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01 주일
잠언 30:5-9
말씀으로 살자
30:5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30:6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30:7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30:8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30: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들어가는 말
어떤 경우에도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무엇으로도 용서가 되지 않는 나의 허물과 죄악을 주께 고할 때,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험준한 낭떠러지를 걸을 때 내가 아버지의 손을 굳게 잡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실은 주가 내 손을 잡고 계셨다. 사랑하는 아버지는 아들이 좋아하는 걸 해주시는 게 아니라 필요한 것을 해주신다. 때론 그것이 상충되어 아버지가 나를 괴롭히시는 것 같다. 몰라도 너무 모르시는 것 같다. 훗날에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는, 어렵다 힘들다 하면서 살았지만 돌아보면 모든 게 주의 은혜라. 감사만 넘치는 게 그리스도인이다. 살면서 좋다, 즐겁다, 행복만을 추구하며 산다고 살았는데 돌아보니 허망함과 후회뿐인 경우가 비그리스도인이다. 그 차이는 무얼까? 오늘 우린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에서 그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의 부족을 아는 게 지혜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2).”
좋을 땐 누구나 인자하고 온화하다. 짜증나는 일이 없으면 저마다 천사다. 스스로 겸손하다 생각하는 만성적인 자기기만은 한 방에 무너진다.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3).” 비로소 그 참담함을 목격하는 것이다. 난감한 상황은 도처에 깔렸다.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마 16:7).” 주님을 곁에 모시고도 그런다. 이를 아는 비결은 다른 데 있지 않다.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눅 10:22).”
자신을 안다는 건 허울뿐이라. 위선은 본능적이어서 내가 안다,고 할 때 벌써 위장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 1:17).” 이를 고백하는 자의 영광은 자신의 부족함을 철저히 주께 아뢰는 것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 다시 말해 내가 죄악 되며 허물이 많아서, 주의 말씀이 뭐라 하시든 의로우시다. 어떤 심판을 내리셔도 합당하다. 어떤 이의도 제기할 수 없다.
역설적으로 그런 자의 삶은 평안이라.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2).”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5-6).”
누구든 다 말에 토를 단다. 이는 무엇을 견주어서이다. 알겠는데, 하면서 자기 항변이 있는 것이다. 나도 잘한 건 없지만 너도 나빠! 하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 1:5).” 한데 말씀은 빛이다. 내 안의 어둠이 조금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사는 날 동안 죄를 씻고 없던 걸로 사는 게 아니라, 이를 더는 숨기지 않고 주 앞에 내어놓으며 사는 것이다. 말씀 앞에 말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말씀이 우리를 인도하시게 하려면 내 생각을 들고 주 앞에 갔다가 말씀만 붙들고 오는 것인데, 내 생각은 어느새 하나님의 생각에 승복된 것이다. 그것으로 산다. 삶이 전투다.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7).”
기도의 자세가 달라진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7-9).”
나의 소원을 주께 고하다 주의 소원을 내가 바라게 되는 게 기도다. 나를 위한 기도는 줄어들고 ‘너’를 위한 도고가 늘어간다. 내가 왜 저를 위해 기도하고 있나 싶게, 도저히 마음으로는 바랄 수 없는 것을 주께 구하는 게 기도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왕상 18:37-38).” 곧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행 4:29-30).”
기도는 주의 쓰심에 합당하기를 바라는 데까지 자라간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막 14:36).” 그리하여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비방하지 말자
“너는 종을 그의 상전에게 비방하지 말라 그가 너를 저주하겠고 너는 죄책을 당할까 두려우니라(10).”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별력을 주시는 까닭은 저를 비방하지 말고 대신 기도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싶은 상식 이하의 문제에서부터 주를 바라고 구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행여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도 자기의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12).” 비방은 그런 속셈이다. “눈이 심히 높으며 눈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가 있느니라(13).” 만성적인 교만증환자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자신을 자신만 모른다.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거나 과부의 눈으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였던가 나만 혼자 내 떡덩이를 먹고 고아에게 그 조각을 먹이지 아니하였던가(욥 31:16-17).” 나름 자신은 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6-27).”
