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잠언 23:1-5 / 허무한 것에 대하여

전봉석 2017. 7. 28. 11:20

20170730 주일

잠언 23:1-5

허무한 것에 대하여

    

 

23:1 네가 관원과 함께 앉아 음식을 먹게 되거든 삼가 네 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며

23:2 네가 만일 음식을 탐하는 자이거든 네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

23:3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라 그것은 속이는 음식이니라

23:4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23:5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들어가는 말

 

허무하다는 것은 기껏 무엇을 했는데 그것이 헛되게 됐다는 것이다. 애써 씨 뿌리고 파종하여 무더운 가뭄 날에도 기를 쓰고 물을 길어다 근근이 농작물을 건사해왔건만, 순식간에 물난리로 쓸려갔을 때. 다 지은 집이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어느 집은 무너지고 어느 집은 든든하다는 것이다.

 

지난 25일 오후 5시 45분, 망고식스 대표는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가맹점 130개, 연매출 480억을 호가하며 승승장구하던 ‘커피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리는 자신의 신실함을 믿었다가 허무한 결과를 보곤 한다. 최선을 다하면 돼! 성실하면 하늘도 돕는다. 호언장담하며 살았지만, 허무함이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닥쳐와 휩쓸고 간다. 허무하다는 건 다른 말로 한심하다는 것이다. 한심하다는 건 정도에 맞지 않아 마음이 가엾고 딱하다는 것이고, 분명한 건 당한 뒤에야 알 수 있어 속수무책이다. 다들 나름 방도를 세우고 끝내 아니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오늘 잠언의 말씀은 우리에게 바로 그, 인생의 허무함에 대하여 일깨우신다. 허무함의 대명사는 ‘술’이다. 술이 의미하는 함축적인 의미는 첫째, 인위적으로 즐거움이거나 슬픔을 배가시키려는 데 있다. 흥을 돋을 때 또는 슬픔을 달래느라 찾는다. 둘째, 술은 습관적이다. 취한다는 건 되풀이 되는 일이다. 습관이란 가벼운 한 번은 없다. 셋째, 자기 위안의 대명사다. 누구에겐 돈이고, 게임이고, 게으름이다. 자기기만의 외형적인 형태가 술이다.

 

스스로 만족을 구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제외하는 기쁨이다. 하나님 없이도 내가 알아서 위로를 또는 기쁨을 누리려는 데 있다. 넷째, 술은 모든 허무함의 특징을 복합한다. 깨고 나면 별 거 없다. 그때만으로 족하다. 유행과 같고, ‘남들처럼’이라는 이상과 같으며, ‘남과 다른’ 허위를 뜻하였고,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은 자기기만이었다. 이는 곧 하나님을 기만하는 일이 된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술을 마셔도 되느냐, 하는 따위의 논쟁은 그래서 똥 같다. 허무한 것이다. 고작 그런 걸로 입씨름할 정도면 그냥 마시고 취하라.

 

1. 허무한 것들의 특징

 

1) 음식을 탐하지 마라.

“네가 만일 음식을 탐하는 자이거든 네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라 그것은 속이는 음식이니라(잠 23:2-3).”

 

먹는 문제는 사는 문제의 가장 근본적이다. 예수님도 시험을 받으셨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먹기 위해 사는지 살기 위해 먹는지, 이 문제는 항상 우리를 갈림길에 서게 한다. 먹기 위해 사는 자는 의당 욕심이 과하고, 살기 위해 먹는 자는 청빈하다. 일용할 양식에 대하여는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6:11).”

 

그래서 지혜자는 구하였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8-9).” 족한 줄 알지 못할 때, 흔히 탐한다. 탐한다는 건 가지거나 차지한 것으로 만족하지 못해 더 욕심을 부리는 일이다. 식탐은 본능적인 것이면서 또한 의지적인 일이다. 됐는데 더 갖겠다는 것이다.

 

잠언은 이를 빗대어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18:8).” 뭘까? 우리 뱃속에는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악의 구덩이가 있다. 죄로 인한 스올이다. 남들처럼 살고 싶고, 남보다 낫게 여겨지고 싶다. 그러기 위해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고, 이는 우리 뱃속이 갈구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이를 엄히 경고하셨다.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막 7:16).”

 

믿는 자의 달라진 점은 그 뱃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일이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8).” 그러므로 자기 뱃속만 채우려던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생수의 강이 흘러 남에게 내어주는 삶을 산다. 이에 스스로 ‘음식을 탐하는 자’라면, 제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 이건 또 무슨 말씀일까? 그게 손 때문이면 손을 잘라라. 그게 다리 때문이면 다리를 잘라라. 그게 돈이 많아서면 덜어내라. 그게 가진 게 많아서면 나눠라.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 18:8).”

 

2)부자 되기에 애쓰지 마라.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잠 23:4).”

