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혀는 글 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

전봉석 2017. 3. 16. 07:50

 

 

 

고되게 일하는 자는 식욕으로 말미암아 애쓰나니 이는 그의 입이 자기를 독촉함이니라

잠언 16:26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 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

시편 45:1

 

 

 

아주 오랜만에 아이가 문자를 주었다. 지난달에 전역을 하였고 뒤미처 돈을 버느라 연락도 못했다고 하였다. 하필 나는 늘어져 다소 우울감에 젖어 있었다. 초등학교 아이들의 수업을 마치고 소진된 상태이기도 하였다. 답답하여 전화를 하였다. 아이의 목소리를 듣자 저 혼자 울컥, 하는 마음이 이상하기도 하였다. 주일에 와야지. 나의 목소리는 서글펐다. 그럼요, 이번 주에 가 뵐게요. 아니, 날 뵙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예배에 나와야지. 그러니까요, 예배에 갈게요. 아이의 대답은 서글서글하였다.

 

여태 나 혼자 숨죽이고 애태우던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럼그럼, 우리 교회 창립멤번데. 나 역시 목소리가 밝아졌다. 그니까요, 우리 교회 장론데요. 아이의 맑은 변죽이 나를 울먹이게 하였다. 이럴 걸, 왜 하나님은 그처럼 나를 들들 볶으신 걸까? 야박하게도 나는 마음을 지우고 있었다. 지난달인가 그 언젠가 보지도 않는 아이의 카톡에 주저리주저리 써 보냈던 말이 그 값을 하고 되돌아온 듯하였다. 더는 안 되는가보다,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 앞에 나는 정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혼자서 엎치락뒤치락 그 마음을 뒤집기 일쑤고, 애면글면 저 혼자 속 끓이다 지쳐서 투덜거리고 입을 댓 발 빼물기 일쑤니까 말이다. 실은 초등학교 아이들을 대하면서 내가 작심하였던 것과 실제의 모습이 엄연히 다른 데서 오는 괴리감에 지쳐 있었다. 너무 맹랑하고 터무니없어서 화가 났던 것이다. 이럴 걸 내가 뭐 하러 내가 이러나, 싶은 것이다. 그럼 뭐 줘요? 그건 싫은데, 우리 맘대로 하면 안 돼요? 토요일에 부러 더 시간을 내는데 아이들의 요구가 가관이었다.

 

그런 걸 또 무슨 일 때문에 아내에게 짜증을 부렸는데, 그 내용이 내가 못하겠는 걸 아내에게 왜 넌 못하느냐고 소리치는 꼴이었다. 이래저래 나는 나에게 넌더리가 난다. 나는 내가 너무 힘들다. 믿음의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타고난 수양이 있어 그처럼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일까? 어르고 달래 아이들 수업을 마치고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는데 한 녀석이 그러는 것이다. 여기서 예배도 봐요? 같은 자리에서? 몇 명 안 되겠네? 속사포처럼 튀어나오는 아이의 말에 대답할 겨를도 없이 엘리베이터가 당도하였다.

 

그리고 돌아와 소파에 누워 탈진한 사람처럼 나는 나를 어쩌지 못하고 건성으로 책을 들고 있을 때였다. 아이와의 통화가 끝나고 나는 입을 삐쭉거리면서 주 앞에 앉았다. 참 내가 너무 한심하고 답답해서 말이다. 언제쯤 나는 내가 꿈꾸는 너그럽고 인자하며 온유하고 의연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왜 혼자서 찧고 빻고 그처럼 속을 끓이는 것일까? 그러다 불쑥 아내에게나 못되게 구는 나의 됨됨이가 처량하고 염치없어 살 수가 없다. 나는 그저 주 앞에 용서해주세요, 불쌍히 여겨주세요, 이 말만 되풀이하며 울먹거렸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참나원! 하필 펼쳐서 읽은 책 구절에서 성경이 이르는 말씀이 단호하였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그 의미가 너무 선명하여서 눈이 부시게 마음을 찌르고 들어왔다. 알겠는데 그게 그처럼 쉽지 않아서 어려운 것이고, 그 어려움은 도무지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어서 더더욱 터무니없는 일이고, 그리하여서 나의 애원은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어서 송구하였다.

 

나의 기대와 바람은 물론 실망과 낙심까지도 부인해야 하는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행한 것에 대하여는 잊음으로 상책일 텐데, 미련도 하수상하여 혹시나 싶은 어떤 기대는 나의 수고를 들쑤셔 억울함을 더한다. 바람은 가벼워서 내가 그리고도 계면쩍고, 실망은 염치없게도 한 것에 비해 바람이 너무 부풀려져서이다. 허상은 맹랑하여서 두둥실 현실에서 떠오르는 것이다. 그리하여서 낙심은 제풀에 익어버린 낙과처럼 그 몰골이 가히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나와 별개로 일하고 계셨다. 어느새 나는 마음을 접고 다독여서 나 살 궁리나 하고 있었는데, 뜬금없는 아이의 답변이 그 대답이 나의 지친 영혼을 놀라게 하였다. 변덕도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인 것을. 행여 이 십자가를 예수님의 것으로 착각하는 데서 나는 지치고 서러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주를 위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였습니다, 하는 지청구가 말이다. 그래놓고는 괜히 억울하고 서러운 것이다. 결코 이는 극기와 희생이 아니었다. 헌신은 자발적일 때 아름답고 금세 잊을 수 있음으로 깃털 같다.

