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잠언 28:1 / 쫓기지 않는 삶

전봉석 2017. 9. 8. 10:54

20170910 주일

 

잠언 28:1

쫓기지 않는 삶

 

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

 

 

들어가는 말

 

우리의 성실함은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엇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무엇을 위한 성실함은 결과에 따라 좌우되고, 무엇에 의한 성실함은 결과와 상관이 없이 자유하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이치는 세상에서의 성실함이고, ‘하늘을 경외함으로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가르침은 성경에서의 성실함이다. 실제적으로 이를 어찌 구분할 수 있을까? 오늘 말씀은 명료하다. 쫓기느냐, 담대하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에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지리라(잠 28:18).” 우린 빛의 자녀들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어려울 거 없다. 밝은 데서 받으면 선물이고 어두운 데서 받으면 뇌물이다. 남들이 다 듣는 데서 말하면 정직이고 은밀하게 속삭이면 모략이다. 앞으로 손을 모으면 겸손이고 뒤로 손을 붙들면 교만함이다. 중언부언 말이 많으면 숨기는 게 있다는 소리다. ‘예’나 ‘아니오’면 거리낄 게 없다는 소리고 맹세까지 하면 감추는 게 있다는 것이다. 본래 음흉한 눈빛은 밝은 데서도 흐릿한 법이다. 


이에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잠언 28:20).” 우리는 충성됨으로 이미 복이 많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25:13).” 충성이란 순종함이다. 순종은 내 의견을 묻지 않는다. 자아실현이 아니다. 때론 거칠고 부득이 나에게 손해가 끼쳐져도 충성은 그 주인의 뜻을 따른다. 곧 우린 어떤 조건을 개선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두신 자리에서 거기에 두신 이의 뜻에 순종하는 자이다.

 

이에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26).” 우리는 자기 마음을 따르지 않는다. 우리 안에 주의 마음을 따른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그럼 이를 어찌 판단할까? 저마다 주의 뜻을 따른다고 하니 무엇이 기준일까? 단언하건대 우리의 마음은 아니다. 그래서 말씀을 붙든다. 말씀이 말씀하게 하셔야 한다. 말씀 묵상이 우선이다. 그런 자는 기도한다. 자신의 요구를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 말씀하시는 주의 말씀을 들으려고 말이다.

 

오늘 우리는 쫓기는 삶에서 쫓기지 않는 삶으로의 이치를 본문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

 

1. 성실하게 행하는 자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지리라(잠 28:18).” 성실하게 행하는 데 있어, 가장 쉬운 방법은 굽은 길을 분별하는 것이다. 그럼 굽은 길로 행하는 자의 특징은 어떨까?

 

첫째, 저는 자신보다 못한 자를 압제한다. 마치 부르짖는 사자 같이, 주린 곰 같이 으르렁거린다.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관원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 같으니라(15).” 자신이 뭐나 된 줄 안다. 남에 대해 엄격하다. 특히 자신보다 약한, 가난한 백성을 향해서 말이다. 이는 자신이 가난해서이다. 남을 돌볼 여력이 없으면서 자신을 뭐나 된 듯 여긴다.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가난한 자는 곡식을 남기지 아니하는 폭우 같으니라(3).”

 

둘째, 남에게 인색하다. “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늘이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해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니라(8).” 그래서 보다 더 성격적으로 사는 사람은 이자놀이를 하면 안 된다. 건물을 세주어 임대료로 먹고 살면 안 된다. 오히려 재산을 저축하는 게 저들, 가난한 자를 위해서여야 한다. 그런데 그게 쉽나?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나 가난해도 명철한 자는 자기를 살펴 아느니라(11).” 세상에서는 부요함으로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는 꼴이다.

 

셋째, 남의 희생을 강요한다. “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함정으로 달려갈 것이니 그를 막지 말지니라(17).” 꼭 그런 사람이 있다. 자신은 필요한 사람이고 이를 위해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느니라(12).” 곁에 충심을 다하는 사람이 없다. 이처럼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넘어지게 되어 있다. 당장은 훨씬 빠른 길 같고, 손쉬운 듯 보이나, 인생은 길다. 영생은 말할 것도 없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2. 충성된 자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20).” 그럼 저의 특징은 어떠한가?

 

첫째, 주를 경외한다.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14).” 두려워할 줄 아는 건 오직 하나님을 향한 마음일 뿐이지, 실패도 낙오도 좌절도 절망도 두려울 게 없다. 이상하지? 인생의 극한 지점에서 누군 끝내 자살을 선택하고 누군 비로소 주를 찾는다. 그 갈림길의 선택은 의외로 간단하다. 누군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못해 억울하고 누구는 기어이 자신의 죄를 자복함으로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13).”

 

둘째, 말씀을 버리지 않는다.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4).” 가타부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게 성경이다. 오만 가지 성경이 오만 가지 이유로 번역을 달리하고 그 의미를 새로 한다. 좋게 보면 그게 다 온전히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자기 좋을 대로 해석을 도모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사람이냐, 하나님이시냐의 문제다. 성경은 무오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 사람은 그 업적이 아무리 화려해도 울리는 꽹과리와 같고 속빈 강정에 지나지 않는다. 충성된 자는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곧 저는 다른 걸 탐하지 않는다. “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요 음식을 탐하는 자와 사귀는 자는 아비를 욕되게 하는 자니라(7).”

 

셋째, 정직하다.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받느니라(10).” 성실한데 정직하지 않을 수 있다. 정직한데 성실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것은 이미 우리가 나기 전에부터 우리 안에 뿌리내린 유전인자다. “악인은 정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5).” 같이 있어도 같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우리 안에 성령의 영이 우리를 못 살게 군다. 괜히 찔린다. 아무도 모르는데 죄책감이 인다.

