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전봉석 2017. 3. 15. 07:51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잠언 15:29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

시편 44:8

 

 

 

한 달에 한 번 장모는 꾸부정한 노구(老軀)를 이끌고 교회로 와서 손수 헌금을 바친다. 지난 해 생신 때 아내가 새로 선물한 ‘실버카’에 상체를 얹고, 허리를 한껏 구겨서 디딤 발에 힘을 준다. 힘겨운 몸을 밀어내는 발목은 관절로 뒤틀린 다리를 지나 두 팔로 기대어 눕다시피 한 상체에 전달되고, 그 힘으로 실버카는 밀려서 앞으로 굴러간다. 위태롭게 구르는 실버카 바퀴는 노인의 몸을 지탱하기에 버거워 보이고 그 버거움은 고스란히 건들거리며 구르는 바퀴를 통해 이 땅에 자국을 남긴다. 살아온 저의 생의 무게가 버거운 것이다.

 

봉투 한가득 적어놓은 기도제목은 또 그 사연이 늘 똑같은 것 같으면서 같지 않은 마음은 매월마다 다르다. 아내의 증언에 의하면 교회와 자손들을 위해 적은 기도 내용은 족히 한 시간을 넘겨 걸렸다. 그러니까 시간 반은 걸려 인천까지 와서 또 그만큼의 시간을 들여 기도제목을 적었다. 그 내용은 단순하여서 눈물겹다. 화려한 미사어구도 없이 그저 늙은 어미의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눌러 써내려간 것이었다.

 

면을 드시고 싶다고 해서 중국집에서 우동을 배달시켜 드렸다. 마주앉은 나는 마음이 짠하였다. 국물까지 싹 비우면서 장모는 말했다. 음식 남기면 벌 받아, 하나님이 다 내려다보고 계시는데. 나는 이 간단한 명제가 상쾌할 정도로 신선하였다.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잠 15:29).” 오늘 아침, 잠언의 말씀이 꼭 우리 장모의 마음인 것 같아서 놀랍다.

 

단순하고 명료한 것을 사사로이 여기면서 우린 부러 더 복잡다단한 것을 선호하며 산다. ‘하나님이 내려다보고 계신다’는 장모의 말이 경쾌하게 들린 것은 그것으로 이미 충분한 진리였기 때문이다. 사는 게 복잡한 까닭은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시 44:6).” 하는 진리를 한사코 외면하여서이다. 내 활을 의지하고 내 칼을 의지하려니까 부산하게도 할 일이 넘치는 것이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고달픈 길을 따라 늙었다. 늙어서 늙음으로 비로소 돌아보니, ‘음식 남기면 벌 받는다’는 이 간단한 깨우침이 남게 되는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한 것으로 음식은 목적이면서 수단이 되어 사람들의 생을 고달프게 하였다. 정작 자신에게 주어진 음식을 고스란히 남기는 게 부지기수라 돌아보면 먹을 게 너무 많아서이다. ‘벌 받는다’는 예측은 가정이 아니라 지혜이다.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5:3).” 경외함이란 내 안에 드는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으로 이를 지혜라 한다.

 

그리고 한 줄 쓰고 열 번은 되뇌어 읽어보는 장모의 작법(作法)은 참 기도가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술술 이어지는 화려한 언사(言辭)는 기도 언어로 적합하지 않다. 입에 밴 말들은 마음을 거치지 않고 머리에서 내려와 목구멍으로 나온다. 주님은 그래서 당부하셨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 그래서 신자는 언어의 연금술사가 되어야 한다. 새로운 표현을 찾아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 때 그와 같은 집중을 통해 주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인데, 이는 공교롭게도 ‘마음의 비밀’을 들춰내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시 44:20-21).” 그러므로 주 앞에서 정직해질 수 있는 시간이 기도이다.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잠 15:19).” 때로는 늘어놓은 중언부언이 가시 울타리가 되어서 도무지 넘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게으름이란 늘어져 아무 것도 안 하는 게 아니라 뭔가 한다고 열심을 다하지만 ‘자꾸 되풀이하는’ 또는 그런 말과 같다. 곧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잠 26:14).” 그런 거 보면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11).” 그런 것이다.

 

나는 장모의 기도제목을 끝까지 읽기에도 목이 멘다. 꾸부정한 몸으로 장모는 내 머리가 너무 하얗게 샜다고 혀를 끌끌 찼다. 서로가 늙어가는 일은 때로 정겹다. 한 생을 다해간다는 건 숭고한 일이다. 하나님이 맡기신 몸뚱이를 가지고 태어나서 여든을 넘겨 아흔을 바라보고 구르는 생이 눈물겹다. 우리가 어느 지점에서 만나 만났을 때는 알지 못했던 그 우연의 섭리를 알아가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경이롭다.

 

이에 이제 우리가 남은 생으로,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시 44:8).” 하는 말씀 앞에 앉는 일은 복되다. 하나님을 알면서 자신을 믿는 일은 모순이다. 주를 바라고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붙드는 것은 위선이다. 한데 그 의지라는 게 본디 사람으로 사는 동안에 거듭 거듭 우리 생에 관여하는 일이어서 이를 두고 싸우고 다투는 일이라 누가 이를 알 수 있을까? 장모의 기도가 바울의 기도를 닮았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날마다 죽어짐으로 영생에 다가가는 일이었다. 성화란 그렇듯 나를 죽이는 일이고 나를 죽이는 이 죽음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면서 자신을 믿는 성도는 없었다.

 

그리하여 바울은 스스로도 고통을 자처한 것이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거듭남이란 그 거듭나는 과정의 고통으로 거듭 거듭 주의 장성하신 믿음의 분량에까지 나아가는 일이다. “그 때에 물이 우리를 휩쓸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며 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시 124:5-6).”

 

이 아침, 말씀이 주는 교훈은 간단하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 선인도 악인도 감찰하셔서 그 마음의 비밀을 다 아신다. 그러니 음식을 남기지 마라. 주신 한 날의 밥상 앞에서 시간을 더하고 사람을 더하고 꾀를 더하여 중언부언하는 마음으로는 정작 그 배를 다 채울 수 없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 6:54-57).”

 

그리하여서 먹고 사는 일보다 숭고한 사명은 없는 것이다. 이를 남기는 자는 벌을 받는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신다.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막 13:10).” 그러므로 산다는 일은 나도 누군가에 살이 되고 피가 되어서 저들로 먹고 마실 수 있는 일용한 사람이 되는 일이다. 이 복음은 즉 주의 살과 피를 마신 자로서 이내 삶으로 살이 뜯기고 피가 쏟아지는 삶으로 곁에 두신 ‘내 어린 양’에게 먹이는 일이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 21:15).” 하루 한 날씩, 한 자씩, 한 걸음씩, 일용할 양식으로 족한 것이다. 나 또한 누구에게 주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날들로 채워지는 게 복이었다. 음식을 남기지 않는 일이 큰 사명이었다.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에 있느니라(잠 15:3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