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전봉석 2017. 3. 17. 07:45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잠언 17:9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시편 46:10

 

 

 

두 번째 전화가 오는데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뒤 세 번째 전화벨이 울릴 때야 못 간다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안 되지! 너 때문에 다들 인천에서 모이는 건데, **선생도 오신대…. 고3 때 담임선생이다. 내가 온다는 말에 궁금해 하며 나온다고 하신 것이다. 어찌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겠냐? 힘들어도 잠깐만 다녀가. 친구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난 너의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엉뚱한 내 말에 친구는 풉, 하고 웃으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보면 또 금방 기억나, 말하였다. 망설이는 내게 기도할게, 하고 친구가 말하였다.

 

지난 석 주간 질질 끌던 약속이었다. 이래저래 생각이 많았다. 30년을 훌쩍 넘어선 시간이었다. 말마, 선생도 이제 많이 늙으셨다. 언제 또 보겠냐는 말에 이어 친구의 말이 서글프게 들렸다. 나는 창가에 서서 저 밑으로 전철이 들어오는 걸 보고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이 종종걸음으로 출구를 찾아 쓸려갔다. 전철은 느리게 소래포구 쪽으로 내려갔다. 아이와 무려 네 시간을 성경공부를 한 뒤라 피곤하였다. 뒤이어 중학교 아이 둘이 왔다.

 

‘하나님을 깊이 확신하라.’ 책갈피를 열자 소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 4:17-19).” 본문의 말씀이 잘 벼린 칼날처럼 느껴졌다. 그러게. 같이 늙어간다는 말이 우스갯소리로 들리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하면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3, 16).” 오늘의 내가 예전의 나를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난 네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는 나의 말은 다소 뜬금없으면서 정직하였다. 우리가 친했니? 바보처럼 물었다. 저들이 기억하고 있는 내가 궁금하였다. 한 친구는 목사가 되려한다고 알려주었다. 모르겠다. 다른 재미를 다 잃은 것 같았다.

 

구원은 경험이 아니다. 신앙은 체험이 아니다. 자기 확신이 믿음일 수는 없다. 나는 아이와 성경공부를 할 때마다 아이의 당돌한 질문을 사랑한다. 막무가내로 우겨대는 자기 고집까지도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특성을 갈취하시는 분이 아니다. 베드로서를 읽으면 베드로가 보인다. 바울서신은 늘 바울답다. 물론 저들은 한 길에 서 있다. 나란히 한 곳을 바라보지만 그 느낌의 강도는 다른 것이다. 기질의 문제가 아니라 성품의 문제다.

 

친구 입에서 ‘기도할게.’ 하는 말이 나왔을 때 나는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저가 믿는 자인지 아닌지 묻지 않았다. 그 말은 내게 두시는 거였다. 기도해야지 뭘 자꾸 마음을 쓰나, 싶었다. 목사여서가 아니라 나여서이다. 직분이 나를 말하는 게 아닐 거였다. 성경의 분명한 통로는 나의 역약함을 통해서 성령이 일하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나는 병적으로 예민하다. 지도를 띄워 약속장소를 검색하고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동선을 살폈다. 예전의 나는 어땠을까? 좀처럼 기억이 나질 않았다. 구원이 경험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도하시기 때문이다. 신앙도 그러하여서 자칫 체험을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곤 자기 체험을 보편화시켜 모두에게 적용하려 드는 것이다. 다르면 틀린 것이고 같지 않으면 뭔가 이상한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강제하지 않으신다.

 

아이의 모난 발언에 대해 주의를 줄 뿐 회의하고 갈등하는 것에 대하여도 그게 기회일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하나님을 더욱 바로 알게 하시려고 각자 저마다의 형질을 내버려두신다. 내버려두심의 긍휼하심에 대하여는 묵상할수록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느니 한 방에 해결하고도 남으실 능력이 있다. 저들에게 광야 40년을 두신 것도 그러느니 없는 일로 하고 새로 판을 짜는 게 훨씬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능력이 없어서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시는 게 아니었다.

