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도가 정직한 자에게는 산성이요 행악하는 자에게는 멸망이니라
잠언 10:29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시편 39:1-2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논하여 철학하는 일은 고되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0:19).” 왜냐하면 생각이 머무는 자리에는 드러나지 않은 말들이 고인다. 말이 되지 않은 말은 사색함으로 자기 안의 확신을 더한다. 하지만 말을 하게 하시는 데야 별 수 없다. 아이와 성경공부를 시작하고, 철학도여서 그런가 유난히 질문이 많고 반론을 제기하는 횟수도 늘었다. 진도는 더디고 설명은 길어졌다. 이를 제지하지 않고 충분히 의심하게 두었다. 의심도 믿음의 방편이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요 20:25).” 물론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9).” 그 고달픔에 대해 묵상하게 된다. 믿지 못함으로 생기는 무수한 변수를 일일이 증명하려 드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 간단명료한 진리를 믿지 못할 때 얼마나 많은 가설과 주장과 그에 따른 연구와 학설이 난무하는지 모른다. 믿지 못함은 믿음으로 자신이 즐겨하던 것을 잃을까봐 두려운 것이다. 나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가 둘러보았던 혹성마다의 특이성을 말해주었다.
첫 번째 혹성의 임금은 저 혼자 있으면서 명령을 내리고, 두 번째 별에서 만난 허영꾼은 자신을 숭배하러 온 줄 착각하고 그 지식을 뽐내려 하였다. 세 번째로 들른 별에서 술주정꾼을 만났는데 그는 실제 깰까봐, 술이 깨면 창피해서 도로 술에 취한다고 하였다. 네 번째 혹성에서 만난 상인은 별을 세며 그 별을 따다 많은 이문을 남길 생각에 들떠 있었고, 다섯 번째로 만난 혹성에서는 가로등을 껐다 켰다하는 자의 맹랑한 수고가 이어졌다. 여섯 번째 혹성에서 만난 지리학자는 자신이 가보지도 못한 곳을 연구하느라 서재에 틀어박혀 늙어가고 있었다.
철학은 자못 말꾼이 되게 한다. 성경은 이론과 현실이 하나인 것을 역설한다. 그렇지 않다면 저들의 허물을 낱낱이 서술할 이유가 없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의 다윗도, 신약을 집대성한 바울도 다르지 않다. 누구도 선할 수 없는 선을 이루는 데 있어 하나님의 절대적인 관여와 통치를 거절한다면 어린왕자가 만난 여섯 명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아이의 구구한 반론과 맹랑한 주장을 꺾고 싶지 않았다. 말은 증명을 위한 게 아니라 위로를 더하는 것이다. 이를 오늘 다윗은 아름답게 진술하고 있다.
혹시나 말로 죄를 범할까봐 불의 앞에서 자신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그랬더니 선한 말도 할 수 없어 그 근심이 더해졌다.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시 39:1-2).” 우리는 말하는 사람이다. 증거하고 설명하는 자리에 있다. 나는 아이의 사고가 훗날 하나님을 드러내는 데 유용한 훈련이 될 것을 확신한다.
가령 아이가 겪고 있는 소화장애도 다 그 이유가 있음을 이해한다. 물론 본인은 이를 심리적인 것으로 결부시키는 데 한사코 반대의견이지만, 내가 이해하는 것으로는 ‘반동현상’이다. 억제하기 어려운 충동이 억눌림으로 이를 해소하기 위한 우리 몸의 방어기제다. 가령 강박신경증과 같다. 소화기능에 영향을 미쳐 자주 탈이 나고 컨디션을 저하시켜 맑은 정신을 훼손한다. 이를 설명해줘도 아이는 이를 부정한다. 그렇지 않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데 그게 여의치 않아 고통을 겪는다.
신경증이란 게 본래 예민해서 오는 것이다. 남들도 똑같이 겪는 일인데 저들보다 그 파장이 길고 깊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얼까? 이를 낫고자 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이로써 자신을 내려놓고 주의 도우심을 바라는 자리에 드는 것이다. 하긴 그게 안 되니까 날카롭게 반응하는 것이고 그게 그렇지 않다는 걸 증명하려니까 설명이 길어진다. 아무튼 나 역시 유익하다. 아이의 저돌적인 질문에 긴장도 되고, 때론 억지 앞에서 화가 날 때도 있지만, 예수님은 이를 무시하지 않으셨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나는 아이의 영민함이 그와 같은 고충으로 얻어진 것이라 짐작한다. 주께서 쓰시고자 그리 다루시고 계시다는 것도 말이다. 믿음이란 전적으로 주께서 주시는 것이지만 그 의심이 폭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 안에 담게 될 은혜가 클 것이라 사료된다.
