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716 주일
잠언 22:29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
22:29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들어가는 말
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려면 그게 무엇이든 오랜 숙련 과정이 필요하다. 누구에게 ‘달인’이라고 할 때, 그게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저의 몸은 그 일을 인지보다 빠르게 감지하고 행한다. 생각하고 몸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몸을 움직여 생각이 밴 반응한다. 반사 신경처럼 부지불식간에 무슨 일이 닥칠 때, 거의 본능적으로 반응한다는 말이 그런 것이다. 감각이 있다는 말은 타고났다는 것보다 연습됐다는 데 더 무게가 실린다. 그 일에 능숙한 것이다. 저절로 그리 되는 일처럼 말이다.
한 번 두 번 거듭하던 것이 어느새 습관이 되고, 습관은 제2의 본능이 되고 인격이 되어서 돌아보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누굴 만나고 우연히 무슨 일을 시작한 것 같은데 어느새 나도 그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있는 걸 종종 발견한다. 가령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뭘 어떻게 써야 하는지가 아니라, 그냥 쓰는 것이다. 내가 잘 써야지, 할 때 이미 ‘잘 쓴다’는 것에 맞추는 게 된다. 운동을 잘하고 싶다면 몸을 놀려 반복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우연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이어지면 인격이 되고 인격은 결국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놓는다.
‘자기 일에 능숙한 사람’은 성실한 사람이다. 최소한 그 일에서 무던하였다는 소리다. 누가 악기를 잘 다룬다고 하면 저의 시간과 마음과 연습이 그만큼 스며든 것이다. 보기만 하고, 듣기만 하고, 아무런 행함도 없었다면,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믿는다는 건 막연한 느낌이나 동조가 아니다. 그러거나 말거나가 아니다. 확신을 더하고 그에 따른 자신의 저항을 이겨내는 일이다. 수시로 드는 의심과 회의를 극복하는 일이고 자기주장을 꺼꾸러뜨리는 일이다. 곧 믿음은 하나님의 일이다.
사람들이 물었다.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요 6:28).”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29).” 곧 우리의 일은 믿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우리는 믿어지는 걸 믿지는 않는다. 믿어지지 않으니까 믿는 것이다. 믿음은 온갖 의심과의 싸움이다.
‘자기 일’ 곧 우리의 일을 믿음으로 놓고 보자.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게 우리의 사명이라면, 우리가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다. 그럼 ‘믿는 일에 능한 사람’으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본문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의 의심이 염려에서 오늘 걸 아시고 예수님은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셨던 말씀을 먼저 보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또한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눅 12:27).” 새는 부지런하고 백합화는 진득하다. 이에 우리도 염려하지 말 것은 ‘아버지께서 기르신다.’ 백합화는 그 향기가 짙다. 백합은 흔한 들꽃이다. 그럼에도 솔로몬의 영광보다 훌륭하고 하신다. 새와 백합화는 ‘자기 일에 능한 것’이다. 주신을 거기에 두신 이를 믿고 맡기는 일에서 말이다.
우리의 할 일, 믿는다는 일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잠 22:1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9).” 곧 우리가 행해야 할 일이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의 가장 큰 영광은 ‘주를 바라며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이 들까? 그럼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학교 이름을 빛내고 상을 받으면 영광스럽다. 회사에 공을 세우면 높이 평가 받는다. 그러느라 불철주야 우리는 자신을 희생한다. 누구도 억울하게 여기지 않는다. 장사하는 사람은 손님을 위해 간 쓸개도 다 빼놓고 한다. 아니, 그러면서 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하면 손해 보는 일처럼 여기는 걸까?
우리는 마음의 정결을 사모한다. 남들은 외모를 치장하고 ‘보이는 나’에 주력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신다. “그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욥 34:21).” 우리는 결과를 보지만 하나님은 동기를 보신다. 우리는 성과에 연연하지만 하나님은 과정을 주목하신다. 영혼을 감찰하신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를 앞에 두고 그의 ‘입술에는 덕’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말은 곧 그 사람의 인격이다. 저는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그는 결코 값어치 없이 굴지 않는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이것을 네 속에 보존하며 네 입술 위에 함께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잠 22:17-1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요 8:54).”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 한데 그 일은 목적이 아니라, 그 일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목적이시다. 우리가 주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무엇일까? 큰 상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만이 아니라, 아무런 상도 받지 못했지만 주를 바라는 일과 주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충실하는 것. 그러기 위해 오늘 본문은 이를 분명하게 정리해주고 있다.
ㄱ. 귀를 기울여 말씀을 듣는 것
ㄴ. 그 지식에 마음을 두는 것
ㄷ. 이를 우리 속에 보존하는 일
ㄹ. 그리하여 내 입술 위에 함께 있게 하는 것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이것을 네 속에 보존하며 네 입술 위에 함께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잠 22:17-18).”
