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전봉석 2017. 3. 11. 07:37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

잠언 11:17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시편 40:8

 

 

 

어수선한 하루였다. 대통령이 탄핵되고, 누군 환호하였고 누군 절규하였다. 아비지옥과 규환지옥이 한데 아울러진 것 같았다. 덩실덩실 춤을 추는 쪽이나 승복하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쪽이나, 나는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사람처럼 설교원고에 집중할 수 없었다. 모두가 자신이 옳다하고 여기는 것을 보며 노아의 때를 생각하였다. 혹은 소돔과 고모라가 그러하지 않았을까?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눅 17:27).” 그러기까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판결문을 읽을 때, 나는 어느 훗날 더는 변경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의 비가역한 상황을 상상하였다. 심판 이후 더는 번복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하여, 일찍이 하나님의 공의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어서 그때가 이르기 전에, 아직 기회가 있을 때에, 최종적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몸의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자신이 직접 죄의 값이 되셨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그리고도 참고 또 기다리시는 중이다!

 

이에 따른 심리적 저항을 느끼는 것이야 어쩌면 사람이어서 그럴 수밖에 없겠다. 그래서 요나는 다시스로 갔고, 롯의 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에도 돌이킬 수 있었던 요나와 달리 롯의 처는 영영 되돌릴 수 없었다. 요나의 표적과 롯의 처에 대한 교훈은 주님의 ‘남은 말씀’이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마 16:4).” 그리고 제자들에게 일러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누구는 건짐을 받고 누구는 버려둠을 당한다.

 

이를 두려워할 줄 아는 게 복일 거였다. 엉뚱하게도 ‘나는 어느 쪽이냐’의 문제보다 이게 더 중요한 것이라 생각되었다. 기껏 복음을 전한 뒤에 버림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바울도 이를 염려하였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기껏 구원과 죄사함을 체험 후에 답보 상태에 있는 신앙인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래서 이른다.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라.’ 그럼에도 ‘이 일을 계속하라.’ 자격이 되고 안 되고, 그럴 처지가 아니든 기든….

 

오후께 아이 셋이 와서 설명문을 가르쳤다. 글쓰기를 하도 싫어해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설명문 형태로 써보게 하였다. 당연히 녀석들은 게임에 대해 썼다. 주제가 자신의 관심사여서 얼추 시간 안에 원고를 완성하였다. 수업을 마칠 때쯤, 아 엄마가 감사헌금 드리래요! 하고는 봉투를 내놓았다. 느닷없기도 하여서, 웬 헌금? 생각하다 알았다. 헌금함에 넣도록 하고 수업을 마쳤다. 교육비를 받지 않기로 하자 아이들을 통해 후원헌금을 그리 보낸 것이다. 느낌이 새로웠다. 세 아이는 공부방에서 오는 아이들이 아니었다. 봉투에는 십만 원이 들어있었다.

 

자, 이제 사람이 얼마나 간사한가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교회에서 주의 이름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확정하고 그리 해왔다. 실제 공부방에서 오는 아이들이야 무료로 글방을 오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공부방에서 교육비를 받는 것이니 엄밀하게 말해 무료는 아닐 것이다. 물론 별도의 교육비를 받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런데 처음으로 건물사장 둘째 아이와 그 친구 둘이 합쳐 셋이서 글방을 오게 되었다. 엄마들이 처음 상담을 할 때 교육비는 무료로 한다고 우쭐거리듯(?) 말했었다. 그리고 얼추 한 달이 지나 ‘감사헌금’이란 표현으로 아이들이 봉투를 가져왔다. 그 금액을 보고 내 안에서는 알 수 없는 실망감이 생겼다!