목요일 하루는 그리 정해두었다. 오전에 성경공부를 와서 같이 토론을 하고 늦은 점심을 먹고 당구를 치고 돌아갔다. 뒤이어 중학교 1, 2학년 아이들 수업이라 조금 피곤하긴 하였다. 이 아이들이야말로 지독하게 수동적이어서 환장하겠다. 시키는 것만 하려하고 것도 회피한다. 한 녀석은 꾀만 늘어 눈치껏 요령을 부리고 한 녀석은 이에 맞서 그 엄마가 극성이다. 아니 토요일 오전에 다른 논술을 또 보낸다고 하니 답답할 뿐이다. 당최 책을 안 읽고 글도 쓰려고 하지 않는데 거기다 대고 역사논술이니 사고력논술이니 하는 따위를 붙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이의 마음에도 엄마에 대한 불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전에 같으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말 것인데 나야말로 실전에 투입된 늙은 병사처럼 고단하다. 아이에게 뭐라 위로를 하고 응원을 해주지만 것도 한계가 있을 뿐이다. 아니 아이 엄마라는 사람이 그처럼 아이 마음속에 미움이 가득한 걸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일까? 자주 때리고 자주 신경질을 부린다는 말을 100% 믿어줄 수는 없다 해도 아이의 투덜거림이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어떻게 하면 엄마의 기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친구들 엄마는 아예 포기를 했다는데 저는 그런 친구가 부러워요!
아이 말에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면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일까? 이론과 실제는 다르지 않다. 성경은 결코 성경으로 그치지 않는다. 좋은 말로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사는 데 따른 실제의 영향력은 없다고 한다면 이는 거짓이다. 주일에 나와! 하고 말했다가 엄마랑 같이 교회를 간다는 말에 나는 또 왜 소름이 돋는 것일까? 엄마가 믿는 자였구나! 하는 데서 더욱 놀랐다. 그럼에도 그처럼 강박적으로 아이를 굴리는 건 왜일까? 그 동인(動因)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런 것이다. 배가 고프니까 먹는다. 목마르니까 물을 마신다. 밥을 먹고 물을 마시는 데 따른 까닭이 분명한 것이다. 이처럼 왜 엄마들은 대체로 아이에게 집착할까? 저들이 느끼는 무엇, 그 불안의 까닭을 알지 않고는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는 일이다. 아이의 불만은 고조되어 쩍하면 존다. 설명이 조금만 길어져도, 심지어는 글을 쓰다가도 졸음에 못 이겨 쓰러진다. 이게 근데 거의 병적이어서 뭐라 나무랄 문제만은 아니다. 자신의 관심이 분산되면 바로 졸음이 몰려오는 것인데 마치 기면증 환자 같다.
그렇다면 새로운 동인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할 분명한 원인을 제공해야 한다. 어느 부인이 있었다. 저의 양손엔 무거운 보따리가 들려있었고 아이를 들춰 업고 있었다. 그 걸음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무거웠고 실제 죽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이때 한 청년이 그녀의 딱한 사정을 보고 등에 업고 있는 아이라도 대신 안아주겠다고 하였다. 그리곤 청년이 냅다 뛰는 것이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여인은 죽기 살기로 청년을 쫓으며 부르짖었다. 청년의 손에 아이가 들려있었기 때문이다.
살면서 우린 종종 소진된다. 나름 애를 쓴 일이 기진하게 하는 것이다. 이때 학습된 무기력이 찾아온다. 우울증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자신의 방어다. 아이는 기진한 것이다. 엄마의 지나친 간섭이 아이를 병들게 하고 있다. 그러니 아이엄마에게 그러지 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절대 들을 리 없다. 그러는 자신을 희생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아내와 나는 이런 류의 고민에 빠졌다. 감당할 수 없다고 해서 나 몰라라 하기에는 아이들의 병이 깊었다. 악이 발하고 때를 기다리는 것 같아 두렵다. 욱, 하는 순간 뭔 일이 날 것 같다.
가정예배를 드리며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맡기신 교회와 아이들을 주께서 책임져주시기를 간구하였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맡기긴 교회’라는 표현을 쓴다. 맡기신 아이들을 건사하는 게 사명이었다. 맡기신 하루를 살면서 맡기신 일을 감당하는 데 있어 주님은 우리의 능력을 아신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아이를 곁에 두셨다면,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데 주의 사랑으로 대하기엔 너무 짜증이 난다. 아이조차도 싸가지가 없기 때문이다. 되바라져 눙치는 게 가히 기술적이다. 눈치가 백단이다. 정나미가 떨어진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신다.
사실 우린 못 하겠다 못 하겠다 하면서도 실은 이게 가장 쉬운 일이라는 걸 잘 안다. 오죽하니 아이엄마는 술에 취해 살까? 틈만 나면 곤죽이 돼서 그 사랑하는 아이에게 술추렴을 해댈까? 단지 측은지심으로가 아니라 저들 심령을 안타깝게 여길 수 있기를 기도한다. 사는 게 사는 날 동안 전부라면 게 뭐 대수이겠나? 그래도 한 세상 그러다 가면 그만일 테니 말이다. 하나 우리는 영생을 안다. 주의 권능이 우리에겐 산성이라. “여호와의 도가 정직한 자에게는 산성이요 행악하는 자에게는 멸망이니라(잠 10:29).”
안 믿는 저들에겐 죽기보다 싫은 것이 우리에겐 죽기까지 값진 것이다. 그러므로 때론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시 39:9).” 못 하겠다는 말조차 입을 열지 않음으로 주께서 행하실 것을 기다린다. 아내와 서로 투덜거리듯 아이들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그래서 안 됐고, 그러니 주의 사랑밖에는 답이 없다는 데 정신이 번쩍 든다.
지나보면 알 일이다. “회오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잠 10:25).” 그러므로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 39:3-4).” 곧 나의 연약함을 알 때 비로소 주의 사랑으로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할 수 없음으로 주께 의지한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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