 

알다시피 이 땅 어디에서도 부자가 되려면 정당하게는 어렵다. 이문을 내려면 적당히 속이고 감추고 더해서 그럴듯하게 정직을 가장해야 한다. 장사하는 사람이 밑지고 판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부자가 되려는 사람은 법대로 원칙대로 살 수 없다. 오직 한 번뿐인 인생, ‘욜로족(you only live once)’이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다. 이때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며 사는 우리들은 저들의 조롱거리가 된다(마 22:1-6, 눅 14:16-22).

 

부자들은 꿈이 많다. 확장하여 더 많은 무엇을 꿈꾼다. ‘젊은이여 꿈을 가져라.’ 내남없이 부자 되는 법을 연구하고, 서로를 닮으려 애쓴다. 그런데 성경은 엉뚱하시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0).” 곧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지 않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

 

3) 사사로운 지혜를 따르지 마라.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미련한 자의 귀에 말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네 지혜로운 말을 업신여길 것임이니라(잠 23:4, 9).”

 

우린 사실 부럽다. 저들처럼 떵떵거리고 살고 싶다.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게 꿈이다. 좋으면 장땡이다. 뭘 더 바랄까! 그런데 보면 그게 당사자일 땐 다르다. 남들 부러움을 한 몸에 샀을 ‘커피왕’은 회생절차를 신청하고 그 허무함을 견디지 못해 자살했다. 누군 죽어라 공부했는데 원하는 성적을 얻지 못해 죽었다. 억울해서, 괴로워서, 슬퍼서… 이 모두는 허무해서이다. 기껏 수고한 대가가 고작 이건가, 싶어서이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사사로운 지혜를 따랐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싫고 하나님의 도우심만 바라고, 말씀은 싫고 그 안에 좋은 교훈만 바라면 영락없다. 종종 기독신문에 올라오는 기사 가운데, 그리스도인으로 문신을 하는 게 죄인가 아닌가? 동성애는 구원받지 못하는가? 주일에 꼭 교회를 나가야 하는가? 십일조를 교회에 내는 게 옳은가? 은혜의 시대에 살면서 구약성경은 의미가 있는가? 술 마시면 천국에 못 가는가? 하는 따위의 논조가 올라오면 답답해진다. 도대체 달은 안 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운운하는 꼴이다.

 

감히 말하건대 미련한 자에겐 말해봐야 소용없다. 그렇게 살다 죽던가, 이내 주의 긍휼하심 가운데 은총으로 돌이킬 기회를 얻든가. 안 듣는 데야 별 수 없다. 살아라. 그렇게 살아서 기어이 후회하라. 이에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눅 9:5).” 어쩌겠는가.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10:11).” 곧 사사로운 지혜에 끌려 다니지 말라는 소리다.

  

  

2. 해결책

 

1) 훈계에 착심하라.

“훈계에 착심하며 지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잠 23:12).”


2) 부러워하지 마라.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17).”

 


3. 구체적인 실천 방법

 

1) 자기만족에 겨워하는 사람과 사귀지마라.

“술을 즐겨 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도 더불어 사귀지 말라(20).”


2) 배부른 것에 도취되지 마라.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라 그것은 속이는 음식이니라(3).”


3) 향락을 따르지 마라.

“대저 음녀는 깊은 구덩이요 이방 여인은 좁은 함정이라(27).”


4) 근본을 지켜라.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22, 25).”


5) 자신의 의지를 주께 드려라.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26).”

 


나오는 말

 

재앙의 실체가 무언가. 그 근본은 술이고, 그 바탕은 자기만족이었다.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상처가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에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29-35).”

 

재앙이 뉘게 있나? 자기만족에 겨운 자가 아니던가? 근심은 누가 하나?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는 자의 것이고, 분쟁이 뉘게 일어나나?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자들이다. 원망이 뉘게 있나? 자기 멋대로 굴던 자가 그런다. 까닭 없는 상처가 뉘게 있나? 앙갚음을 위해 분을 쌓아둔 채 이를 풀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붉은 눈이 뉘게 있나? 그저 돈돈거리며 혈안이 돼 있던 자들이다. 저들은 술에 잠겼다. 더 자극적인 저기만족의 혼합된 술을 찾는 자다. 얼마나 그럴듯한가! 몽롱하니 알싸하고 모든 걸 가진 듯 만족스럽다. 그 눈에 괴이한 게 보인다.

 

슬픔이 다 물러간 것 같고, 세상이 내 것 같다. 저는 구부러진 말도 서슴지 않고, 때려도 아프지 않다고 우긴다. 그런데(!) 외로움을 달래줄 줄 알았던 그 모든 수고와 애씀을 나를 돛대 위해 누였다. 이젠 감각이 없다. 언제 깰까 두려워 다시 술을 찾는다. 안 그러면 죽을 것 같다. 이게 어디 알코올 중독자만인가? 오늘 날 우리 모두는 죄에 중독되어 나날이 더한 허무함에 집착한다. 그러면서도 누가 뭐라 일러주면, 저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잠 26:16).” 영적 게으름의 결과가 술 취함이다. 그 끝은 허무함이고, 기어이 가 봐야 비로소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