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잠언 29:26-27 / 일의 작정

전봉석 2017. 9. 15. 10:58

20170917 주일

 

잠언 29:26-27

일의 작정

 

 

29:26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29:27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바르게 행하는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느니라

 

 

 

 

들어가는 말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3).” 하는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우리는 아찔하다. 그리스도인이란 들을 줄 아는 사람이다. ‘목이 곧은 사람은 들을 줄 모른다. 그래서 정직하지 못하다.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24:27).” 그저 다들 설마, 하는 것이다. 주님은 일깨우신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17:32).” 일순간 훅, 가는 수가 있다.

 

우리는 목이 곧은 자를 통해 저가 왜 그런지, 결국 일의 작정을 스스로 주도하려는 자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시는지, 징계가 우리에게 왜 값어치 있는지. 말씀은 목이 곧은 자를 통해 일깨우신다. 구원은 순종으로 인한 게 아니라 불순종으로 인한 주의 자비와 긍휼하심이다. 채찍이 없으면 사생아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12:8).”

 

 

1. 목이 곧은 자의 특징

 

1) 창기를 사귄다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창기와 사귀는 자는 재물을 잃느니라(29:3).”

 

창기를 사귄다는 건 세상과 짝한다는 것이고, 재물을 잃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유용하게 두신 것을 잃는다는 것이다. 저는 지혜를 사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17:4).” 이를 어찌 뿌리칠 수 있나. 좋은데, 다들 좋다고 그러고 나도 싫지 않은데.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는데.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7).” 곧 오늘 우리의 여정은 나그네일 뿐임을 성경은 누누이 일깨우신다. 지금이 전부가 아니다. 대학만 가면 되는 게 아니다. 승진만 하면, 출세하고 성공하면 다가 아니다. 끝이 아닌 것이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4:4).”

 

2) 악을 보고도 무덤덤하다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 도둑과 짝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자라 그는 저주를 들어도 진술하지 아니하느니라(29:5, 24).”

 

서로 좋은 말만 하는 사이는 해롭다. 그러려니 하고 놔두는 사이는 아무 관계도 아니다. 아첨한다는 건 매끄럽다는 뜻이다. 쓴 소리를 하지 않는 사이는 병들었거나 죽은 사이다. 우리는 말씀 앞에 통회하고 자복한다. 예수님은 이를 애통하는 자로 삼으셨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5:4).” 곧 하나님의 위로가 없으니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족이 가득하고, 자신에 대한 불만족으로 남에게 불평한다.

 

쾌락을 좇아 산다는 게 악을 일삼는 것만은 아니다. 무덤덤하니 방조하거나 침묵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4:4).” 저들과 벗하고 싶어 하는 것도 다름 아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는 일이다.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63:10).”

 

3) 소외된 자에게 무관심하다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29:7).”

 

그래서 저들은 모른다. 외면이 아니다. 진짜 모르는 것이다. 저들 속엔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누구를 거명하지 않아도, 어쩌면 저렇게 뉘우침이 없을까? 싶은 위인들이 많다. 저들은 자기 잘못을 모른다. 거지 나사로의 말씀에서, 부자는 왜 지옥에 갔을까? 이를 칼빈주의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면 애초에 저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다. 거지 나사로가 자기 집 문 앞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 게 아니라 아예 몰랐다. 관심 자체가 없었다. 하나님이 두신 이 땅의 섭리를 아랑곳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를 반박하신다.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41:1).”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35:3-4).” 이것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다. 남의 슬픔을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로 재해석하는 모든 시도는 악하다. 목이 곧은 사람은 아예 남의 슬픔을 이해할 유전인자가 없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정직한 자는 어떨까?

 

 

2. 정직한 자의 특징

 

1) 생명을 찾는다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고 정직한 자의 생명을 찾느니라(29:10).”

 

피 흘리기를 좋아한다는 말은 무얼까? 실제 그런 자가 있을까? 설마 그러할까? 모든 사람은 선을 추구하는 속성이 있다. 흔히 양심이라고 한다. 아무리 악해도 자기 자식 앞에서는 선하게 보이고 싶어 한다. 다만 누구는 감추고 억압하여 안 그런 척 굴고, 누구는 이를 인정하며 주 앞에 내어놓는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8:9).”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이 있었다. 저를 정죄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깨끗하다고 여겼다.

 

이에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7).” 예수님은 그 여인이 죄가 없다는 게 아니라 너희도 죄가 있다는 것을 일깨우신다. 주님은 우리의 양심을 일깨워 숨겨둔 죄의식을 드러내신다. 이에 누구는 떠나가고 누구는 남는다. 주님은 다시 물으신다. “너희도 가려느냐(6:67).” 빛 앞에 설 때 어둠이 물러가는 것은 당연하다. 정직한 자는 그래서 생명을 찾는다.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스스로도 멈출 수가 없다. 자신을 인정을 하면 모든 걸 잃을 것 같아서 말이다.

 

2) 범사에 인내하며 근신한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하느니라(29:11).”

 

노가 없는 사람은 없다. 가인에게 물으셨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4:6).” 화를 일깨우시는 것이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7).” 아이는 엄마를 탓하고 엄마는 아이를 핑계 댄다. 서로의 화는 언제나 정당하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게 노다. 노는 성경에서 마음으로도 쓰인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32:2).”

