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전봉석 2017. 3. 12. 07:45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하게 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

잠언 12:25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시편 41:11

 

 

 

오전에 일찍 아내가 글방으로 나와 성경공부를 하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서너 주 정도 빠진 것 같다. ‘그냥’ 다시 하자, 서로는 격려하고 다독였다. 가끔은 아내가 힘들다. 가족이란 너무 발가벗겨져 숨을 곳이 없는 민둥산 같다. 때로는 숨고 싶어진다. 그러느니 잘 모르는 사람과 어울리는 게 더 편하게 느껴진다. 적당한 거리와 덧씌운 엄폐 때문이다.

 

사랑은 참견이 되고 집착이 되기 쉽다. 잘 안다고 여기는 선입견이 항상 보면, 말부터 앞섰다가 언짢은 마음으로 돌아오기 일쑤다. 이때 보면 마음이 언짢아서 언짢은 말을 하게 되는 게 아니라 언짢은 말을 해서 마음도 언짢아지게 되는 것이다. 미련함이란 확연하다.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18).” 오늘 잠언은 그러므로 지혜의 증거가 무엇에서 드러나는지를 알게 한다.

 

요즘은 너무 속보이고 염치없지만 날 위해 기도를 부탁하곤 한다. 우리가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게 막연한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의 일상인 것을 여실히 느낀다. 아차, 하는 순간에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이 툭, 튀어나는 것이다. 그래놓고는 그런 의도로 한 게 아니라고 바득바득 우긴다. 이미 상대는 자존심이 상했는데 말이다. 여기서 보면 열등감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우리의 생활에 포진해 있는지 알 수 있다.

 

열등감이란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데서 오는 위장술이다. 본래 방어기제란 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처세술이다. 공연히 인상을 찌푸리는 것도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자 하는 것이고, ‘남보다 못하다’는 비교에서 패배감을 느낄 때 순간 처하는 행동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거나 묵묵부답, 입을 다문다거나 얼토당토않은, 행동을 하거나 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감정에서 숨으려는 것이다.

 

아이들을 오게 해서 영화를 보여주고 아이스크림도 주었다. 무엇보다 격려가 필요하였다. 열거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아이들은 어른들의 그릇됨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돼 있었다. 밖에 나가서는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아이 보는 데서 버젓이 담배를 피우는 엄마, 저녁이면 진하게 화장을 하고 ‘야하게’ 옷을 입고 외출하는 엄마, 주말에만 들어와서 가족을 모두 숨죽이게 만드는 아빠, 하루 스물 네 시간으로도 모자라게 돈돈거리며 돈을 벌어서 여기저기 학원에를 보내는 부모, ‘이게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야!’ 하면서 자신들의 희생을 총구처럼 아이들에게 겨누고 위협하는…….

 

전에는 대수롭지 않았던 것이 문제로 다가오고, 나는 무엇보다 아내와 공동전선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왜 꼭 이런 애들만 오는 걸까? 하고 투덜거릴 문제가 아니었다. 이는 결코 없는 집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닌 거였다. 백만 원을 호가하는 전기 퀵 보드를 형제가 나란히 타고 들어왔다. 한 눈에 봐도 고급스러워보였다. 책을 읽어야 한다고 하자, 수천 권의 책이 서재에 가득하다는 걸 아이들은 부채처럼 말했다. 그걸 다 읽어야 할 일이 까마득한 것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기백만 원을 들여 아이들에게 수천 권을 책을 사준 것일까?

 

