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전봉석 2017. 2. 2. 07:36

 

 

 

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잠언 2:20-2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편 1:1-2

 

 

 

내 의지로 선한 자의 길을 행할 수 없다. 의인의 길을 지킬 수 없다. 지혜가 한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하신다. 성령이시다. 저로 인해 나는 완전한 자의 땅에 남는다. 주만 바라는 마음이 온유함이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이는 복이 있는 자이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그럴 수 있는 게 온유함이다. 오직 말씀으로 즐거워한다. 하나님으로 전부다. 이를 주야로 묵상한다.

 

세상은 언제나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 보수냐 진보냐, 좌파냐 우파냐, 이 사람이냐 저 사람이냐…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은 내게 어느 쪽이냐고 묻는 세상에게 말을 삼간다. 어떠하든 저들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저런 빨갱이 같은! 저런 자는 죽어 마땅해, 라고 말하는 자는 자신도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진 바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까맣게 잊었거나, 아니면 여전히 구덩이에 있거나 하는 자이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사 38:17).”

 

노예무역선 선장이었던 존 뉴턴이 후에 주를 영접하고 새 사람이 된 뒤에 저는 누구보다 온유한 자가 되었다. 이는 자신도 주의 은혜로 구덩이에서 건진 바 된 것인데 하물며 아직 구덩이에 있다고 저를 겨냥하여 욕하고 저주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온유함이란 은혜가 충만한 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선명한 특징이 된다. 곧 저를 욕하고 맞서 싸우기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저의 처지와 사정을 주께 아뢰며 주의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 마음이다.

 

멀리 볼 것도 없다. 왜 선생님 주변엔 ‘유난히 이상한 사람’만 있어요? 어느 아이가 물었다. 자신을 비롯해서 하는 말이었다. 그땐 변변한 답을 못했는데 이제는 알겠다. 그건 내가 ‘유난히 이상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와 닮은 사람을 내 곁에 두신다. 성향이나 기질이 어쩜 그렇게 똑같은지. 쟤 때문에 내가 못 살겠다. 멀리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고 가까이 하고 싶은데도 그럴 수 없다. 딱 그만큼 저가 나다. 나의 이상함이 저의 이상함과 똑같다. 그래서 불편한 것이고 그래서 더 안타까운 것이다.

 

초등부 아이들 수업이 있는 날, 나는 안정제를 먹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아이가 이침부터 아무 것도 안 먹었다는 소리에, 머리가 아파요 하는 말에, 서로가 인상을 찌푸리며 금방이라도 싸울 것 같아서… 찌릿찌릿하다 결국 슬그머니 약을 먹었다. 아내가 나와 있었다. 어떤 애는 아무 때나 나대면서 말을 끊고 제 할 말을 한다. 한 애는 갑자기 어렵다면서 얼굴색이 금세 변했다. 모르겠다며 그냥 드러눕는 애도 있다. 그런데 그게 모두 나였다. 예민하게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이 실은 모두 나와 닮은 모습에서였다.

 

교회에서 함께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 아이들의 면면도 그러하다. 마음이 가면서도 힘에 겨운 게 실은 모두 나 때문이었다. 감추고 싶고 한사코 외면하고 싶은 모습을 마주하게 하시는 거였다. 이는 곧 하나님의 사랑을 내게 알게 하시려고, 내가 어떠했는지! 그런 나를 어디까지 얼마큼을 더 사랑하고 계시는지 알게 하시려고, “내가 네게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잠 22:19).” 그런 거였다. 유난히 발끈하고 못 견뎌하며 용서할 수 없다고 바득바득 우겨대는 게 실은 그게 내 본래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힘들면 다음 주에 개학이니까 애들을 그만 보낼까? 방학 특강으로 해준 거였잖아! 아내가 물었다.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안 왔으면 좋겠다. 안 보고 싶었다. 혼자 있고 싶었다. 가만히 나 혼자 있으면서, 여기가 좋사오니 이곳에 초막을 셋을 짓고 여기서 살고 싶습니다. 그럼 나는 좋겠다. 마치 다 이룬 자처럼 거룩을 흉내 낼 수 있다. 인자와 자비를 드러내며 마치 신선처럼 살 것 같다.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멜로디의 찬송이 은은하게 나오고, 나는 성경을 읽고 여러 믿음의 사람들이 걸어간 삶의 이야기를 읽으며, 아 좋다. 여기가 변화산이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4).” 한데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저를 이끌고 산을 내려오신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5).” 기어이 다시 일상이다. 지긋지긋한 평범함 속으로 밀어 넣으신다.