 

넷째, 사람을 보고 하지 않는다. “사람의 낯을 보아 주는 것이 좋지 못하고 한 조각 떡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범법하는 것도 그러하니라(21).” 충성은 하나님께 향한 것이지 사람을 위한 게 아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국수주의적인 신앙은 하나님께 향한 게 아니다. 하나님은 인종을 초월하신다. 우리는 사람을 이롭게 하는 종교가 아니다. 하나님을 이롭게 하는 데 있어, 그래서 죽어도 용서할 수 없는 사람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다섯째, 악한 눈이 있는 자와 어울리지 않는다.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22).” 온통 돈돈거리는 세상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이유도, 어디 직장을 구하는 일에서도 그 우선은 재물이 되었다. 맘몬이 주인이 된 세상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고 돈도 열심히 저축해야 하는데 그 모든 이유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다.

 

3. 지혜롭게 행하는 자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26).” 저는 이미 말했듯이 주를 경외하고, 주를 경외함으로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말씀을 붙들 때 기도밖에는 없다는 것을 안다. 저의 특징은 어떤가?

 

첫째, 사람을 경책할 줄 안다.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23).” 아닌 건 아닌 것이다. 모두가 네, 할 때 아니라고 말할 줄 안다. 모두가 아니라고 해도 네, 하고 홀로 대답할 수 있다. 좋은 친구는 남 앞에서 두둔하고 둘이 있을 때 경책해주는 사람이다. 경책이란 정신 차리라고 따끔하게 야단치는 일이다. 억지로 저를 돌이켜 구원할 수는 없으나(구원은 하나님이 하신다.) 할 말을 해줄 줄 알아야 한다.

 

둘째, 부모를 공경한다. “부모의 물건을 도둑질하고서도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 받게 하는 자의 동류니라(24).” 여러모로 가정이 붕괴된 세상에서 부모의 역할은 처참하리만큼 무력하게 되었다. 시쳇말로 위신을 잃지 않으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게 부모 자식 간에도 성립되는 세상이니 할 말이 없다. 한데 오늘 말씀은 부모의 물건을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이다. 저에게 물려받지 않은 게 무언가? 안 보이는 하나님을 어찌 경외하고 공경할 수 있을까? 나의 오늘은 모두 부모의 것이다. 이를 도둑질하듯 내가 알아서 컸다고 하는 자는 멸망할 것이다.

 

셋째, 여호와를 의지한다. “욕심이 많은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25).” 외형적으로 우린 무얼 바란다. 기도도 흔히 외적인 것을 구한다. 그래서 그 바람은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하나 우린 근본적으로 다른 게 하나 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주님도 아버지의 뜻을 바탕으로 구하셨다. 주를 의지한다는 건 나의 일부를 의탁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전체를 내어맡기는 일이다.

 

넷째, 구제하는 자이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크리라(27).” 우린 사랑에 빚진 자들이다.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주께 받은 은혜로써 산다는 일이다. 돌아보면 어느 것 하나 은혜 아닌 게 없다. 사지육신이 멀쩡한 것에서부터 오늘에 이르러 사람 구실을 하고 사는 모든 일들에 이르기까지. 그런 자는 가난한 자를 구제한다. 이는 의를 이루고 선행을 하여 봉사를 내보려는 것이 아니다. 자기만족에 의한 게 아니다. 저절로 그리 되는 것이다. 내가 왜 이런 사람 때문에 고생하나 싶다가도, 그래서 주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재차 확인하는 것이다.

 

 

나오는 말

 

다들 참 바쁘다. 쫓기듯 산다. 사느라 여념이 없다. 죽을 것처럼 공부하고, 죽을 것처럼 일하며 돈을 번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지 못해 사는 인생처럼 살다, 힘에 겨우면 보란 듯이 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왜 그럴까?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9).” 말씀이 중심이 되지 않는 수고와 애씀은 모두 헛되다. 저의 기도와 성실함도 가증하다. 그래서 “무지한 치리자는 포학을 크게 행하거니와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하리라(16).” 무지는 단순하게 자기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 또는 자녀로, 어느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그 모든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분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는 절대 그러지 않을 거야, 하는 사람들의 오류를 답습하고 되풀이할 뿐이다. 포학을 떠는 경우는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는 데 있다. 자신이 우두머리가 되려는 것이다. 이에 힘의 논리가 적용된다. 강자만이 살아남는다. 내남없이 죽어라 하고 권력을 쥐려 한다. 그런데 이 또한 아이러니한 것은 모든 강자 위에는 또 다른 강자가 있다. 이에 장수하는 비결은 탐욕을 미워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욕심을 내는 경우는 딱 하나다. 어쨌든 내가 주인이고 싶은 것이다.

 

쫓기는 자로 살지 않는 방법은 무얼까?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으려니와 방탕을 따르는 자는 궁핍함이 많으리라(19).” 방탕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곧 우리는 상황을 바꾸고 개선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신 바 하나님의 뜻을 일구어 가는 사람이다. 저는 자기 땅으로 만족한다. 저는 온유하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내가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하면 할수록 나의 일생은 쫓기는 자로 살 수밖에 없다. 아무리 수고하고 애써도 항상 쫓아오는 것들이 있다. 더 가져야 하고 더 멀리 뛰어야 하고 더 높이 올라야 할 것 같아서, 그 삶이 온통 피로하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러므로 쫓기지 않는 자의 삶은 주님으로 인하여 정직하고 말씀에 의해 성실하다. 쫓기지 않는 자는 다른 아무 것도 우선하지 않고 오직 주를 경외한다. 그리하여 쫓기지 않는 자의 삶은 지혜롭게 행한다. 저는 말씀을 붙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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