자신의 부족과 허기를 자신이 채우려고 할 때 이는 영락없이 과장되다. 열등감이 갖는 첫 번째 특징은 터무니없을 만큼 부풀려진다는 것이다. 아이가 뜬금없이 앞에 있는 아이들에게 이천 원을 주려고 했다. 왜? 하고 묻자, 그냥요! 하고 답한다. 요는 저 두 아이가 자신과 놀아주지 않을까봐 두려운 것이다. 너 가져! 이거 줄까? 하는 게 아이의 입버릇이었다. 아, 그래서 뭐라 하면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하였구나. 어린 게 자주 위경련이 온다는 데서 알았다. 그래놓고는 서글픈 것이다. 내어준 것에 비해 저들은 결코 자신을 위해 주지 않았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아내와 같이 장을 보면서 그 아이에 대해 물었다. 애가 왜 그러는지, ‘개체발생’을 알려면 그 내력을 살펴 ‘계통발생’을 들여다봐야 한다. 초등학교만 지나도 아이들은 나름의 엄폐물을 하나씩 소유한다. 꼭꼭 숨어버리면 어찌 감당이 안 된다. 아내와 이런저런 얘길 나누다가, 내가 오늘은 신경안정제를 먹지 않고도 아이들을 대할 수 있었다는 데 놀랐다. 나는 의사는 아니지만 환자인 건 사실이다. 아이가 왜 그러는지 알겠다. 측음지심은 단순히 ‘안 됐다’를 넘어 내 이야기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지 마, 나도 그랬어! 아내에게 나는 감추고 있던 걸 실토하듯 말했다. 너 줄까? 이거 너 가질래? 하면서,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굴었었다. 그러므로 네 곁에 있고 싶었던 것이다. 너희들과 어울리고 싶은 것이고 그럴 수만 있다면… 하는 게 나의 어린세계였다. 이제 여기서 우린 하나님만 바라보는 훈련을 하게 된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시 123:1).” 기웃거리듯 사람들 사이에 있는 섬을 떠돌았다. 불안과 불평이 주를 향한 시선을 자주 흐트러뜨린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주께만 고정된 시선이었다. 비록 지금은 잘 모르겠고,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신 것과 같이 저 아이들을 우리 곁에 두셨다는 것이다. 지금은 희미하나 반드시 볼 것이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아, 왜 우리를 여기에 두셨는지 알겠다. 사실 큰 시련에서는 하나님을 찾고 구하기가 쉽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작은 시련, 아내와의 괜한 다툼에서나 아이들로 인한 공연한 걱정 같은 데서는 하나님을 별로 의지하려 하지 않는다. 늘 그랬던 것이고 새삼스러울 게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려니’ 하고 여길 때 가장 좋아하는 것이 타성에 젖은 내 안의 죄다. 그게 편하고 익숙한 것이다. 자세를 바꾸고 싶지 않다. 그러느니 침묵하는 게 낫다. 차라리 버럭, 소리를 지름으로 그 상황을 모면하는 게 간편하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마 13:20-21).” 우리 안에 굳어진 심성이란 게 본디 돌부리인 것이다. 딱딱하게 굳어져서 불편하지만 건드리지만 않으면 그런대로 살 것 같다. 애써 그걸 파내느라 수선을 떨고 싶지는 않다. 그러느니 남은 땅에 기식하면 된다.

 

한데 그 척박한 땅에서는 생명력이 질긴 엉겅퀴만 난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22).” 당연한 것이 저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가시를 돋을 수밖에 없었다. 팽, 하고 토라지기 잘하는 아이는 그럼으로써 자신의 상한 감정을 보호하는 것이다. 입을 꾹, 다문 아이는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이 한꺼번에 몰려 있어서 그렇다.

 

얘들아, 내일 교회 나올래? 하고 아이들에게 물었더니 다녀봤어요, 얘기 들었어요, 봐서요, 하며 엉뚱한 소릴 해댔다. 죄는 애나 어른이나 다를 게 없는 것이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23).” 끊임없이 경작하고 다스림으로써 좋은 땅을 얻는다. 수시로 돌을 걷어내고 가시떨기를 뽑아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누구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내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저 아이의 그것이, 그 가정의 이런저런 반목이, 아이엄마의 불안이 어찌 내 것과 다를까? 이와 같은 돌부리와 가시떨기를 주체할 수 없어 주의 이름을 부른다. 성화란 나에게 집중하는 것도 남에게 집중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나만 위해 기도하면 늘어나는 요구조건에 치여 칭얼거리는 신앙이 된다. 왜 도고기도가 유익한지 알겠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 2:1).” 그러라고 오늘 우리를 이 자리에 두신 거였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 5:15).” 안 믿는 부모 밑에서 안 믿는 아이로 자라는, 저 척박한 아이들의 영혼을 위해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품고 사랑하라고 하시는 거였다.

 

우리의 말 한 마디가 하나님이 된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곁을 줌으로 하나님의 품이 된다. 어떻게, 교회로 나오게 하고 예배에 참석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엄밀하게 그건 내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실 일이다. 우린 다만 주의 마음으로 주의 시선을 갖고,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드리는 것뿐이다. 나의 선한 말 한 마디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하게 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잠 12:25).”

 

그러므로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시 41:11).”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삶이되기를. 곧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12).” 내가 할 수 없으나 나로 하여금 주 앞에 세우심으로, 할 수 있든 없든 여기에 두셨다. 그리하여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