 

이를 마치 훈장처럼 가슴에 달려고 하니까 옷은 늘어지고 어깨는 무거워서 발걸음은 고단한 것이었다. 것도 하는 게 없으면서 뭘 했다고 큰 소린지 모르겠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내 의지를 포기한다는 것이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러는 자신까지도 주의 사랑으로 돌봐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할 때,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아 그럴 수 있는 것은 그럴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럴 수 없음으로 다시, ‘나는 이제’ 주 앞에서 다짐으로라마 붙들어 다시 고백하는 일이었다.

 

결국 그 일이 단지 내 일이었더면 ‘고되게 일하는 자는 식욕으로’ 그칠 거였다. 이로 ‘말미암아 애쓰나니’ 그 수고가 늘 하염없어서 힘에 부치고, ‘이는 그의 입이 자기를 독촉함이니라.’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인 것이다. 일이 일로 여겨지는 한 자기 십자가의 무게는 무엇이 덧대어진 게 아니라 결국은 자기 무게로 불어나는 것이었다. 내가 나로 고된 까닭은 내가 못하는 걸 두고 남을 탓하고 저를 원망하느라 더해지는 무게였다. 그래놓고는 다시 애쓴다. 애쓰느라 입이 타들어가고, 자기 입이 독촉하여서 다시 주워 삼키듯 생각에, 마음에, 요구에, 갈등에, 서러움에 치인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마 15:16).” 내게 물으셨다. 나는 아이와 통화하고 입을 삐쭉거리며 주 앞에 앉았다. 신앙은 허상이 아니고 믿음은 터무니없는 바람이 아니었다. 이를 주님은 일상으로 놓아두신다. 그러니까 막연한 구호나 멋진 설교가 아닌 것이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6).” 삶이다, 살아서 드러나는 본질이고 행위와 말투와 표정으로 증거 되는 가치이다.

 

그리하여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10:32).” 사람들 앞에서 주를 시인하는 삶으로 살아서 말씀이었고 증거였고 복음이었다. 주께서 이르시되 천국은 이미 놓였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12:28).” 귀신은 몽롱한 가운데 더해지는 나의 십자가의 무게다. 가중된 생각이며 의무고 공연한 책임이며 다하지도 못할 말들의 건더기다.

 

이에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 10:14).” 아이들을 곁에 두시고 그 한 영혼이 주 앞에 오롯이 서기까지의 전 과정이 하나님 나라에 따른 증거였다. 밉살스럽고 얄밉고 되바라져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데도, 그게 어디 아이에게만 그러하던가? 모름지기 아이는 그래도 걸 꿍치지는 않지! 어른이랍시고 얼마나 사기를 쳐대는지, 나의 위선이었고 거짓 웃음이었으며 지어낸 인자함이었고 입에 발린 친절이었다. 곧 내 안에 어린아이가 용납돼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란 단순하고 모자란 듯 주만으로 모든 게 감사할 따름인 자이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 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시 45:1).” 그 원리는 간단하여서,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16:20).” 곧 말씀에 주의하는 것과 주를 의지하는 것의 상관관계를 알겠다.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나를 어쩔 수 없지만 그런 나를 지고서 주 앞에 서는 일이 주를 따르는 것이었다. 내가 내 십자가를 어찌 해결해보려고 하는 게 낭패다. 외레 그것으로 말씀에 주의하게 하신다.

 

이때 그 행위가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있다면 원수라도 화목하게 지낼 수 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7).” 그러니까 저를 어떻게 하는 게 우선이 아니라 내가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더 빠른 길이다. 주가 하신다. 남은 걸음을 주께서 인도하신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9).”

 

그러므로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32).” 내가 나를 다스리려고 할 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원수도 화목 되고 나 자신도 다스릴 수 있었다. 말이 좋아 애들 때문에 속 태우는 것이지, 그 안달이 나를 비롯해 곁에 있는 사람을 못살게 구는 것이어서 그게 어찌 ‘착한 행실’로 드러날까. 어림없는 소리다. 거룩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찾아가는 것이다.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다. 이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이에 주를 더욱 바라고 구하는 일, 이내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 그러므로 나의 착한 행실이란 경건하고 바른 삶을 추구하는 데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만 나의 주로 시인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서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8-3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