욕심을 다스리자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15-16).”
욕심이란 구덩이는 끝이 없다. 새는 바가지다. 터진 항아리다. 이것만 있으면 될 것 같지만, 더 나은 걸 바라게 돼 있다. 곧 돈이 대표적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끝 간 데 없이 더해지는 게 욕심이다. 아간의 외투(수 7:24)와 아나니아 부부의 거짓말(행 5장)이 교훈한다.
기이한 것들의 교훈
1) 악의 자취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 그가 먹고 그의 입을 씻음 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20).”
오늘 본문은 그 흔적이 묘연한 것이 악을 연상케 함을 일깨운다. “내가 심히 기이히 여기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공중에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자취와 반석 위로 기어 다니는 뱀의 자취와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한 자취며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 그가 먹고 그의 입을 씻음 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18-20).” 결국 우리가 죄를 고하여 씻음 받을 수 없다. 다만 부끄러움으로 주 앞에 엎드릴 뿐이다.
2) 상식과 밖의 상식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과 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 간 것과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21-23).”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싶은 게 실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창 6:2).” 버젓이 그러고 산다. 차라리 안 믿는 자라면 덜하겠는데,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는다는 이들이 교회에서 요가를 운운하고 동성애가 어떻고 술 담배가 어떻고 하며 설왕설래 말이 많다. 말이 길어지는 까닭은 ‘말씀대로’는 싫은 것이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6:7).”
3) 작은 것들의 힘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준비하는 개미와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24-28).”
메뚜기가 거대한 강을 건너는 진풍경을 보면, 앞서 건너는 수만 마리의 메뚜기가 강에 흩뿌려지듯 스러져 그 길을 내고 이를 따라 수천만 마리가 강바람의 기류를 피해 대륙을 건넌다. 우리가 붙들 것은,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29-31).” 주를 앙망함이다.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이 그러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 12:1).” 우리만 그런 게 아니다. 미약하나 우리의 오늘은 기이한 주의 일의 연속이 된다.
4) 당당함에 대하여
“잘 걸으며 위풍 있게 다니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짐승 중에 가장 강하여 아무 짐승 앞에서도 물러가지 아니하는 사자와 사냥개와 숫염소와 및 당할 수 없는 왕이니라(29-31).”
명품을 갖고 고가의 물건을 소유하고 고대광실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게 당당함의 위세인 것 같지만 실은 저들보다 굽실거리는 위인들도 없다. 겹겹이 경비를 두고 보디가드를 두고 사는 저들의 삶을 위세 좋은 당당함으로 여긴다면 이는 꼴불견이다. 우리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7-19).”
나오는 말
자신을 쳐 복종시키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그러니 오늘 본문은 일깨우신다. “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32).” 남에게 보이려고 주여 주여하는 것을 주님은 가장 싫어하신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마 6:1).”
당연히 “대저 젖을 저으면 엉긴 젖이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는 것 같이 노를 격동하면 다툼이 남이니라(33).” 누구도 주 앞에서 의로울 수 없다. 주님이 의롭다 하심으로 우리가 의로운 걸 믿는 자만이 의롭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이에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7).”
그러므로 “그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 살리라(렘 25:5).”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이다. 온전히 주만 바라며 살자. 말씀으로만 살자.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잠 30:5).” 아멘.
'[설교원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호수아 7:26 / 아골 골짜기 (0) | 2017.10.20 |
---|---|
잠언 31:10, 30 / 현숙한 사람 (0) | 2017.10.06 |
잠언 29:26-27 / 일의 작정 (0) | 2017.09.15 |
잠언 28:1 / 쫓기지 않는 삶 (0) | 2017.09.08 |
잠언 27:1-2 / 가까운 미래 (0) | 2017.08.24 |