 

이로써 그 훈계는 인내와 근신이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37:7).” 남들이 어떠하든 신경 쓸 거 없다(73편 참고). 저들은 저들의 길을 갈뿐이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1:4).” 사람으로 사는 일은 처음서부터 끝까지 자기와의 싸움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하와가 먹었어도 자신은 안 먹을 수 있었다. 저는 그 이유를 하나님이 지으신 여자 때문이라고 핑계 댔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지면 남 탓을 하게 돼 있다.

 

3) 직분에 충실하자

관원이 거짓말을 들으면 그의 하인들은 다 악하게 되느니라 가난한 자와 포학한 자가 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 모두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라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29:12-14).”

 

자녀일 땐 자식의 신분으로, 부모일 땐 부모의 신분으로, 선생일 땐 선생으로, 학생일 땐 학생으로, 성실이란 신분에 따르는 합당함이다. “다윗의 장막에 인자함으로 왕위가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정의를 구하며 공의를 신속히 행하리라(16:5).” 우리는 어떤 위치에 있던 공의를 행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목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는 사람들이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4:9).”

 

충실함이란 어려울수록 빛이 발한다. “악인이 많아지면 죄도 많아지나니 의인은 그들의 망함을 보리라(29:16).” 세상이 아무리 어떻다 해도 우리의 충실함으로 길을 낸다. 다들 어떠니저떠니해도 기독교 문화가 세계 모든 질서를 개선하였다. 미개한 종족에 복음이 들어가면 학교가 세워지고 병원이 생겨났으며, 사람들은 글을 배웠고 사람답게 사는 일에 충실하였다. 오늘 날에도 교회가 어쩌니,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과 달리 무던히 주의 이름으로 충실한 크리스천들에 의해 세상은 유지되고 있다.

 

4) 매를 들라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29:17).”

 

평안이란 정착한다는 뜻이다. 온통 들떠 있는 세상에서 평안한 자의 특징은 근신함이다. 매를 드는 자이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이를 남에게 겨누는 자는 자기 불만족을 해소하는 것뿐이다. 자녀에게 잔소리가 심한 엄마는 틀림없이 남편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회초리를 드는 일은 쉽다. 자신을 때릴 수 없으니까 자신의 불만을 타인에게 불평하느라 매를 든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13:24).” 그러나 앞에 붙은 근실히에 유념하자. 근실은 자신을 근신한다는 뜻이다. 근신은 말이나 행동을 삼가고 조심 또 조심하는 일이다. 자신에게 그리하는 자는 함부로 남을 탓하지 않는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7:2).” 스스로 괴로운 게 매다. 회초리는 맞는 사람보다 때리는 사람이 더 아프다. 이를 부모의 마음으로 두고, 하나님의 사랑을 가늠할 뿐이다.

 

5) 등불이 되라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종은 말로만 하면 고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알고도 따르지 아니함이니라(29:18-19).”

 

남을 견주어 말씀을 되새기기보다 자신에게 견주어 다시보자. 나에게 묵시는 무엇인가? 다 안다고 여길 때 방종은 싹튼다. 내가 알아서 한다고 할 때 방탕함은 예사롭게 된다. ‘묵시란 원문상 환상이란 말이다. 환상은 놀랍고 두려운 것이다. 이해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상식과 기준을 파괴한다. 화들짝 놀람이다. 주체할 수 없다. 속수무책이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를 느낀다면 그 의미를 바로 아는 자이다. 특히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하시는 산상수훈 앞에서 우리는 두 손을 든다.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는 스스로 그리 행할 수 없음이다.

 

성경은 우리를 좌절케 한다. 의를 이룰 수 없어 난감하다.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만 죄인인가? 예수님은 저들도 다 같이 죄인임을 일깨우셨다. 하나님 앞에 우린 의인으로 서야 하는 게 아니다. 무슨 수로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5:13-15).”

 

결코 우리의 행실이 또는 생각과 마음이 등불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다만 들려지는 자이다. 그러할 때 우리는 죽어서도 생수의 강이 흘러넘친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7:38).”

 

 

나오는 말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 때 안전하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29:25).” 당장 결제일을 넘기면 큰일이 날 것 같고, 저 사람에게 밉보이면 해를 입을 것 같고, 누구처럼 젊음을 또는 인생을 만끽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일 것 같고그래서 다들 사느라 드는 비용에 치여 산다. 살기 위해 먹는지 먹기 위해 사는지, 잘 살려고 돈을 버는지 돈을 벌기 위해 잘 살기를 포기하는지, “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20).” 온통 말이 앞서는 세상이다.

 

한데 세상의 이치는 간단하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23).” 교만과 겸손은 양면과 같아서 이쪽을 보면 저쪽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누구를 따를 것인가? 소위 말해 어느 라인에 줄을 댈 것인가?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26).”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일의 작정은 여호와의 것이다. 이를 목이 곧은 자는 한사코 자기주도적으로 이끌려 한다. 하지만 정직한 자는 결코 자신은 그럴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세상은,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바르게 행하는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느니라(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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