 

그러느니 말 그대로 그러느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주의 사랑은 가늠할 길이 없다. 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함이라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그때 그 시절이 아니라 나를 오늘에 두신 까닭이었다. 무슨 이유로 새삼 그 자리에 가야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립거나 얼마 남지 않은(?) 다들 늙어가는 처지에 얼굴이라도 좀 보자는 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더는 거절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주를 바라는 것밖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러므로 내가 붙들 것은 십자가뿐이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고후 5:11).” 내 안의 두려움이 무엇을 향한 것인지 안다. 하나님께 알려진 나는 싫든 좋든 주목받는 생이 되었다. 말 하나 행동 하나 모두 그 값을 물게 됐다. 한데 그 부담은 십자가의 보혈로 이미 지불된 것이어서 내 몫이지만 다는 내 값이 아닌 것이다.

 

그때는 내가 어떠하였는지 중요한 게 아닌 것이다. 물론 지금은 또 어떠하냐의 문제도 아니다. 글쎄, 나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오늘 말씀이 새로운 도전을 주는 것 같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 17:9).” 마땅한 것 같은데 행함으로 가져오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거듭 말함으로 수동적인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억울하게 여겨지는 마음을 저의 허물을 들춤으로 상세하려는 것이었다.

 

지난 날 나는 너희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물을 거 없다. 그 또한 나였음으로 오늘에 있는 게 아니겠나? 기골이 장대하고 우락부락한 노예선 선장이었던 존 뉴턴 목사가 누구보다 인자하고 선한 사람으로 그 사명을 다할 수 있었던 것도, 바울이 바울다운 열심으로 그 생을 주의 이름으로 불사를 수 있었던 것도 저가 앞서 예수를 박해하였던 사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기억을 회상하며 그리움에 젖는 일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 이는 다만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이 나를 어찌 돌이키시고 불러 세우셨는가를 주목할 뿐이다.

 

남의 허물을 거듭 말하게 되는 까닭은 자신의 허물을 가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난히 남 얘기를 많이 하는 사람은 대체로 구리다. 구린 데가 있어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저 혼자 들썩거리며 못 견뎌하는 것이다. 이를 시편은 응수한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오늘 나를 나로 여기에 두신 까닭은 주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려는 데 있었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일이란 것도 주를 영화롭게 하는 데 그 이유와 목적이 있었다. 아이를 가르치고 생각하고 저 때문에 속을 끓이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저를 위한 게 아니라 저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내가 섬기는 교회를 위한 것도 교회를 위한 게 아니라 교회 되신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었다.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이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와 같은 고백이 전적으로 내 것일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나의 생을 다하는 것이겠다. 이로써 나는 감당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일, 그리하여 주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며 구하는 일, 어디에 있든 살아서 주의 향기가 되는 일, 저의 편지인 사람으로 살아드리는 일.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2:15).” 그러므로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3:3).”

 

육의 마음판이라! 막연하여서 터무니없는 소리가 아니라 살아서 사는 동안에 읽혀지고 맡아지는 글자이면서 냄새였다. 이는 억지가 아니라 저절로 그리 되어지는, 꾸밈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저절로 우러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생에서 높아지기를. 오늘 잠언은 그래서 일격을 가한다.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요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잠 17:19).” 남의 허물을 들출 필요도 그래서 다툼을 좋아할 일도 없어야 한다. 이는 스스로 자기 문을 높이는 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의 나는 어떠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이는 이미 잊혀진 바 되었다. 그런 자가 남의 지난 일을 기억한다면야 그게 어디 말이 되나? 저의 허물을 덮는 게 사랑이었다. 주의 사랑이란 때로 기억하지 않는 데 있었다. 모든 열등의식은 쓸데없이 많은 걸 기억하려는 데서 오는 자기방어인 것이다. 이에 오늘 시편의 처방은 간결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