귀를 기울여 말씀을 들으려면 다른 소리에는 둔감해져야 한다. 누가 어떻다는 말을 듣고 자신을 비교하려는 마음도, 그래서 괜히 주눅 들고 의기소침해지는 따위도 교만을 능가하는 것이다. 내가 선호하는 것을 줄여야 한다. 즐거워하는 일을 우선하던 데서 ‘귀를 기울여’ 보다 적극적인 행함이 있어야 한다. 이를 마음에 두는 일은 흥얼거리고 늘 모든 결정의 표준으로 삼는 일이다. 보존한다는 건 지킨다는 것이다. 매우 신경 쓰는 일이며, 우선순위를 두는 일이다. 그러할 때 우리 입술 위에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다.
* 입술의 원리
-불의와 거짓을 멀리하라.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리라(욥 27:4)”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시 34:13).”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잠 4:24).”
-간구하는 입술로 삼으라.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셀라)(시 21:2).”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141:3).”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배우고 확실한 일에 거하는 일
“내가 네게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 내가 모략과 지식의 아름다운 것을 너를 위해 기록하여 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잠 22:19-21).”
은혜란 오늘의 일이지 지나간 어제의 일이거나 앞으로 올 내일의 일이 아니다. 어제는 어제의 은혜로 족하게 살았다. 오늘은 오늘의 은혜로 산다. 우리로 이를 알게 하시려고 때론 더디고, 때론 실패한 자리에서, 때론 낙심으로, 때론 실의에 찬 시간으로도 허용하신다. 왜냐하면 우리로 돈을 의뢰하지 않게 하시려고, 사람을 의지하고 자신의 능력과 판단을 우선하지 않게 하시려고, 이를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 배워야 한다. 지식은 저절로 아는 게 아니라 서툴게 부대끼고 넘어져 다시 일어나면서 배운 것이다.
ㄱ. 여호와를 의뢰하는 일
ㄴ. 확실한 말씀을 깨닫는 것
ㄷ. 나를 보내신 자를 앎
ㄹ. 진리의 말씀으로 화답하는 일
“내가 네게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 내가 모략과 지식의 아름다운 것을 너를 위해 기록하여 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잠 22:19-21).”
그 어떤 것으로도 아니고 오직 주님만 의뢰하는 것으로, 이는 확실한 말씀을 깨닫는 일이다. 이 깨달음은 우리의 성찰과 노력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주를 의뢰하는 일 곧 나를 보내신 이를 바로 아는 것이다. 우리는 부모를 선택한 적이 없고, 우리의 신체를, 곁의 사랑하는 사람을, 어떤 일의 결과를 선택한 적이 없다. 주신 바 주신 이의 뜻이다. 우리가 그 진리의 말씀으로 화답하는 삶을 사는 일, 바로 순종이다. 부모가 말할 때 네, 하고 순종하는 것이 그 말씀에 화답하는 것처럼 확실한 말씀을 깨닫고 이에 화답하는 삶은 순종하는 삶이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나오는 말
빛과 소금이 되는 삶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잘 모른다. 충동적이며 감정적이다. 세상은 그러하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저들을 마땅히 가르치라고 하신다. 주님은 우리를 ‘빛과 소금’으로 일컬으며,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 5:13-14).”라고 하셨다.
‘마땅히’는 당연한 것이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다. 우리는 세상에 빛이다. 소금이다. 산 위의 동네다. 빛이 더하면 온갖 벌레들도 꼬여든다. 소금은 부패의 저항이 만만찮다. 산 위의 동네는 눈에 잘 띄지만 뜨내기들도 드나든다. 그럼에도 마땅히 그 역할을 해야 한다. ‘가르친다’는 건, 우리가 앞서 배우고 확신한 일에 대하여 알려주고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건 은둔의 생활을 사는 게 아니다. 혼자 도를 닦는 일도 아니다.
사람들과 씨름하며 사는 일을 사명으로 주셨다. 여기서 저들처럼 사는 게 아니라, 마땅히 저들을 가르치는 삶을 살라고 하신다. 그러기 위해 빛이 돼야 한다. 다들 그래도 나는 안 그래야 하는 것이 빛이다. 세상이 원래 그래도 우리는 안 그런 존재들이어야 한다. 빛이니까, 어두운 데서 빛을 발해야 한다. 이때 어둠은 우리를 아니꼽게 여긴다. 적개심을 품고 대적하기도 한다. 소금은 부패를 막는다. 그러자니 그 저항은 가히 필사적이다. 산 위의 동네로 있는 삶을 사람들이 우습게 여길 수 있다. 아무나 드나들고 대수롭지 않게 취급한다. 교회라고 하면 그러려니 하고 만만히 여기는 것도 그래서다.
그럼에도 우린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사람들이다. 믿음으로 그 일은 가능하다. 내가 어떻게… 하는 의심도 당연하다. 나는 못한다. 불가능하다. 내가 어찌 ‘빛과 소금’이 되고 ‘산 위의 동네’가 되어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는 걸 너무 처절하게 느끼고 확인하고 그러므로 절망스러운 마음으로 주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주의 영광을 위한 게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맡기신 일, 하나님을 믿는다는 일.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 22:3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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