 

좋지 않은 것이다. 그럴 거였으면 정식으로 교육비를 정하고, 때에 맞게 정확히 요구하고, 요구조건에 맞지 않으면 ‘깔끔하게’ 그만두는 게 더 옳은 것 아닌가? 나의 위선적인 마음에 드는 생각이었다. 어떤, 알 수 없는 실망감으로 나는 수치를 느꼈다. 차라리 안 주면 모를까? 이게 다인가? 싶은….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나는 요나를 비웃었다. 저의 심리적 반발로 니느웨로 가라 하시는데 다시스로 간 것이고 이내 물고기 뱃속에서 죽었다 살아난 이가 아닌가?

 

한데 또 하나님의 용서가 저를 화나게 하였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욘 4:9).” 이게 오늘 내 모습이 아닌가? 뭔가 거룩을 가장한 게 아니라면 것도 감사헌금으로 드린 것에 대하여 어찌 실망할 수 있을까? 입을 삐쭉거리고 있자니 이와 같은 말씀이 들린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10-11).”

 

돌아와 나는 아내에게 내 심정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날 위해 기도해달라고 하였다. 정말이지 나는 참 한심하기 그지없다. 딸애가 늦게 오는 바람에 둘이서 가정예배를 드리며 주의 도우심을 바라였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어림없다. 인자한 척 너그러운 척 뭔가 초월한 척 구는 모습이 역겨울 뿐이다. 내 속엔 사악한 계산과 옹졸한 셈법이 가득하다. 어느 훗날 주 앞에 섰을 때, 일일이 나열하며 내가 주를 위해 권능을 행하고 귀신도 쫓아냈고 어린아이도 돌보았다고 내 입으로 자랑하는 자일 것이다.

 

아이들을 전심으로 사랑할 수 없는데, 그럼 원칙대로 딱 그만큼만 내가 정한 걸 준수하는 게 더 옳은 게 아닌가? 내 속엔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탕자의 송구함이 있는가 하면 뭔가 억울하고 분한 큰 아들의 서운함도 있다. “이에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31-32).” 아버지의 인자하심이 아니고는, 나란 사람은 참 구제가 안 된다.

 

눈물이 흐르면서 부끄럽기만 하다. 그런 내게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하고 어깨를 감싸시는 것 같다. 조막만한 아이 손으로 감사헌금을 드린 것에 대하여 어찌 내가 서운해 할 수 있었을까? 아,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나를 어쩌면 좋을까? 여러 가지로 복잡한 하루였다. 사회는 두 동강이 난 것처럼 난리법석이고, 내 안에서 고상을 떨던 마음은 제대로 제 모습을 드러냈다.

 

참, 너무 멀었다. 그래서 오늘 잠언의 말씀이 어느 때보다 직설적으로 들린다.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잠 11:17).” 누굴 위한 게 아니었다. 마치 목사라는 이름으로 누구에게 행세하고 뭔가 ‘널 위하여’ 존재하는 사람처럼 굴지만 그게 다 헛되었다. 결국은 자기 영혼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나의 인자함으로 선을 도모하는 게 아니었다. 그것으로 나의 평안이 주어진다.

 

언제쯤 이것이 온전하게 나의 기도가 될 수 있을까?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 40:8).” 나는 가증하고 오만하여서 어찌 감당이 안 되는 위인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11).” 그렇지 않고는 단 한 시도 살아 있을 수 없음을 고백한다.

 

또 하나, 나를 더 놀라게 한 게 있다. 이게 교육비 명목이면 의당 그렇구나 하고 받으면 그만이지만 헌금으로 아이 편에 보낸 것이니까 가만있어도 되나? 싶은 것이다. 그래서 본심을 숨기고(!) 고맙다는 인사를 아이엄마들에게 보냈다. 한데 그 답이 나를 더욱 부끄럽게 한 것이다. ‘아이들이 믿음 안에서 배우니까 제가 감사해요. (중략) 이런 만남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쩝.

 

이 아침,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2).” 다윗의 시를 읊조린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수렁에 빠지는 게 나였다. 주께서 끌어올리지 않으시면 내겐 재간이 없다. 그리하여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실 것을.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