 

일러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 21:19).” 내게 두시는 한 날의 수고로 족한 것이다. 사명이란 사는 것이다. 살면서 주의 사랑을 회복하고 그 충만하심 안에 거하는 것이다. 다음 주 수요일에도 아내가 같이 나와 있어야 할지, 나 혼자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아이들에게 물었다. 아이들은 무슨 심사인지 글방을 그만 오라고 할까봐 걱정이었다. 그래, 하자. 약을 먹으면서라도 해보자. 아이들이 돌아가고 나는 녹초가 되어 누웠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성경은 나를 예수님처럼 되기를 바라신다. 예수님의 요구는 예수님처럼 내가 거룩하기를 원하신다. 그게 말이 되나? 나는 그럴 수 없어서,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그럴 수 없어서 두렵다. 송구하고 민망하다. 한데 이와 같은 마음이 전에는 알지 못했던 마음이란 걸 이제는 안다. 전에는, 이만하면 됐지 뭐?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 나만큼만 살라 그래! 하며 자부하였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비로소 내 안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신 증거는 평안이 아니라 검이다. 죄 때문에 찔린다. 불편하고 답답한 것이다. 이를 내가 해결할 수 없어서라도 더는 주 없이 살 수가 없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깜빡 졸고 일어났더니 한결 개운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는 쌍둥이 애들이 왔다. 초등학교 책을 줬는데 벌써 2주째 다 못 읽었다는 게 대답이었다. 나는 박지원의 <허생전>과 <양반전>을 주며 필사하게 하였다. 다행히 자판으로 글을 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옆 사무실이 결국 그만두기로 했단다. 이제나저제나 언제쯤 주께서 신호를 주실까 하고 기다렸더니 전혀 엉뚱한 답이 돌아왔다. 이렇게 그만둘 줄이야! 아이 둘도 언제 보내시려나? 기다리고 있었고, 그렇게 탈북여성들 글쓰기는 언제쯤 이뤄지려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주인 사장이 그리 됐다며 혀를 차는데 나는 전혀 다른 마음으로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혹시나 하고 기대하고 있던 마음이 머쓱하게 됐다. 아, 아브람의 심정이 그러했을까? 길을 떠나 우여곡절 끝에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는데, 더는 희망이 없는 것 같아 전에 조카 롯을 구하러 갔을 때 다메섹에서 데려온 어린 엘리에셀이 장성하였으니 저를 그냥 후계자로 삼아야 하는 게 옳을까? 아내 사래의 말을 따라 하갈에게서 얻은 이스마엘이나 잘 키우면 되는 거 아닐까? 아브라함 이전의 아브람은 갈등했을 것이다. 사라 이전의 사래는 의심하는 게 당연하였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렇게 돼서 저렇게 하면 교회도 살고 하나님의 이름도 더욱 영광을 얻으실 텐데… 저 가정이, 이 아이가 이렇게 나오고 저렇게 순종하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 덕이 될 텐데… 나의 생각은 번번이 무너진다. 무너진 자리에서 나는 한심하기 짝이 없게 초등학교 아이들 예닐곱 명으로 어쩔 줄 몰라 하다 고작 그런 일로 안정제를 먹어야 하는 것이다. 쌍둥이 애들을 어쩌면 좋을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어서 쩔쩔맨다. 누구에게 문자를 하는 일도, 때론 사장이 와서 이런저런 지청구를 들어주는 일에서도 나는 별 볼 일 없이 헉헉거린다.

 

내 안의 나를 죽이기까지 주는 검을 뽑으신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그래서 나는 하나님 때문에 살 수가 없다. 전엔 아무렇지도 않던 것들이 다 들고 일어나서 나를 정죄한다. 죄책으로 견딜 수 없다. 그게 어디 한둘이어야 말이지! 내 안에 이처럼 선한 게 없었나?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여실히 들추신다. 결국 새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낡은 생명을 죽여야 한다. 서서히 나의 눈에는 다른 게 보이는 것이다. 전에는 듣지 못했던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아! 비로소 평안이다.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평안으로 여기던 것을 몰아내야 하는 거였다. 영혼을 얻기 위해 영혼은 죽어야 한다. 내가 살기 위해 나는 죽어야 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사시기까지, 하나님의 사랑은 그처럼 잔인한 거였다. 주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이 성령이 거하지 않는 이에게는 터무니없고 잔혹하기만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그렇지. 이젠 상대할 자가 없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6-37).” 매순간이 하찮은 것 같으나 이를 위해 주가 죽으셨다. 나의 일상이 그저 평범하여 보잘것없는 것 같으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8-3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