 연결된다. 어른이 돼서는 순진하려고 하는 갈등의 결과로 덕을 세우는 일이다. 덕이란 순결함의 꽃이다. 순결은 지키고자 하는 갈등과 씨름에서 얻는 과육이다. 갈등을 이겨낸 결과가 덕이고 덕을 싹트게 하는 것은 순결함을 위해 무던히 바로 하는 자세에서 비롯된다. 이런 것을 말로 표현하기 위해 생각을 모으고 더 나은 언어를 얻어서 문장으로 이어가며, 그것으로 더욱 주의 이름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자 하는 게 묵상글의 도움이다.

 

찬송이란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이다. 입이 마르고 닳도록 자랑하고도 모자란 게 찬송이다. 하나님이 나와 어떻게 함께 하시고 어디서 주의 은혜가 더욱 강하게 느껴졌는지를,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이를 침상에서 기뻐 노래한다.’ 영적으로 순진함이란 하나님만으로 기쁜 것이다. 하나님만 있으면 다 괜찮다. 젖 뗀 아이가 엄마 품에서 안도하는 것처럼,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2).”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다윗은 묵상글에 썼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1).” 자신을 기록할 줄 아는 자는 더 나은 자신을 주께 보여드리기 위해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매순간 찌끼만도 못한 자신에게 하나님이 어찌 행하셨는가를 기록하게 된다. 엄마만 있으면 돼!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2).”

 

늘 지금부터다. 새 노래로 주를 찬송한다. 지난날을 후벼 파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라도 지금부터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3).” 곧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것.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그래서 지금부터는 확신한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사 38;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